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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8화)
2. 흉내 내기 (4)/

영문모를 질문에 어리둥절해져서 나는 반사적으로 스칼라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 외할아버지시란다.”
“…!”
우째 이런 일이… 아찔한 충격으로 한동안 머리속이 멍해졌다. 외할아버지라니? 스칼라는 어쩌다 그런 사람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지? 으음, 이 일을 어찌 수습한다?
‘이게 다 제제 때문이야. 왜 무조건 하대를 하라고 시켜가지고…’
잠시 제제를 원망도 해보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짧은 시간동안 눈부시게 머리를 굴렸고 잠시 후 씨익 웃는 얼굴로 말했다.
“스스로 자격을 증명해 보이길 바래요.”
“네 할애비가 될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겠다는 뜻이냐?”
“동시에 상인으로서의 능력도 볼 수 있죠.”
아아, 이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말이 된다는 데에서 나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클날뻔 했다.
“풋, 푸하하하하…!”
노인은 미소짓고 있는 내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어젖혔다. 유쾌하기 그지없다는 듯, 어찌보면 통쾌하기 까지한 웃음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 좋은 것일까?
“합! 신의 눈물이라고도 불리는 이링카는… 흔히,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있다.”
갑자기 웃음을 그친 그는 진지한 어조로 이링카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옛날… 델마로라고 하는 오지에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정말 쓸모있게도 사람들의 눈물을 보석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었지. 물론 눈물이라고 해서 죄다 보석이 되는 건 아니었어. 아니, 보석보다는 돌이 되거나 평범한 구슬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지. 설령 보석이 된다 해도 채 한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도로 눈물로 돌아갔고.”
“…”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이가 자랄수록 능력이 점점 사라져가자 주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금새 떠나버렸고 아이는 그대로 평범하게 자라는 듯 했다. 그런데 이십여년이 지난 후 보석이 하나 나타난 게야. 그것은 눈물 방울의 모양을 한 맑고 투명한 보석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햇빛에 비추어 보면 오색찬란한 빛이 사방에 가득 퍼지고 병이 있는 자 가까이에선 희미하게 소리가 난다고 말하기도 했지.”
그는 설명을 하면서도 그 모습을 상상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눈을 떴을 땐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던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냉정한 눈빛을 해보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신의 눈물 혹은 이링카라고 불렀다. 이링카는 건국 신화속에 나오는 치유의 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것이 일종의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러나 이링카를 가졌다고 해서 병이 나았다거나 이후 또다른 이링카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가 없다.”
“그렇다면 그 이링카나 그것을 만든 자의 행방은…?”
“이링카는… 죽음의 숲에 있다는 소문을 얼핏 들은 것 같긴 하다만 확인된 바는 없다. 그리고 만든 자의 행방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고.”
이상한 일이었다. 이링카를 찾아서 숲으로 들어온 나기의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차마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모두들 그것이 죽음의 숲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정작 나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데…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설명을 다 마친 노인이 눈빛을 번뜩이면서 의미심장한 투로 물어왔다.
“자아, 어떠냐? 이만하면 네게 할애비라고 불릴 자격이 있느냐?”
“…있다고 생각하세요?”
“음? 있고말고. 이 정도의 내용은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해도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장담을 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며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정말인가?
‘말도 안돼. 이 정도가 고작이라면 나기와의 약속을 지키기가 어렵단 말이야.’
나는 나기에게 이링카를 찾아 주겠다고 약속한 일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요구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보석을 찾아야 하는 일이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저 막연히 정체를 알기만 하면 구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가 막히는군. 그런 것을 이제 겨우 열다섯살 밖에 안된 어린 녀석에게 찾아오라고 시켰단 말인가? 대체 어떤 인간들이…?’
애초에 죽음의 숲으로 들여보낸 것부터가 수상했다. 그건 말 그대로 죽으라고 보낸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 아닌가. 따라서 나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선 주위에 더 많은 눈이 있어야 했다. 바로 상인들 같은…
“솔직히 만족스럽지가 못해요.”
“응? 어째서? 설마…”
“그래요. 내가 원한 건 바로 이링카였어요. 그걸 찾아오면 인정해 드리죠.”
“그, 그런…”
“힌트 하나 드릴까요? 이링카는 죽음의 숲에 없어요. 이건 확실한 정보죠. 그러니 다른 곳을 찾아보셔야 할 겁니다.”
노인의 얼굴이 흉하다고 할 만큼 일그러졌다. 그래서 나는 반대로 화사하게 미소를 지어보이곤 그대로 홱 돌아서서 응접실을 나와버렸다. 나오면서 내심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은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이 밥만 처먹는 식충이들아, 당장 엉덩이 들고 일어서지 못해!”
노인의 성난 고함소리가 저택 곳곳으로 쩌렁쩌렁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의 성격이 보통이 아님을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독을 품었다는 것도.

상인들이 군말 않고 돌아가준 덕분에 나는 나름대로 한가한 점심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아… 왼발, 오른발, 왼발… 돌고! 다시 한번 더!”
내가 그다지도 자신 없어 하고 평생 피해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장르… 바로 춤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즉, 나는 지금 웬 중년인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곁에선 킬군이 오만방자한 자세로 앉아서 히죽히죽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고. 젠장. 어지러워 죽겠다. 아무리 황제폐하의 생일 파티가 낼 모래라고는 하지만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대체, 대체… 왜 이제 와서 춤 따위를 배워야 하는 거야아아…!’
나는 말도 못하고 속으로 무수한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게다가 이 느끼하기 짝이없는 나의 춤스승은 처음 나를 보자마자 ‘아름다운 레이디’ 어쩌고 하며 내 손등에 키스까지 했던 것이다. 소름이 돋아서 죽는 줄 알았다.
“그냥 파티가 아니다. 황실의 모든 종친들과 귀족들의 대부분이 모이는 중요한 자리야. 그런 곳에서 너를 소개하려면 최소한 모두의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어 놔야지. 캬캬캬…”
두어시간에 걸친 연습이 끝난 후, 입을 댓발이나 내밀고 항의를 하는 내게 킬은 그렇게 말하면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흉칙하게 웃어젖혔다. 그리고 황실의 인척들과 주의할 점에 대해서 몇가지 말해줬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칠왕야에 대한 것이었다.
“놈은 황제가 늘그막에 본 막내 아들이지. 위로 다섯 형제를 낳은 첫 번째 황후는 나를 낳은지 얼마 안돼서 세상을 떠났고 여섯째와 일곱째가 두 번째 황후의 소생들이다. 가장 큰형님이신 태자께서는 병약하여 소생이 없고 아버님이신 황제는 막내인 놈을 많이 아끼고 계신다. 황후가 욕심을 품을 만도 하지.”
“누가 태자가 되든 우리와는 상관없잖아?”
“왜 없어? 지금 황후의 소생이 태자가 되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면 눈에 가시같은 우릴 그냥 살려두겠냐?”
킬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들 오형제 중에서 새로운 태자가 나와야 한다나? 아아, 그래봤자 어차피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들만의 문제일 뿐인데 무슨 놈의 유희를 그렇게 진지하게 즐기는 것인지…
‘하긴, 저런 성격이니까 똥개로 변해 유희를 즐길 생각까지 했었던 거겠지.’
과거를 떠올려 놓고보니 킬군은 지금의 이런 모습이 오히려 더 정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원래부터 그런 도마뱀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부터 이상한 녀석이었다고.
게다가 열과 성을 다해 떠드는 그에겐 매우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이미 그 칠왕야란 자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시커먼 그의 기사단에 대해서도.
“만약에, 내가 그 칠왕야란 자를 마음에 들어한다면… 어떻게 할거야?”
“뭐? 무슨 소리냐? 누가 마음에 든다고?”
“칠왕야 숙.부.가 마음에 들어서 그를 황제로 만들고 싶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조금은 도발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묻자 킬군은 입을 꾹 다물고 한동안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러다 막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딱’ 손뼉을 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느긋하게 변한 태도로 말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지. 맘대로 해.”
“뭐? 진짜?”
“물론. 황제든 거지든 마음대로 해보라고. 흐흐흐… 왠지 저녁 식사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냐, 아들아?”
무언가 의미가 듬뿍 담긴 것같은 오묘한(?) 웃음. 뭘까, 갑자기 엄습하는 이 속은 듯한 기분은? 난데없이 덮쳐온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사들과의 저녁 식사 시간.
긴장한 얼굴로 앉아있는 킬, 증거로 만들어 놓은 문서를 들고 외울 듯이 읽어대는 스칼라, 그리고 자꾸 목이 마른 나. 우리는 오십여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길다란 식탁 앞에 오도카니 앉아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들이 늦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급해서 진작부터 사이좋게 내려와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옆엔 증인으로 불려나온 나기가 꼼짝도 못하고 어색한 자세로 앉아 주위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누구 덕분에 고생한다, 나기야. 그러나 쬐금만 참거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단다.
“저기, 차라도 내올까요?”
“필요없다.”
“됐어.”
조심스럽게 꺼낸 말을 우리가 단박에 물리쳐 버리자 제제는 두려운 듯 숨도 제대로 못쉬고 슬그머니 물러섰다. 그러나 그런 그와 달리 어디까지나 근엄한 이안은 아예 묻지도 않고 알아서 척척 우리앞에 차를 내려놓고 사라져서 그에게 존경어린 눈길을 받았다. 어떤 면으론 상당히 대단한 이안이었다.
“기사단은 아직도 오지 않았느냐?”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킬은 버럭 소리쳐서 확인을 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이안의 묵직한 고개짓. 도리도리… 흐흐흐, 그럼 그렇지. 과연 나의 승리는 멀지 않은 것이렷다? 묘한 쾌감에 저절로 은밀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가윈이하 흑사자단이 왜 그토록 내기에 열광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다름아닌 바로 이 짜릿한 승리감이 그 원인이었던 것이리라.
“하.하.하…”
나는 벌써 이기기라도 한듯 팔짱을 끼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자 한쪽볼을 실룩거리면서 외치는 킬의 말.
“하, 아직은 웃을 때가 아니란다, 아들아. 자고로 내기는 끝까지 가봐야 결과를 아는 법이니까!”
“우헤헤헤, 끝까지 가봤자 별수 있으려고?”
“오냐,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
킬은 두주먹을 불끈 쥐고 전의를 다졌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 의지가 점점 살벌해지 더니 나중에는 ‘전부다 죽여버린다!’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제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지만.
‘역시 내기꾼들 곁에서 큰 보람이 있구나.’
나는 내심 뿌듯함까지 느꼈다. 그리고 승리감에 취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저녁식사는 이쯤에서 끝내야 하지 않을까? 이미 날이 어두워졌는데…”
“무슨 소리! 안 늦었어. 원래 품위있는 놈들은 이 시간까지 먹어. 맛있는 음식은 천천히 즐겨야 하는 거 몰라?”
그는 이제 억지까지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차를 들여놓은 후 내내 현관앞에 나가있던 이안이 길게 소리친 것은.
“기사들이 왔습니다, 왕야!”
“뭐?”
“하! 하하하! 들었지? 왔다, 왔어! 크하하하…”
소리를 듣자마자 킬은 흡사 미친놈마냥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식당문을 박차고 마구 달려나갔다. 그리하여 선 채 굳어있던 나도 지체없이 뒤를 따랐는데 얼마 달리지도 않아서 우리는 줄 지어 걸어오는 퍼런 기사들과 복도에서 딱 마주쳐 버렸다. 그런 그들의 어깨엔 웬 덩어리들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결과는?”
“하인을 포함해서 열두명, 모두 찾아 데리고 왔습니다, 왕야!”
“크, 크하하하하하…!”
아아, 이 무슨 벼락맞은 나무에 깔려죽고도 남을 일이란 말인가. 한순간 눈앞이 어질거려서 나는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악몽의 유희가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책갈피> ― <그는 궁금했다.>

“아직도냐?”
방금 전 수하들과 합류한 길리언은 두툼한 털옷위에 갑옷을 껴입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네, 두목. 벌써 이틀째입니다.”
“안 떨어지는 것이 꽤 끈질긴데요? 대체 뉘 집에서 보낸 개들인지…”
열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바논이 지겹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들은 아지트로 삼고 있는 빈 창고에 모여 밤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아는 상인에게서 공짜로 빌린 곳이었는데 겨울밤을 나기엔 너무 추운 곳이어서 창고 바닥에다 일찌감치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는 상태였다. 시커먼 갑옷을 걸친 길리언이 모두가 모여 있는 모닥불 주변으로 걸어가자 몇몇이 엉덩이를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짐작 가는 곳도 없냐?”
“너무 많아서 모르겠다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나타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다른 놈들보다 끈질긴 것이 왠지 보통 놈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흐음, 대체 누구지?”
이틀 전에 갑자기 나타난 박쥐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감시 아닌 감시를 하고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오십여 명이 넘는 그들인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박쥐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꼭 나타나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끈질기기도 상당히 끈질겨서 흩어지든 모여 있든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드시 나타나 주위에서 기웃거리는 자들이다 보니 그들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고백해라. 니들, 혹시 나 모르게 무슨 사고 친 것 아니냐?”
“사고라뇨? 착한 우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맞아요. 이틀 전에 무슨… 가만, 이틀 전이라면… 밥을 거하게 얻어먹은 날이잖아?”
“맞아. 꽤 이쁜 도련님이었었지?”
누군가의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오자 수하들은 미리 짜기라도 한 양 히죽 웃더니 일제히 한마디씩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이쁜 도련님을 보지 못한 길리언으로서는 당연히 의문을 가질 법한 방정맞은 태도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은근한 투로 물었다.
“그렇게 이쁘든?”
“무지 이뻤어요. 번쩍거릴 정도로 잘 차려입었는데 어찌나 이쁘던지 처음엔 레이디인줄만 알았다니까요?”
바논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흐흐’ 웃는 얼굴로 그 이쁘다는 도련님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길리언으로서는 그의 눈높이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마지막에 ‘오왕야 댁의 도련님이시지 뭡니까?’ 라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관심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그 댁 도련님은 멀리 떠나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돌아오신 거죠. 그 댁 기사들이 따라다니고 있는 것까지 봤어요.”
“그렇단 말이지?”
오왕야는 그들의 주군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주군과 함께 먼발치에서 몇 번 보았는데 그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아들이 돌아와 난데없이 수하들에게 밥을 사주었다고?
‘그렇다면 박쥐들을 보낸 것은 그쪽인가?’
거의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내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다가 갑자기 박쥐들을 보낸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아마도 오왕야가 아닌 그 아들이 보낸 것이 틀림없을 거야.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생각할수록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응? 근데 그건 또 뭐냐?”
막 고개를 돌리던 그는 수하들의 갑옷 위에 그려져 있는 하얀 개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자신이 영지를 떠나올 때만 해도 그런 그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였다.
“니들은 취향도 참 특이하다. 다른 좋은 것들 다 놔두고 왜 하필 개냐?”
“개라뇨? 이게 어떻게 개로 보여요?”
“엥? 개가 아니면 뭔데?”
“늑대죠! 고독한 하얀 늑대!”
“밀리온님이 직접 그려주신 거예요.”
“아, 아버지가…?”
길리언은 입을 쩍 벌리고 굳어졌다. 순간 그의 머리 속엔 술에 취해 개를 그리고 있는 허연 아버지의 모습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내가 못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