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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6화)
2. 흉내 내기 (2)/

“패싸움에 무전취식 그리고 공갈협박까지… 이틀 사이 다양한 죄목으로 우린 참 자주도 만났었지. 자아, 그래. 이번엔 또 뭐지?”
“이봐, 우린 단지 밥이랑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뿐이었어.”
“하앙, 그래서 식당 주인이 기쁨에 겨워 사람을 보내 신고를 한 건가?”
“엥? 신고라니? 왜? 왜 신고를 했대?”
턱수염 대장은 들고 있던 맥주잔을 소리나게 쾅 내려놓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식당안에 있던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허연 중연인은 한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식당 주인을 불렀고 불려나온 그는 통통한 두손으로 앞치마를 꼭 움켜잡고 바들바들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저기… 그게, 아무래도 무전취식이 될 것 같기에…”
“이봐, 무전취식이라니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야? 우린 오늘 확실한 물주까지 데리고 왔다고!”
“맞아. 같이 들어오는 걸 뻔히 봤으면서 웬 헛소리야?”
“주인장,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우린 너무 슬퍼.”
시커먼 놈들은 일제히 나를 가리키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중년인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돌려졌고 덕분에 난 더더욱 벌겋게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아, 민망해서 죽는줄만 알았다.
“하, 하지만… 음식 값만 자그마치… 팔백골드가 넘는데… 술값까지 합하면 천골드가…”
“헉! 거짓말. 우리가 그렇게 많이 먹었단 말야?”
“믿을 수 없어. 아무리 많이 먹어도 이십여 골드면 충분했는데…”
지나치게 많이 나온 음식값을 가지고 그들은 또 한바탕 난리를 쳤다. 오십여명이 먹은것 치고는 조금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데다가 중년인 이하 허연 기사들도 수긍했다는 표정으로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시커먼 그들만 들고 일어나 일제히 한마디씩을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또 뭐가 문제라는 것인지…
“휴우, 이봐. 여긴 일반 사람들이 이용하는 식당과는 다른 곳이야. 귀족분들이나 이용하는 고급식당이라고.”
“헉…!”
“꿀꺽. 고, 고급 식당?”
소란스럽던 식당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곳이 고급 식당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오십여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라면 진작 눈치를 챘어야 정상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그 물주라는 레이디는 원래 너희들의 일행이 아닌 걸로 아는데? 누가 자세히 설명 좀 해주지 않겠나? 앙?”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눈을 번뜩이는 그 앞에서 턱수염 대장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긴 한숨과 함께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건, 포기했다는 뜻일까?
“…어쩔수가 없구먼. 하아, 물주한테 떠넘기기엔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나와 버렸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 실수한 거야.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거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더 이상 간단한 징계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굶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을 하려고도 해봤지만 그들의 방해 때문에 어떤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주군께서 오실 때까지 우린 수도를 벗어날 수도 없는데… 젠장!”
내내 짖궂은 장난끼를 머금고 있던 대장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억울하고, 분하고, 또 슬프기 까지한 감정. 그것은 분노라는 이름으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 혼자만이 아니라 검은 갑옷을 걸치고 있는 자들 모두가 다 그런 표정이었다. 차마 보고 있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안된 표정을 하고 이를 악문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방해라… 누군가와 문제가 있는 건가? 기사단 자체의 문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보나마나 주군이라는 자들 끼리의 문제가 틀림없는 것 같은데… 아, 가만. 그러고 보니 나 나기를 찾아야 하잖아?’
퍼뜩 떠오른 생각에 나는 그만 술이 다 깨버리고 말았다. 인파 속으로 사라진 녀석을 찾아 나온 일과 빨리 마차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야 떠오르다니… 나, 바보 아냐?
‘큰일났다. 스칼라가 화내면 정말 무서운데…’
화난 스칼라가 나기를 잡아다 얼음 인형으로 만드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아침에만 해도 그녀는 녀석이 내 침대에서 잤다는 이유만으로 잡아먹을 듯 험악하게 굴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아가 녀석 때문에 나를 아주 잃어버릴뻔 했다면 그녀 성격에 맘도 좋게 그냥 살려둘까?
‘제발 죽이지는 말아야 할텐데.’
그녀를 막기 위해선 아무래도 내가 먼저 녀석을 찾아야 했다. 즉, 나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들고있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던 것이다.
내가 일어서자 막 시커먼 기사들을 붙잡을 것처럼 움직이던 허연 기사들이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거 뉘집 자식이야?’라고 묻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후우, 못볼 꼴을 보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먼. 그냥 지나다가 개똥을 밟았다고 생각하세요.”
일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턱수염 대장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가 팍 꺽인 모습이 이상하게도 그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말 뉘집 기사들인지… 보다 못한 나는 뭐라 한마디 해주려다가 허연 기사들 앞에서 더 기가 꺽일까봐 그만 두었다. 대신 식당 주인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먹은 음식값을 모두 적어서 내 집으로 찾아오너라.”
“네? 아, 그럼… 이분들께서 드신 것도 모두…”
“그렇다. 모두 값을 치러 줄테니 내 집으로 찾아오란 말이다. 당장은 가진 돈이 없어 그러니 이해 하거라.”
내 말에 중년 기사는 물론이고 시커먼 기사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려오긴 했지만 정말로 그만한 돈을 치러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눈치가 역력했다.
“저, 저기… 실례지만 댁이 어디신지…”
“아, 그러고 보니 나 집도 모르고… 내 이름을 대도 모르겠구나? …그렇지! 내 아버님께선 오딜란 세이 타마르라는 함자를 쓰신다. 그리고 내 이름은 파비안 카이 타마르다. 이것을 가지고 와서 날 찾으면 돈을 내줄게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제제가 끼워놓은 반지를 뽑아 주인에게 내밀었다.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기… 정말로 그 댁 분이시란 말입니까?”
“그렇다. 그 반지를 가지고 찾아오면 돈을 내줄테니…”
“이봐, 아가씨.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돼지. 그 댁에 따님이 계시단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
허연 중년인이 버럭 소리치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상엔 해도 되는 거짓말과 해서는 안되는 거짓말이 있는데 그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거짓말이야. 지금 한 말을 ‘그들’이 들었다면 아가씨는 물론이고 아가씨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아가씨가 아닌데?”
“뭐?”
“생긴 건 저래도 아가씨가 아니라고. 도련님이야.”
마주 서있던 턱수염 대장이 멍하니 사실을 가르쳐 주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러더니 금새 다시 살아나 외치는 말.
“그, 그래도 말이 안돼. 그 댁에 도련님이 한분 계시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그분은 공부를 하러 멀리 떠나 있다고 알고 있어. 게다가 정말로 그 댁의 도련님이라면 혼자 이런 곳에 나와 저런 불량한 기사들과 어울릴 리도…”
“당연히 없을 겁니다.”
“아?!”
갑작스럽게 들려온 맑은 목소리에 식당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제제가 다소곳이 서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안쪽의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산책이라도 나온 듯 태평하고 한가롭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 그의 등뒤로는 푸른 갑옷을 걸친 킬군의 기사단이 그득하게 서 있었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굳은 얼굴들이라 제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식당안의 분위기는 자연적으로 차갑게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저희 도련님께서 무슨 실례라도…”
“…!”
“…아, 아니. 실례라니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음식값으로 이걸…”
제제의 말에 중년기사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물러섰고 당황한 식당 주인은 내가 준 반지를 들어보이며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마치 뜨거운 감자를 들고 있는 사람처럼 얼굴까지 파랗게 질린 것이 보기가 상당히 안쓰러울 정도였는데 이어진 제제의 말에 그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 헛바람까지 들이켜서 보고 있던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반지는 저희 오왕야께서 직접 준비하신 것으로 웬만한 집 한 채 값은 넘습니다만, 설마 그걸 음식값으로 받으신 것입니까?”
“아, 아닙니다. 어찌 감히… 절대 아닙니다. 그냥 이걸 가지고 찾아오라고만 하셨을 뿐입니다. 네, 그랬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 말과 함께 제제는 태연한 얼굴로 다가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인에게서 반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멍하니 서있는 내 손에다 그것을 도로 끼워주곤 헤죽 웃으면서 말했다.
“헤헤, 한참 찾았어요, 도련님. 그렇게 사라지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나기는 저희가 벌써 찾아놓았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어서 돌아가세요. 마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래? 알았어. 아, 주인에게 음식값 좀 줘. 꽤 많이 나왔거든.”
“네네, 알아서 줄테니까 어서 가세요.”
나는 정말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턱수염 대장을 한번 흘깃 바라봐준 후 그대로 걸음을 옮겨 식당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밖에 모여있던 기사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따르게 되었는데 나는 그들을 싹 무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곁으로 다가서는 제제에게 물었다.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누구의 기사들인지 알아?”
“…궁금하십니까?”
“응, 조금.”
“칠왕야의 기사들입니다. 형편없는 난봉꾼들로 유명하지요. 칠왕야께서도 워낙 엉망이시라 다들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별로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궁금하시면 더 자세히 알아봐 드릴까요?”
“글세… 아니, 그렇게 해줘. 자세히 알아봐. 특히 두목이라고 불리는 자가 누구인지를…”
나는 두목이라고 불리는 자가 실질적으로 그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단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알면 그들의 검은 갑옷과 그림의 의미도 쉽게 알 수 있을테고 그 결과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앞으로의 내 행동도 결정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는 흑사자단의 후예인지도 몰라.’
그런 막연한 기대를 나는 품고 있었다. 배반당하기 쉬운 그 모래성 같은 기대감 하나에도 몹시 설레이는 것이 가슴이 다 아릿할 지경이었다. 이것은 그리움이 만들어낸 공허한 이끌림일까 아니면 집착의 또 다른 형태일까? 스스로 생각해 봐도 바보 같아서 나는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공허함을 떨치려는 듯 약간 큰 목소리로 제제에게 물었다.
“근데 내가 거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우연이었어요. 기사들이 모여 있길래 한번 들어가 본 것뿐이었거든요. 설마 그곳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그랬구나. 아, 참. 나기는 어디 있지?”
“찾아서 방금 전에 마차로 보냈어요.”
“마차? …설마,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닐 테지?”
스칼라가 녀석을 어찌한 것은 아닌지 걱정돼서 물은 말이었는데 그는 전혀 뜻밖의 말을 털어놓았다.
“꽤 다쳤습니다. 아무래도 쫓아갔던 자들에게 몰매를 맞은 것 같아요. 대체 어떤 놈들이 어린 것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뭐어? 몰매를 맞아?”
놀란 나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황급히 마차로 달려갔다. 다행히 마차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춰서 있었는데 급한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서자 냉랭하게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스칼라와 말 그대로 피떡이 되어 누워있는 나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붓고 멍들고 터진 얼굴엔 얼룩덜룩 피가 배어있고 팔은 부러져서 잔뜩 부어오른데다가 양쪽 무릎은 깨져서 피가 흥건한 모습이었다.
“흑… 끄응…”
“파비안, 어떻게 된 거니? 갑자기 사라진 뒤에 돌아오지 않아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스칼라가 벌떡 일어서서 날 붙잡고 물었지만 내 눈엔 신음하고 있는 나기가 먼저 보였다. 그래서 그녀를 외면하고 달려가 나기를 살펴보았는데 제제 말대로 몰매를 맞아도 단단히 맞은 흔적이 역력해서 ‘욱’하고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세상에… 대체 어떤 놈들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지?”
나는 손수건을 꺼내 녀석의 얼굴을 닦아주며 재빨리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부러진 팔과 깨진 무릎에 힐링을 퍼붓고 상처는 깨끗하게 닦은 다음 포션을 발라주거나 소독을 해주었다. 고통이 심했는지 치료가 끝나자마자 녀석은 눈을 뜨고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전의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을텐데… 또다시 새로운 상처로 몸을 축내다니. 녀석이 가엾어서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네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작은 고양이처럼 가는 숨을 내쉬며 잠든 녀석이 오늘따라 더 작아 보여서 나는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링카를 빨리 찾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딜 갔었니? 많이 걱정했는데…”
“…”
“아, 식당에 계셨습니다, 마님. 별일 없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오는 내내 나는 스칼라에게 말은커녕 시선조차 주지않았다. 아파서 신음하고 있는 나기를 그냥 내버려둔 벌이었다. 낯선 타인이라고 해도 무심하지 못했을 상황에서 그녀는 너무 잔인했던 것이다. 역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도련님, 화나셨어요?”
“별로.”
“저런, 많이 화나셨군요?”
저택으로 돌아온 직후, 나는 저녁도 거르고 지하에 있다는 서고로 향했다. 그리고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쌓여있는 수많은 책을 뒤지며 이링카에 대해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하루 이틀에 다 볼 수 있는 분량이 아니어서 한밤중이 될 때까지 십여권을 살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이링카에 대한 단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늦은 밤까지 그렇게 서고에 틀어박혀있자 제제가 찾아와 슬슬 눈치를 살피며 내 기분을 달래려고 들었다. 내가 왜 화났는지도 모르면서…
“왕야께서 문 앞까지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셨는데 모르셨죠?”
“…”
“마님께선 저녁도 거르시고 방에만 계시고… 집사께서 돌아오셨는데 인사도 안 받으실 거예요? 저기, 그만 화 푸세요. 네? 도련니임…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제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요?”
거의 떼를 쓰다시피하던 제제는 결국 나를 서고에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수정 목걸이를 눈앞에 들이대고 주문을 걸 듯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아…’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에 그만 두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하여튼 뉘집 자식인지 어지간히 고집도 세다니까.’
서고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오자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 있었다. 킬군과 웬 낯선 사내 하나가 술병을 들고 방바닥에 길게 누워 사이좋게 술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독한 술냄새가 훅 하고 밀려와 코끝을 자극했다.
“오, 내 아들내미가 왔구나. 어때, 내 말이 맞지?”
“흐흐흐, 통과입니다요.”
단단한 체구의 중년 사내는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칼에 척 봐도 맘이 좋아보이는 푸근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뜻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누구랑 꼭 닮은 모양으로 헤죽 웃어 보였다. 제제가 들어온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내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그는 사내를 발견하자마자 우선 빽 소리부터 쳤다.
“앗, 아부지! 또 술 마셨지?”
“아, 아부지?”
“네. 저 술 취한 영감탱이가 바로 우리 아부지인 동시에 저택의 집사 양반이라구요. 그런 주제에 또 주인님이랑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다니… 정말 못 말리겠다니까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잠시 퉁퉁거리던 그는 성큼 다가가 중년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더니 그의 한쪽 다리를 붙잡고 질질 끌어다 문 앞에 가져다 두었다. 마치 짐짝을 옮기듯이 인정사정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질질 끌려가면서 나를 향해 히죽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는 집사인 이안이라고 한답니다, 도련님. 헤헤, 앞으로 많이 이뻐해 드릴께요. 아잉~ 그렇게 바라보시면 부끄러워요.”
“헉!”
“이 재수없는 영감탱이가 뭐라고 하는 거야? 도련님이 놀라시잖아?”
“웅? 제제, 너 삐졌니? 오, 아빠가 없는 동안 심심했구나? 에구, 귀여운 녀석.”
“으아아아, 하지마. 하지 말라니까아!”
퍽! 털썩…
집사, 이안은 제제를 껴안고 마구 부비거리다가 그에게 결정적인 한방을 얻어맞고 길게 뻗어버렸다. 그리고 곧 그의 손에 질질 끌려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나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찌나 충격적이던지… 한바탕 악몽을 꾼 것마냥 멍한 기분이었다.
“나, 갑자기 이 집에서 살기 싫어졌어.”
백퍼센트 진심어린 말이었다.
“킥, 재미있는 녀석이지? 제법 애교도 부릴 줄 알고.”
“하나도 재미있지 않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죄다 짜증나. 마음에 안 든다고.”
괜한 신경질을 부리며 그를 지나쳐 나는 침대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자 킬군은 술병을 들고 느릿느릿 일어나 걸어오더니 내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가보니 눈에 익은 것이 하나도 없지? …외로웠니? 모든 것이 낯설고 익숙한 얼굴 하나 없어서 많이 외롭든?”
“…”
“그래서 조금 비슷한 녀석들에게 눈길을 주고 함께 어울려 본 거야?”
“아니야. …아냐, 아냐!”
나는 도리질을 치며 그의 말을 부인했다. 사실은 그랬으면서… 물에 붕 뜬 기름마냥 혼자만 따로 도는 것이 못 견디게 외로워서 하루 종일 옛 기억에 더 매달렸으면서.
휑한 가슴으로 돌아와 쓸데없는 일에 집중해 보려고 애쓴 주제에 나는 자꾸 아니라고만 외쳐댔다. 그러다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문득 양아빠가 생각나서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나는 혼자 남겨져 이런 지독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일까? 왜 꿈이 아닌 것일까? 왜…!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 채 공허하게 돌아오는 물음. 그날 밤, 나는 가슴이 온통 미어지는 서러운 울음을 울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바람처럼 살아야 해.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나직한 킬군의 말이 자장가인양 귓가를 맴돌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