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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7화)
2. 흉내 내기 (3)/

이른 아침, 눈만 뜨고 멍하니 침대위에 누워있는데 제제가 코끝을 빨갛게 물들이고 달려와 부지런을 떨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추워요, 도련님. 그러니까 외출은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 안 그래도 오늘은 하루종일 바쁘실 것 같거든요.”
“…”
“오전엔 역사 공부를 하셔야 하고요, 오후엔 춤을 배우셔야 해요. 그리고 점심 식사는 모치즈가의 상인들과 하시고, 저녁 식사는 왕야께서 기사단의 각 수장들을 부르셨답니다. 하아, 조금 바쁘겠지요?”
즐거운 참새처럼 재잘거리면서 방안을 돌아다니던 제제는 대야를 받쳐든 하녀들이 들어오자마자 그때까지 꼼짝도 않고 있는 나를 불끈 안아 일으켜놓고 재빨리 손을 놀렸다. 남이야 눈을 떴든 감았든 상관없이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까지 단정하게 빗긴 다음 어제와 다름없는 말짱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치장을 마친 후 번쩍거리는 스스로에게 눈부셔 하며 나는 제제에게 물었다.
“나기는?”
“상처는 말끔하게 나았습니다. 부러진 팔도 며칠이면 다 나을거라더군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밥을 몇 그릇이나 먹어치웠어요. 그리고 곧 녀석의 가정교사가 올 겁니다.”
“어떤 놈들에게 맞았는지 알아낼 수 있어?”
“글쎄요. 목격자들이 있을 테니까 조사하면 알아낼 수는 있을 거예요. 근데 그건 왜 물으시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 그에게 나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기사단의 각 수장들이 온다고 했지?”
“네.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실 거라고…”
“그들에게 가서 전해. 내가 그놈들을 보고 싶어 한다고. 오늘 중으로.”
“네? 그럼…”
“놈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올 필요 없다고도 전해.”
기사단 따위 그다지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할테니까. 다만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줄수는 있었다. 킬군이 인간 흉내를 내는 것처럼 얼마든지 필요한 척 흉내내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파비안…”
“어서 오너라, 우리 아들. 잘 잤니?”
“네.”
어디론가 달려가는 제제를 뒤로 하고 식당안으로 들어서자 시무룩한 얼굴의 스칼라와 히죽 웃고 있는 킬군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역시 표정만큼이나 다른 아침 인사. 스칼라는 무표정한 내 얼굴을 보고 더욱 표정이 어두워져서 시선도 떼지않고 내내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고개짓을 하고 있었다. 킬군이야 처음부터 아무 생각없는 놈처럼 연신 히죽히죽 웃는 얼굴이었고. 대체 아침부터 뭐가 그리 좋은 것인지.
“아들아, 아직도 기분이 별로니?”
“조금.”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 아들내미 기분이 나아지려나? 좋은 생각 없느냐, 이안?”
곁에 서서 접시를 내려놓는 집사, 이안을 바라보며 그는 유쾌한 투로 물었다. 그러자 이안은 지난 밤과는 상당히 다른 근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역시 근엄하기 짝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타고 산책을 나가 보시겠습니까? 지금 연무장에서 기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을텐데요.”
“없을 거야. 방금 전에 내가 뭘 좀 찾아오라고 시켰거든.”
“그래? 뭘 찾아오라고 시켰는데?”
“내가 데리고 온 녀석이 몰매를 맞았어요.”
“그 얘기는 들었다. 그래서 때린 녀석들을 찾아내라고 한 게냐?”
킬군은 흥미가 당긴 듯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면서 물었다. 그래서 나는 스푼을 들려다 말고 또박또박 대답해 주었다.
“찾아내지 못하면 눈앞에 나타날 필요가 없다고도 했어요.”
“흐응, 감히 내 기사들을 얕보는 게냐? 후회할텐데…”
“그쪽이야 말로 너무 믿고 있는 것 아닐까요?”
“…내기 할테냐? 그들이 네 기대를 충족시키면 넌 이제부터 우리에게 ‘엄마’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용납 못해.”
흐응, 어디다 감히 내기 운운하시나? 내기에 환장한 놈들 틈에서 잔뼈가 굵은 이 몸이거늘. 나는 킬군의 도발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래 이런 종류의 도발은 그때그때 밟아줘야 하는 법이니까.
“만약, 그들이 내게 실망을 준다면… 내 맘대로 새로운 기사단을 만들 거예요.”
“오냐, 말리지 않으마.”
“여보, 당장 문서부터 만드세요.”
우리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스칼라가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당장 이안을 시켜 종이와 펜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칼라를 증인으로 세우고 그럴듯한 증거 문서를 만든 다음 본격적인 내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흥, 바랄 걸 바래야지. 꿈은 야무져 가지고…”
“파비안님? 무슨 말씀이신지…”
“에?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내기를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두툼한 책을 펼쳐놓고 소리내어 읽어주던 허연 노스승이 고개를 바짝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코 끝에 안경을 걸쳐놓고 있는 흰머리의 노인으로 이안의 말로는 제국에서 이름 꽤나 날리고 있는 역사학자라고 했다(그 이름을 모르면 간첩인지부터 의심을 해봐야 한다나?). 그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수업이 지루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눈이 저절로 감기려고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제가 어디까지 했습니까?”
“제국을 일으켰도다… 까지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에, 이후 초대 황제폐하께서는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가셨습니다. 위로는 초원 제국인 아얀과의 전쟁으로 국경을 확실히 하셨고, 아래로는 옛 카난 제국의 일부와 여러개의 왕국들을 정복하기 위해…”
책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아 있다보니 문득 클로토 백부에게 마법을 배우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땐 그래도 이타라가 있어서 덜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더구나 내가 궁금한 것은 제국의 역사가 아닌 크샤인 제국이 어찌 되었는가 였는데 티란이라고 하는 스승은 그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은 제국의 역사부터 배워야 한다는 이유에서 였다.
두어시간에 걸친 지루한 공부 시간을 보낸 후 내가 막 방에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기가 달려왔다. 녀석은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그 모양으로 내내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나기야, 팔은 좀 어때?”
“나기, 이제 안 아프다.”
“그래, 다행이구나. 근데 어제는 왜 그랬던 거지? 누굴 봤길래 그렇게 사라진 거야?”
놀란 얼굴로 ‘큰 도령’이라고 외치던 것을 기억해내고 물었더니 녀석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사실을 털어놓았다.
“큰도령인 줄 알았다. 만날 같이 있던 친구들 봐서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었다. 나기, 많이 맞았다.”
“그 큰 도령이라는 자의 이름은 알고 있어?”
“아니. 그냥 큰 도령이다.”
에휴, 어떻게 된 녀석이 사람 이름도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큰 눈을 깜빡거리면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이 대체 어떻게 자라왔는지 새삼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말은커녕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알고 있지 못하다니… 이것이 어디 흔한 일이던가?
“대체 어디서 자랐길래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지? 하다못해 아비라는 자의 이름만이라도 알았으면…”
“나기는 아비랑 살았다. 산에서 둘이 살았는데 사람 오면 다른 산으로 갔다.”
“뭐?”
녀석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비록 두서도 없는데다가 확실하지도 않은 짧은 말 한마디였지만 그 한마디로 인해 나는 녀석이 아비와 함께 누군가에게 쫓겨 다니며 계속 숨어 살아 왔다는 사실을 대강 꿰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백작은 뭐고 큰 도령은 또 뭐란 말인가?
“기사들이 그놈들을 찾아오면 알 수 있을래나?”
나기를 때린 놈들을 찾아오면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되면 더더욱 많은 것을 바랄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그들도 나기 부자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것이 없을 테니까.
“도련님, 여기서 뭐 하세요?”
제제가 복도 한복판에 서있는 우리를 보고 달려오면서 물었다.
“별 거 아니야. 잠깐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근데 무슨 일 있어?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오고.”
“점심 약속을 잊으셨어요?”
“점심? 아, 맞다!”
“정말 잊고 계셨군요? 서둘러야겠어요. 모치즈 가의 상인들이 벌써 도착하기 시작했거든요.그 일로 마님께서 찾으시는데 가시기 전에 우선 옷부터 갈아 입으셔야 해요.”
“응? 그냥 가면 안돼?”
아침에 입은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묻자 제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짧게 혀를 찼다.
“안돼요, 안돼. 상대는 상인이라고요. 웬만큼 차리지 않으면 위신에 손상이 가요. 마님의 체면도 생각해 주셔야죠.”
“에휴, 그럼 가능한 덜 화려한 것으로 입혀줘.”
“넵.”
제제는 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막상 입혀놓은 것은 비단으로 만든 눈부신 옷이었다. 안에 검정색 셔츠를 입고 발등까지 내려오는 검정색 비단 바지를 입은 다음 위에 품이 넓은 황금색 비단 자켓을 걸쳤는데 그것이 어찌나 번쩍거리는지 흐린 날 내놔도 빛이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머리며 손가락에 걸린 보석도 한두개가 아니라서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인간이 아니라 돈덩어리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아셨죠? 당당하게 대하셔야 해요. 도련님께선 저들의 주인과 같으시니까 누구에게든 하대를 하시고요, 가차없이 명령하세요.”
“응, 알았어.”
“건방지게 구는 자가 있으면 저한테 와서 말씀만 하세요. 제가 적어놨다가 꼭 복수해 드릴께요.”
제제는 마치 나를 전쟁터로 떠나보내는 사람마냥 심각하게 굴더니 방을 나설 때 쯤엔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전의를 다지는 것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신아, 나도 가?”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던 나기가 멍하니 물어왔다. 같이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봤자 스칼라에게 구박이나 받을텐데… 하는 수 없이 방에 남겨두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제제가 먼저 끼어들더니 검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말했다.
“넌 안돼. 거긴 무지 재미없는 곳이거든. 대신 시장 보러가는데 데려가 줄게. 아, 그리고 ‘신’이라고 부르지 말고 도련님이라고 불러드려. 알겠지?”
“응. 알았다. 도련님.”
나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향해 ‘헤헤’ 웃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마주 웃어보인 다음 제제에게 말했다. 시장에 가거든 녀석에게 사탕을 사주라고. 분명히 좋아할테니까.
직후, 나는 혼자 복도를 지나 스칼라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찾아갔다. 그곳은 백여명이 동시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넓은 곳이었는데 용도가 용도인지라 보통 화려하게 장식된 곳이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양탄자부터 금 조각이 새겨진 여러개의 장식장과 각종 도자기, 유리병 그리고 그림까지. 말 그대로 가치가 나가는 것이라면 없는 것이 없었다. 물론 그래봤자 온통 금 천지인 내 방보다는 덜 눈부셨지만.
“하아, 상인 집안이라더니 정말 많이도 가져다놨구나.”
나는 한숨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서서 스칼라가 있는 곳까지 타박타박 걸어갔다. 그녀는 그 으리으리한 곳에 혼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렴. 차 한잔 마시련?”
“생각 없어요.”
“…아직도 내게 화 나 있는 거니?”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딱히 화가 났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망스러운 것만은 사실이었던 까닭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미간을 홱 찌푸린 채 화난 듯 뾰족하게 소리쳤다.
“어째서? 킬의 말처럼 그 꼬마녀석을 치료해 주지 않았다고? 하지만 내가 왜 녀석을 치료해 주어야 하는데? 녀석 때문에 네가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나로선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은 거야.”
“그래도 치료해 주었어야 했어요. 눈앞에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녀석이 가엾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어딜 가든 내가 말짱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게 아니야. …돌아오지 않을까봐 걱정했어. 그대로 훌쩍 사라져 버릴까봐. 그래서 꼬마녀석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나였다.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어. 마지못해 끌려와서 금방 사라질 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우린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 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유희중이라고 해서 흉내내고 있는 거 아니야. 부모인척 흉내내고 있는 거 아니라고. 최소한 나는… 널 낳은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어. 카이를 낳았듯이 널 낳았다고. 인간이라거나, 카이 대신이라고도 생각 안 해. 넌 카이이면서도 카이가 아니니까.”
딱 부러지듯 단호하게 내뱉은 그녀는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는 나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와락 끌어 안았다. 그리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릴 당장 받아들여 달라는 건 아니야. 단지 여기서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만 말아달라는 것 뿐. …혼자는 너무 외롭잖니.”
내게로 전해지는 고통같은 희미한 떨림.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혼자 남겨졌다는 현실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미안해요. 아무래도 내겐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
“하지만 노력은 해볼께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아, 그리고 다음부턴 다친 사람을 보면 꼭 치료해 주세요.”
그녀의 품을 벗어나면서 나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직도 울지 못하고 그런 미소를 짓는 구나.”
안쓰럽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품에선 향긋한 꽃향기가 났다. 예전 울 엄마에게선 늘 찌든 땀 냄새와 흙 냄새가 났었는데…
“마님, 모치즈 가의 상인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안이 들어와 예의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모실까요?”
“그래. 어서 모시게.”
스칼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응접실의 문이 지체없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한떼의 상인들이 조용히 들어와 차례로 빈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스칼라의 옆자리에 앉아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는데 모두들 눈부시게 번쩍이는 것이 척 보기만 해도 돈 냄새가 날 것같은 화려한 차림들을 하고 있었다. 단 두사람만 빼고 말이다.
그 중 한 사람은 나이가 꽤 많은 노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얼굴엔 주름 하나 없었고 다른 사람은 노인의 뒤에서 바짝 따라오고 있는 새파란 중년인으로 그의 옆구리엔 두툼한 장부가 몇권이나 끼워져 있었다. 그들은 별다른 장식없는 옷에 흔한 가락지 하나 안 낀 평범한 차림으로 나타나 말없이 상석인 우리 둘의 근처에 앉았다. 꽤 높은 위치에 있는 모양이었다.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그들도 스칼라와 같은 은발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닮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부자지간이 아닌가 싶었다.
“모두들 모여주셔서 감사해요.”
모인 사람들이 모두 제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을 확인한 스칼라는 느릿한 목소리로 그렇게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오랫동안 떠나있던 내 아들이 드디어 열다섯살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아이로 파비안 카이 타마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체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련님. 저는 모치즈 가에서 직물을 담당하고 있는 샤갈이라고 합니다. 소식을 듣고 미리 도련님의 옷 한벌을 지어 왔습니다. 나중에 한번 입어 보시지요.”
비단 옷을 걸친 날씬한 중년인이 일어나 허리를 숙이면서 그렇게 인사를 했다. 그래서 나는 미소지은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곧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때 내 머리속에선 무조건 하대를 하라고 했던 제제의 말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물론 가차없이 명령을 내리라는 말도 함께. 그래서…
“자네는 혹시 ‘이링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는가?”
내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예의 이상한 노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앉은 자리가 있으니 아무래도 그가 수장격인 것 같아 물은 말이었다. 그가 모르면 다른 자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 일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마치는 순간 상인들의 얼굴이 일제히 돌처럼 굳어졌다. 나,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인가? 슬그머니 불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미 뱉어놓은 말을 중간에 다시 거두어 들이기도 뭐해서 나는 계속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상인들은 재물을 다루긴 하지만 동시에 정보를 다루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묻는 거다. 아는가, 이링카에 대해서?”
“으음…”
“모르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오늘의 만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선언하듯 냉정하게 결론을 내린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스칼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시장 구경이나 나갈 걸 그랬어요. 그럼…”
“…”
“잠깐!”
일어선 내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입을 꾹 다문채 꼼짝도 않고 앉아있던 노인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버럭 소리쳐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리곤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에 대한 것이라면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말해주기 전에 나는 우선 한가지 대답부터 들어야겠다.”
“…”
“지금 네 태도는 날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 게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