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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5화)
2. 흉내 내기 (1)/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어. 어디를 둘러보아도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온통 낯선 이야기뿐이었거든. 근데… 깨닫긴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의심이 드는 거야. 정말로, 정말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인지…>

와글와글와글…
사람들이 넘쳐나는 넓은 대로를 마차는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구경나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호객 행위를 하느라 정신없는 상인들과 묘기를 보여주고 돈을 받는 사람, 부유한 상인과 물건을 짊어지고 어딘가로 바삐 달려가는 사람 등등이 모두 대로로 쏟아져 나와 한데 엉기는 바람에 거리는 꽤 떠들썩하고 상당히 소란스럽게 북적거렸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대부분의 거리가 다 그랬다.
“복잡하고 시끄럽지만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으시지요?”
커튼을 걷고 열심히 밖을 내다보는 내게 제제는 방긋 웃는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응.”
낯선 거리, 낯선 풍경 그리고 어딘가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고 있는데도 너무 멀게 느껴져 한순간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활기차고… 바빠 보여.”
“하하, 역시 축제니까요. 타마르인들은 축제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거든요. 오늘부터 며칠동안은 이 마즈란시 전체가 떠들썩할 겁니다.”
다소곳이 앉아 스칼라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른 그는 곧이어 내게도 찻잔을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각자의 영지에 흩어져 사는 왕야들께서 차례차례 궁전으로 돌아오시는 모습을 보려고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왕야들?”
“네. 모두 황제폐하의 아드님들이신데 오년 전 그분께서 첫째이신 지나인 황태자 전하께 모든 정사를 맡기시고 휴식에 들어가실 때 왕야로 봉해져 궁 밖으로 나오셔야 했지요. 우리 오왕야께서는 그전에 이미 나와 계셨지만요. 다행히 폐하께서 아끼시는 분이라 수도에 그냥 머물러 계실 수 있었지만 원래대로라면 슈엔에 있는 영지로 돌아가셔야 해요.”
“…사실, 그 일을 가지고 흑심이니 뭐니 말하는 인간들도 있다만, 그분께선 정작 아무 생각이 없으시단다.”
내내 아무 말이 없던 스칼라가 찻잔을 내려놓고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 현재의 황태자가 병약하기 때문에 나오는 쓸데없는 의심일 뿐이야. 어리석은 자들이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거지.”
그렇게 말을 맺는 그녀의 얼굴 위로 한순간 시린 빛이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 맘에 안 든다는 뜻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을 예감한 나는 의 문 섞인 눈으로 제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 그 일에 대해 가볍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하기사, 일이 있어봤자 킬군이 감당 못할 일도 아니겠지만.
“걱정 말거라, 아들아. 어느 누구도 감히 우릴 어쩌지는 못할테니까.”
“응. 알아요.”
“그래, 그래야지. 사실 네가 원한다면 그깟 황제자리 얼마든지 빼앗아 주겠다고 말을 하긴 했다만… 설마 그걸 행동으로 옮기기야 하겠니?”
“푸웃! 콜록콜록… 뭐, 뭘 어째요?”
난데없는 그녀의 말에 들이키던 차를 도로 내뿜으며 나는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놈이 진정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아…? 너무 갑작스럽고 진지하게 흘러나온 말이라서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어놓고도 이렇게 태평한 스칼라가 이상하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킬군은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괜찮니? 놀란 거야?”
“농담이죠? 쿨룩,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죠?”
“호호, 그래. 농담이야. 원, 애두.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놀라긴…”
놀라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보고 스칼라는 깔깔 웃어댔다. 그리고 제제는 여전히 방긋 웃는 얼굴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기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다가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정말 농담인가? 쳇, 무슨 놈의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서 사람을 놀래키는 거지? 스칼라도 킬군을 닮아가려나?’
나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는 짐짓 뚱한 얼굴을 해보였다. 속으론 약간의 불신과 작은 불안감을 품은채. 그때였다. 조금 무안해서 거리 구경이나 계속하려고 다시 커튼을 걷기가 무섭게 내게 머리를 맡기고 얌전히 앉아있던 나기가 발작을 하듯 갑자기 벌떡 일어선 것은.
“아! 아아… 큰 도령!”
“에? 나기야?!”
벌컥! 덜컹…
“파비안!”
“도련님!”
녀석은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미친 듯 마차 문을 박차고 쏜살같이 달려나가 버렸다. 그래서 나도 얼떨결에 녀석의 뒤를 따랐는데 거리로 뛰쳐나와 얼마 달리지도 못해서 한떼의 인파에 휩쓸리는 바람에 그만 녀석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지?”
길도 잃었다. 마차가 워낙 요란해서 아무리 사람이 많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길을 잘못 든 건지 길바닥엔 마차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녀석을 놓친 후에 몇 번인가 왁자지껄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다닌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나 보다.
“이제 어떻게 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바닥 한가운데 서서 나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서있을 수만은 없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그게 또 잘못됐는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인적이 뜸한 웬 골목길 같은 곳에 혼자 덜렁 서 있었다. 높은 건물들 사이로 나있는 지저분하고 조금은 음침하기까지 한 그런 골목길 말이다.
“여긴 또 어디람?”
어째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사실이 그런 것일지도… 아무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커녕 어느 쪽으로 나가야 길이 나오는 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그 골목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떡하니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사내들. 생긴 것으로 보나 걷는 폼으로 보나 닳고 닳은 건달이 분명해 보이는 그들은 저희들끼리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나를 발견하고는 수상쩍게 눈을 빛내더니 먹이를 발견한 짐승들처럼 순식간에 다가들었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대사를 나란히 읊어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호오, 이게 웬 떡이야. 꿀꺽.”
“흐흐흐, 눈부시게도 차려입으셨군. 어느 돈 많은 귀족가의 영양이신가 보지?”
“길을 잃었나 본데? 이봐, 아가씨.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 나가는 길을 가르쳐 줄게.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흐으, 보석만 팔아도 집 몇 채는 나오겠구먼.”
아아, 지겹고도 재수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짜증이 나있었던 나는 기분이 상해 그 자리에서 놈들을 반쯤 죽여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길이라도 물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꾹 참고 있는데 놈들은 그것도 모르고 한층 더 과감한 행동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흐흐, 이 오라버니들이 이뻐해주지.”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지저분하기 짝이없는 손으로 내 손목을 덥석 잡아끄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떤 놈은 내 어깨에 팔을 올려놓으려고까지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길이고 뭐고 기분이 상할대로 상해버린 나는 놈들을 그대로 패줘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왼손에 마나를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아,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사실, 우린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거든.”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놈들은 득의만만하게 웃어젖혔다. 아아, 멍청한 놈들. 니들은 눈도 없단 말이냐?
“당장 이 손 치우…”
“멈춰라, 이놈들!”
“엥?!”
세상에 이렇게 기가 막힌 일이…! 잡힌 손을 뿌리친 내가 건달놈들에게 막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악당이 있는 곳엔 항상 정의의 기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결정적인 순간에 예고도 없이 짠하고 나타나 버럭 소리치는 웬 시커먼 인간 하나.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 레이디에게서 떨어져라.”
길다란 검을 마치 짐짝처럼 어깨위에 걸치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사내는… 어딘가 낯익은 무늬가 찍힌, 칠흑같이 시커먼 갑옷을 입고 있었다. 설마…
“…흑사자단?”
두근 두근 두근…
그의 갑옷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내 가슴은 세차게 벌렁거렸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들일지도 모른다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엔 눈물마저 나려고 했다. 그래서 반가운 나머지 눈을 잔뜩 흡뜬 채 다가가려고 들었는데 건달들이 앞을 딱 가로막고 서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흥, 꼴에 정의의 기사 흉내를 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냥 조용히 물러가시지?”
“보아하니,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이건 우리가 먼저 찍었다구.”
찰칵! 앞으로 나선 건달들은 일제히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갑옷을 입은 사내는 새하얀 이빨을 모두 드러내고 씨익 웃더니 삐딱하게 말했다.
“크크큭, 귀여운 놈들이구먼. 가지고 놀기엔 딱 좋겠어.”
그 말과 함께 그는 한쪽 손을 어깨위로 들더니 뒤를 향해 꼭 한번 까딱거렸다. 그리하여 나는 물론이고 건달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의 등뒤로 향하게 되었는데…
“불렀수, 대장?”
“어이, 왜 부르고 그래?”
“우, 뭐 맛난 거라도 발견했어?”
햇빛마저 가릴 듯 시커멓게 나타나는 수십명의 기사들! 회색빛으로 변한 꾀죄죄한 모퉁이 너머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그들을 보고 건달들은 흠칫 놀라 굳어졌다.
“제, 제길 잘못 걸렸다.”
“비겁한 놈들, 숫자로 밀어부치다니…”
자신들보다 몇배는 더 많고 그보다 몇배는 더 사악해 보이는 그들을 감당할 자신이… 당연히 없었던 건달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더니 이내 나를 버려두고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방해없이 그들에게 달려갈 수 있었는데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나는 그만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흑사자단이… 아니야?”
그들의 갑옷위에 그려져 있는건 황금빛 사자가 아니라…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하얀 개 한 마리였던 것이다. 사자가 아닌 개! 그것을 확인하자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 허탈해져서 가볍게 비틀거렸다.
“어라? 이봐, 아가씨. 어디 다쳤어?”
“그게 아니라 겁 먹은 거지. 대장 얼굴이 어디 사람 얼굴이야?”
“뭐? 내 얼굴이 어때서? 이만 하면 봐줄만 하잖아?”
“거울 좀 보고 살아, 대장. 어떨땐 우리도 보고 놀랄 때가 있어.”
자기들끼리 왁자하게 떠들면서 다가온 기사들은 울듯한 얼굴로 멍하니 서있는 나를 빙 둘러싸고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바빴다. 하지만 이미 실망해버린 나는 그 시선을 싹 무시하고 힘없이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그들은 마치 오리새끼들처럼 내 뒤를 우르르 따라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영문을 몰랐던 나는 한참을 가다말고 홱 돌아서서 대장이라고 불리는 우락부락한 턱수염에게 물었다.
“왜 따라오는 거지?”
“아, 그게 말야…”
“그렇게 물어주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이디시여. 안 물으면 어쩌나 했어요. 사실은, 저희가 지금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졌거든요?”
“저기, 부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나란히 멈춰선 그들은, 멀뚱히 바라보며 묻는 내게 일단 그렇게 애원(?)부터 했다. 그러더니 곧이어 합창을 하듯 일제히 외치는 말.
“제발, 우리한테 밥 좀 사주세요!”
“에에?!”
아아, 이 무슨… 총천연의 돌 깨지는 소리란 말이냐.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표면상으로는 연약한 레이디를 구해준 셈이니 대가를 요구한다면 능력이 되는 한 까짓 얼마쯤 못해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건 요구도 아닌 노골적인 구걸이라니! 더더구나 기사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
“그… 콜록콜록… 바, 밥을…”
나는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이들은 뉘집에서 키우는 기사들이란 말인가.
“저기, 너무 어처구니 없는 요구란 건 잘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겁을 먹을 필요는 없어요. 왜냐면 여긴 수도고 두목의 명령도 있어서 우린 최대한 얌전히 굴어야 하거든요.”
“사고치면 죽인댔어요. 그래서 이렇게 얌전하게 부탁을 하는 것이죠.”
“근데,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가까이만 가도 도망가던데 보기보다 담력이 세시네요.”
그들은 애써 웃는 얼굴로 듣기만 해도 한심스러워지는 얘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줄줄 쏟아놓았다. 대체, 난 어쩌자고 이런 인간들을 잠시나마 흑사자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들이었다면, 화려한 오버 액션으로 건달들을 물리친 후 아가씨를 반쯤 협박 또는 반쯤 구슬려서 당당하게 대가를 받아낸 다음 그것으로 밥과 술을 사먹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탕까지 잔뜩 사가지고 돌아왔을 것이었다. 물론 가윈이었다면 아가씨의 부모와 상의해 더 많은 대가를 갈취, 내 새옷과 함께 집안 살림을 몇가지나 늘리고도 남았다. 당연히 정체를 들키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완전범죄를 추구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있는 어둠의 자식들이었으니까.
즉, 그들이었다면 치사스럽고 남사스러운데다 굴욕적이기까지 한 이런 짓은 하늘이 두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할 리가 없었을 거라는 말이다.
‘암, 절대로 할 리가 없지. 그랬다간 가윈의 손에 죽으려고?’
생각이 그에 미치자 나는 갑자기 울컥 화가 났다. 흑사자단과 같은 검은 갑옷을 걸치고 있는 주제에 발끝에도 못미치는 그 나약함으로 감히 나를 실망시키다니…
“왜,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레이디?”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나를 보고 그들은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밥이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하여 더더욱 화가 난 나는 그들이 누구라는 것도 상관없이 골목이 울리도록 버럭 소리쳤다.
“레이디… 좋아하시네! 이 썩은 물고기 눈깔들아, 니들 눈엔 내가 레이디로 보여? 그리고 뭐? 밥을 사달라고? 차라리 당당하게 대가를 달라고 해. 그게 훨씬 더 수입이 좋아.”
“아, 아니. 그게…”
“게다가 갑옷을 걸치고 비굴하게 구걸이라니. 그러고도 니들이 감히 기사라고 할 수 있어? 앙?”
발까지 탕탕 구르며 마구 소리치자 그들은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렸다. 그래서 딴에는 뭔가 느끼는 것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조금 뿌듯해 하는데 잠시 후 대장이라고 불리는 누런 턱수염이 나를 가리키면서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
“레, 레이디가 아니래.”
“진짜? …사기다.”
“배신이지. 첫눈에 반했는데.”
…말짱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단지 약간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뭐, 레이디가 아니래도 상관없어요. 걱정마세요. 지조없게 장화를 거꾸로 신지는 않을께요. 자아, 그럼 이제 밥을 먹으러 갈까요?”
“이봐아… 지금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거야?”
“물론이죠. 레이디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우린 상관없다고 말했고요. 그럼 다 된거죠?”
“그게 아니란 말야. 최소한 기사라면 구걸은…”
“네네… 근데 혹시 양고기 좋아하세요?”
“…아니, 별로…”
“저기, 제가 잘 아는 집이 있는데요…”
그렇게 말을 꺼낸 누런 턱수염은 내 어깨에 팔을 척하니 걸쳐놓고 자기 맘대로 메뉴를 정하더니 나를 끌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등뒤에 시커먼 개떼들을 잔뜩 거느린 채로.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자자, 마셔 마셔.”
“먹고 죽어보자! 여기 맥주 더 가져와.”
“우하하하, 이 얼마만에 보는 음식이란 말이냐.”
“흑, 난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정신을 차려보니 난 어느새 큰 식당을 점거하고 들어앉은 그들 틈에 섞여 열심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딸꾹. 니들은… 아니야아.”
“네네. 자자, 한잔 더 드세요.”
나를 빙 둘러싸고 앉은 그들은 내게 술을 따라주며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가무를 즐기는 자들도 있었고 종종 술에 취해 우는 사람도 보였는데 워낙 소란스럽다 보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안쪽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중간에 한떼의 허연 기사단이 들이닥치지만 않았다면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해가 질때까지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우당탕탕… 콰당!
“모두 조용히 해라!”
쩌렁쩌렁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넓은 식당안을 한바탕 휘저어 놓고 사그라지는 것과 동시에 나타난 한떼의 기사단. 털어도 먼지 한올 나올 것 같지 않은, 하얗고 깨끗한 갑옷을 걸치고 나타난 그들은 문을 박차고 쏟아져 들어와 다짜고짜 우리를 포위하고 섰다. 적게 잡아도 백여명이 넘어보이는 숫자였다. 나는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을 바짝 치켜들고 앉아 죽 늘어서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맨 마지막에 들어온 중년인이 턱수염 대장 앞에 우뚝 멈춰서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가민가 했지만 역시나 그들은 이 시커먼 일당들에게 볼 일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나는 그점이 상당히 궁금했지만 그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우선은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또 너희들인가?”
하얀 기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지겹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