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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측정불가(3)
[속보! 속보입니다! 성내에 갇혀 있던 세레니티 길드원들이 마침내 결계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한동안 별말이 없던 캐스터가 환호하며 말을 쏟아냈다.
[외부 필드의 카메라들은 파손됐지만 성내 중계진의 카메라는 무사합니다. 조만간 원활한 중계 화면을 제공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몇 분 지나지 않아 화면이 돌아왔다.
성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구도.
도그마 차원 레이드에선 어지간하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가 한 게 아니잖아요.”
“조용히 해. ……를 사람들이 알면…….”
“그럼 거짓말을… 거예요?”
치직거리는 노이즈음 너머로 몇몇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레니티 길드원들의 목소리.
언뜻언뜻 일부분만이 들리는지라 전체적인 맥락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만 언성과 어조로 보아 말다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아, 으음. 예, 과연 세레니티 길드입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활로를 찾아냈군요.]
캐스터가 어설픈 칭찬으로 분위기를 돌렸다.
그 사이 길드원들의 목소리는 소거되었다.
‘저들이 한 게 아니야.’
차수린은 그렇게 확신했다.
정황을 보자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백작은 외부 필드에 있었고 세레니티 길드는 성내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보스 몬스터의 특수 결계는 대부분 공격만 냅다 때려 붓는다고 부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계를 이루는 술식의 법칙을 되짚어 나가 해체하듯 파괴하는 것이 정석.
물론 술식 따위를 무시할 만큼의 압도적인 공격력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긴 했다.
‘하지만…….’
저들, 세레니티 길드의 공격대가 그 정도 공격력을 갖춘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파괴력이 있었다면 진작 결계를 부쉈을 테지.
‘변수가 생겼다면 성내가 아닌 바깥!’
그것이 차수린의 추측이었다.
모니터에선 중계 화면이 계속하여 송출되고 있었다.
캐스터가 세레니티 길드 찬양을 이어 갔지만 헛소리에 불과했다.
차수린은 음소거를 하고서 중계 화면을 살폈다.
카메라에 비치는 외부 필드에선 전투가 끝나가는 중.
언뜻언뜻 비치는 세레니티 길드원들의 표정엔 어리둥절함만 가득했다.
* * *
“이제야 통신이 연결됐군요. 나 임철수입니다. 국정원 특수관리부 소속 차장이오.”
[……예, 윤준태라고 합니다. 세레니티 길드 소속이고, 이번 레이드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차원간 통신을 가능케 해주는 특수 장비.
거대한 무전기를 닮은 그것을 쥐고 있는 임철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예,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말씀하십시오.]
“결계. 여러분이 부순 게 아니지요?”
[예?]
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경악스런 감정이 흘러나왔다.
[여러분이 부순 게 아닙니까?]
“우린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ST쪽에서 하도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그, 그랬군요.]
“근데 그쪽 반응을 보니 ST에서 한 일 같지도 않군요. 아니면 하고서 그쪽에 알리지 않았거나.”
[…….]
“어쨌든 잘 알겠습니다. 결계도 부서졌고… 보아하니 뱀파이어 백작도 처치된 모양입니다.”
[뱀파이어 백작도 말입니까? 대체 누가……?]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나머지 헌터들을 잘 수습해서 복귀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통신을 끝낸 임철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딱딱하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진 표정이었다.
단순히 일이 해결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놈들이 물러난 걸까요, 선배?”
오퍼레이터의 질문에 임철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놈들이 언제부터 그리 너그러웠다고?”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요. 갑자기 뱀파이어 백작이 사라지고 결계가 깨졌다는 게.”
“세상엔 원래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넘쳐나는 법이잖아.”
“선배는 그런 말 안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요.”
임철수는 상의 포켓에 손을 가져갔다가 멈칫했다.
긴장한 동안 손으로 쥐어 부러트린 담배들이 한 가득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지.”
임철수는 피식 웃었다.
“나 같은 놈도 담배를 끊을 수 있는 법이고.”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
* * *
윤준태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
되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사람들의 배신감과 증오, 심지어 살기마저 느껴지는 시선에 윤준태와 세레니티 길드원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한국 정점의 길드 중 하나인 세레니티 길드.
그 앞에서 대놓고 역정을 낼 헌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허허 웃어넘길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도그마 차원의 전투가 끝난 직후였다.
생존한 헌터들이 한 곳에 모였고, 세레니티 길드원들도 그곳으로 향했다.
생존자는 원래 투입된 인원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중간에 뱀파이어 백작이 소멸한 덕분.
그게 세레니티 때문은 아니라는 게 자명한 이상, 헌터들이 기꺼워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우리 모두 덕분에 죽을 뻔했소.”
나이 많은 헌터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당신네가 저 안에서 탱자탱자 노는 동안 말이오.”
“대체 누가 놀았다는 거야? 엉?”
2m 남짓한 장한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세레니티 길드의 탱커 중 하나.
다른 길드원들이 그를 말렸다.
형식적인 만류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 사실이 헌터들의 분노를 한층 부채질했다.
사실상 윤준태를 제외하면 아무도 미안해하지도, 책임지려 하지도 않는다는 게.
“당신네 목표는 백작을 잡는 거 아니었소? 우리를 놈 앞에 대령하는 게 아니라?”
“아, 그러니까 우리도 예상 못했다고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꿈에도 몰랐는데 뭐 어떡하란 말이에요?”
세레니티의 여자 힐러가 비뚤어진 태도로 쏘아붙이자 헌터들이 언성을 높였다.
“뭣이 어째?”
“사람을 죽어가게 내버려두고선 한다는 소리가!”
“랭크 높으면 다야? 너희한텐 도의도 없어?”
도떼기시장처럼 아수라장이 된 분위기.
윤준태가 양측을 중재하려 했으나 헌터들도 세레니티 길드도 들어먹질 않았다.
“엉망진창이군.”
그 상황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심혁진은 혀를 찼다.
지휘관이라는 애송이가 애처로워 보이긴 했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란 생각도 들었다.
지휘관 완장까지 찼으면 좀 더 강압적인 방식을 써서라도 여론과 분위기를 휘어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집단이 약해지니까.
저 얼굴 반반하게 생긴 애송이는 그럴 재목이 되지 못했다.
좋은 파티원일 순 있어도 좋은 파티장은 되기 힘든 타입이랄까.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심혁진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로선 얼른 차원 포탈이나 열리길 바랄 따름이었다.
“아, 그래. 전리품.”
뒤늦게 생각이 난 심혁진이 넌지시 말했다.
“미네르바, 전리품 목록.”
[레이드 보스, 뱀파이어 백작의 전리품을 확인합니다.]
스르륵.
심혁진의 눈앞으로 상태창이 떠올랐다.
뱀피릭 소드(Vampiric Sword)
====================
A랭크 롱소드
장착 효과: 20Lv 뱀피릭 오라, 30Lv 소드 마스터리, 15Lv 방어 관통
발동 효과: 체력 회복 속도와 방어도에 40% 보너스가 붙습니다.
====================
“괜찮은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스탯.
쓰기에 따라선 표기된 랭크인 A보다도 유용할 수 있어 보였다.
방어 관통은 딜러에게 좋고 방어도 보너스는 탱커에게 좋으니, 누가 써도 제값을 할 만한 물건이었다.
“다른 건?”
====================
[다음과 같습니다.]
뱀파이어 귀족의 브로치
불타 버린 십자가
혈마법의 인장
====================
합성 재료나 수집품의 가치를 지닌 물건들.
뱀피릭 소드만큼은 아니어도 내다 팔면 제법 짭짤할 터였다.
심혁진 입장에서야 그리 당기는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자니 포탈이 개방되는 것이 느껴졌다.
심혁진은 재차 투명화를 펼치고는 몸을 날려 헌터들 사이에 뒤섞였다.
* * *
도그마 차원의 전투는 며칠 동안 언론과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예기치 못한 사태, 정부의 대응은?]
[도그마 레이드에 투입된 헌터들, ST 그룹을 상대로 집단 소송에 나서.]
[침묵 중인 세레니티 길드, 과연 책임을 질 것인가?]
[해당 레이드의 지휘관인 윤준태는 누구?]
당연하게도 심혁진의 이름은 언론과 인터넷 어디에도 없었다.
그 사실에 심혁진은 만족했다.
“귀찮은 일하고는 상종을 않는 게 최고지.”
CS 매니지먼트의 사무실.
에어컨까지 빵빵하게 틀어놓고서 심혁진은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잠시 후, 출근한 차수린은 그 모습을 보고는 얼어붙었다.
“……뭐하는 거예요, 지금?”
“소파에 드러누워 있습니다만.”
“그건 나도 알아요. 무슨 생각으로 그러느냐는 거죠.”
“당분간 할 일도 없는데 좀 쉰다고 문제될 건 없잖습니까.”
말 자체야 틀릴 게 없었다.
그저 얄미워 보여서 문제지.
나직이 한숨을 쉰 차수린이 의자를 끌고 와 심혁진 앞에 앉았다.
“나, 바보 아니에요.”
“그랬습니까? 이렇게 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군요.”
“말 돌릴 생각 말아요. 위장하려는 거 티 나니까.”
차수린은 팔짱을 꼈다.
“혁진 씨죠?”
“예, 내 이름 심혁진 맞습니다.”
“그거 말고요. 도그마 차원에서 희수를 구해주고 뱀파이어 백작을 해치운 거, 혁진 씨 맞죠?”
“예.”
의외로 선선한 대답에 차수린은 조금 놀랐다.
이어지는 말엔 맥이 풀렸지만.
“이렇게 대답하면 나한테 콩고물 좀 떨어지는 겁니까?”
“장난 식으로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나도 며칠 동안 끙끙 앓고서 결론을 내린 거니까.”
“연희수한테서는 무슨 얘길 들었습니까?”
“아무 것도요. 희수에게 묻지도 않았고 그 애 또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럼 뭘 보고 결론을 내린 겁니까?”
“나름대로의 심증들.”
그렇게 대답하는 차수린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러니 진심으로 대답해줘요. 혁진 씨가 희수와 사람들을 구한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심혁진도 장난기를 지웠다.
“수린 씨는 어떻게 할 겁니까?”
“우선은… 혁진 씨부터 스카우트하려고 하겠죠.”
“난 이미 수린 씨네 직원인데요.”
“직원이 아니라 헌터로서요.”
심혁진은 냉소를 머금었다.
“난 더 이상 헌터가 아니고, 앞으로도 아닐 겁니다.”
“하지만 도그마 차원에서 혁진 씨가 한 일은…….”
“우리 헌터를 케어한 거죠. 매니저로서.”
“그거, 말장난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않는데요.”
“저기요, 혁진 씨.”
“지옥에서 돌아온 직후에.”
심혁진의 어조가 착 가라앉았다.
“한 가지 다짐한 게 있습니다.”
“…….”
“내가 내키는 대로 하면서 살겠다. 어느 누구도 내 행동과 의사를 좌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는 헌터 노릇을 하지 않겠다.”
“혁진 씨…….”
“예. 수린 씨의 말대로 말장난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저 고집에 불과한지도 모르죠. 근데 싫은 건 싫은 겁니다. 난 헌터가 싫습니다. 특히나 현시대의 헌터라면 더더욱.”
차수린은 심혁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 겪은 그의 반응으로 추측건대, 심혁진은 현재의 헌터 시장에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헌터를 권유한다는 건 못할 짓이었다.
하물며 벌써 몇 번이나 그의 도움을 받은 입장이라면 더더욱.
“알겠어요. 어쨌거나, 조금 전의 얘기와는 별개로…….”
차수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희수와 사람들을 구해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속보! 속보입니다! 성내에 갇혀 있던 세레니티 길드원들이 마침내 결계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한동안 별말이 없던 캐스터가 환호하며 말을 쏟아냈다.
[외부 필드의 카메라들은 파손됐지만 성내 중계진의 카메라는 무사합니다. 조만간 원활한 중계 화면을 제공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몇 분 지나지 않아 화면이 돌아왔다.
성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구도.
도그마 차원 레이드에선 어지간하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가 한 게 아니잖아요.”
“조용히 해. ……를 사람들이 알면…….”
“그럼 거짓말을… 거예요?”
치직거리는 노이즈음 너머로 몇몇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레니티 길드원들의 목소리.
언뜻언뜻 일부분만이 들리는지라 전체적인 맥락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만 언성과 어조로 보아 말다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아, 으음. 예, 과연 세레니티 길드입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활로를 찾아냈군요.]
캐스터가 어설픈 칭찬으로 분위기를 돌렸다.
그 사이 길드원들의 목소리는 소거되었다.
‘저들이 한 게 아니야.’
차수린은 그렇게 확신했다.
정황을 보자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백작은 외부 필드에 있었고 세레니티 길드는 성내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보스 몬스터의 특수 결계는 대부분 공격만 냅다 때려 붓는다고 부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계를 이루는 술식의 법칙을 되짚어 나가 해체하듯 파괴하는 것이 정석.
물론 술식 따위를 무시할 만큼의 압도적인 공격력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긴 했다.
‘하지만…….’
저들, 세레니티 길드의 공격대가 그 정도 공격력을 갖춘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파괴력이 있었다면 진작 결계를 부쉈을 테지.
‘변수가 생겼다면 성내가 아닌 바깥!’
그것이 차수린의 추측이었다.
모니터에선 중계 화면이 계속하여 송출되고 있었다.
캐스터가 세레니티 길드 찬양을 이어 갔지만 헛소리에 불과했다.
차수린은 음소거를 하고서 중계 화면을 살폈다.
카메라에 비치는 외부 필드에선 전투가 끝나가는 중.
언뜻언뜻 비치는 세레니티 길드원들의 표정엔 어리둥절함만 가득했다.
* * *
“이제야 통신이 연결됐군요. 나 임철수입니다. 국정원 특수관리부 소속 차장이오.”
[……예, 윤준태라고 합니다. 세레니티 길드 소속이고, 이번 레이드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차원간 통신을 가능케 해주는 특수 장비.
거대한 무전기를 닮은 그것을 쥐고 있는 임철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예,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말씀하십시오.]
“결계. 여러분이 부순 게 아니지요?”
[예?]
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경악스런 감정이 흘러나왔다.
[여러분이 부순 게 아닙니까?]
“우린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ST쪽에서 하도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그, 그랬군요.]
“근데 그쪽 반응을 보니 ST에서 한 일 같지도 않군요. 아니면 하고서 그쪽에 알리지 않았거나.”
[…….]
“어쨌든 잘 알겠습니다. 결계도 부서졌고… 보아하니 뱀파이어 백작도 처치된 모양입니다.”
[뱀파이어 백작도 말입니까? 대체 누가……?]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나머지 헌터들을 잘 수습해서 복귀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통신을 끝낸 임철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딱딱하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진 표정이었다.
단순히 일이 해결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놈들이 물러난 걸까요, 선배?”
오퍼레이터의 질문에 임철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놈들이 언제부터 그리 너그러웠다고?”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요. 갑자기 뱀파이어 백작이 사라지고 결계가 깨졌다는 게.”
“세상엔 원래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넘쳐나는 법이잖아.”
“선배는 그런 말 안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요.”
임철수는 상의 포켓에 손을 가져갔다가 멈칫했다.
긴장한 동안 손으로 쥐어 부러트린 담배들이 한 가득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지.”
임철수는 피식 웃었다.
“나 같은 놈도 담배를 끊을 수 있는 법이고.”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
* * *
윤준태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
되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사람들의 배신감과 증오, 심지어 살기마저 느껴지는 시선에 윤준태와 세레니티 길드원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한국 정점의 길드 중 하나인 세레니티 길드.
그 앞에서 대놓고 역정을 낼 헌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허허 웃어넘길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도그마 차원의 전투가 끝난 직후였다.
생존한 헌터들이 한 곳에 모였고, 세레니티 길드원들도 그곳으로 향했다.
생존자는 원래 투입된 인원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중간에 뱀파이어 백작이 소멸한 덕분.
그게 세레니티 때문은 아니라는 게 자명한 이상, 헌터들이 기꺼워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우리 모두 덕분에 죽을 뻔했소.”
나이 많은 헌터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당신네가 저 안에서 탱자탱자 노는 동안 말이오.”
“대체 누가 놀았다는 거야? 엉?”
2m 남짓한 장한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세레니티 길드의 탱커 중 하나.
다른 길드원들이 그를 말렸다.
형식적인 만류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 사실이 헌터들의 분노를 한층 부채질했다.
사실상 윤준태를 제외하면 아무도 미안해하지도, 책임지려 하지도 않는다는 게.
“당신네 목표는 백작을 잡는 거 아니었소? 우리를 놈 앞에 대령하는 게 아니라?”
“아, 그러니까 우리도 예상 못했다고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꿈에도 몰랐는데 뭐 어떡하란 말이에요?”
세레니티의 여자 힐러가 비뚤어진 태도로 쏘아붙이자 헌터들이 언성을 높였다.
“뭣이 어째?”
“사람을 죽어가게 내버려두고선 한다는 소리가!”
“랭크 높으면 다야? 너희한텐 도의도 없어?”
도떼기시장처럼 아수라장이 된 분위기.
윤준태가 양측을 중재하려 했으나 헌터들도 세레니티 길드도 들어먹질 않았다.
“엉망진창이군.”
그 상황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심혁진은 혀를 찼다.
지휘관이라는 애송이가 애처로워 보이긴 했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란 생각도 들었다.
지휘관 완장까지 찼으면 좀 더 강압적인 방식을 써서라도 여론과 분위기를 휘어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집단이 약해지니까.
저 얼굴 반반하게 생긴 애송이는 그럴 재목이 되지 못했다.
좋은 파티원일 순 있어도 좋은 파티장은 되기 힘든 타입이랄까.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심혁진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로선 얼른 차원 포탈이나 열리길 바랄 따름이었다.
“아, 그래. 전리품.”
뒤늦게 생각이 난 심혁진이 넌지시 말했다.
“미네르바, 전리품 목록.”
[레이드 보스, 뱀파이어 백작의 전리품을 확인합니다.]
스르륵.
심혁진의 눈앞으로 상태창이 떠올랐다.
뱀피릭 소드(Vampiric Sword)
====================
A랭크 롱소드
장착 효과: 20Lv 뱀피릭 오라, 30Lv 소드 마스터리, 15Lv 방어 관통
발동 효과: 체력 회복 속도와 방어도에 40% 보너스가 붙습니다.
====================
“괜찮은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스탯.
쓰기에 따라선 표기된 랭크인 A보다도 유용할 수 있어 보였다.
방어 관통은 딜러에게 좋고 방어도 보너스는 탱커에게 좋으니, 누가 써도 제값을 할 만한 물건이었다.
“다른 건?”
====================
[다음과 같습니다.]
뱀파이어 귀족의 브로치
불타 버린 십자가
혈마법의 인장
====================
합성 재료나 수집품의 가치를 지닌 물건들.
뱀피릭 소드만큼은 아니어도 내다 팔면 제법 짭짤할 터였다.
심혁진 입장에서야 그리 당기는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자니 포탈이 개방되는 것이 느껴졌다.
심혁진은 재차 투명화를 펼치고는 몸을 날려 헌터들 사이에 뒤섞였다.
* * *
도그마 차원의 전투는 며칠 동안 언론과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예기치 못한 사태, 정부의 대응은?]
[도그마 레이드에 투입된 헌터들, ST 그룹을 상대로 집단 소송에 나서.]
[침묵 중인 세레니티 길드, 과연 책임을 질 것인가?]
[해당 레이드의 지휘관인 윤준태는 누구?]
당연하게도 심혁진의 이름은 언론과 인터넷 어디에도 없었다.
그 사실에 심혁진은 만족했다.
“귀찮은 일하고는 상종을 않는 게 최고지.”
CS 매니지먼트의 사무실.
에어컨까지 빵빵하게 틀어놓고서 심혁진은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잠시 후, 출근한 차수린은 그 모습을 보고는 얼어붙었다.
“……뭐하는 거예요, 지금?”
“소파에 드러누워 있습니다만.”
“그건 나도 알아요. 무슨 생각으로 그러느냐는 거죠.”
“당분간 할 일도 없는데 좀 쉰다고 문제될 건 없잖습니까.”
말 자체야 틀릴 게 없었다.
그저 얄미워 보여서 문제지.
나직이 한숨을 쉰 차수린이 의자를 끌고 와 심혁진 앞에 앉았다.
“나, 바보 아니에요.”
“그랬습니까? 이렇게 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군요.”
“말 돌릴 생각 말아요. 위장하려는 거 티 나니까.”
차수린은 팔짱을 꼈다.
“혁진 씨죠?”
“예, 내 이름 심혁진 맞습니다.”
“그거 말고요. 도그마 차원에서 희수를 구해주고 뱀파이어 백작을 해치운 거, 혁진 씨 맞죠?”
“예.”
의외로 선선한 대답에 차수린은 조금 놀랐다.
이어지는 말엔 맥이 풀렸지만.
“이렇게 대답하면 나한테 콩고물 좀 떨어지는 겁니까?”
“장난 식으로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나도 며칠 동안 끙끙 앓고서 결론을 내린 거니까.”
“연희수한테서는 무슨 얘길 들었습니까?”
“아무 것도요. 희수에게 묻지도 않았고 그 애 또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럼 뭘 보고 결론을 내린 겁니까?”
“나름대로의 심증들.”
그렇게 대답하는 차수린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러니 진심으로 대답해줘요. 혁진 씨가 희수와 사람들을 구한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심혁진도 장난기를 지웠다.
“수린 씨는 어떻게 할 겁니까?”
“우선은… 혁진 씨부터 스카우트하려고 하겠죠.”
“난 이미 수린 씨네 직원인데요.”
“직원이 아니라 헌터로서요.”
심혁진은 냉소를 머금었다.
“난 더 이상 헌터가 아니고, 앞으로도 아닐 겁니다.”
“하지만 도그마 차원에서 혁진 씨가 한 일은…….”
“우리 헌터를 케어한 거죠. 매니저로서.”
“그거, 말장난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않는데요.”
“저기요, 혁진 씨.”
“지옥에서 돌아온 직후에.”
심혁진의 어조가 착 가라앉았다.
“한 가지 다짐한 게 있습니다.”
“…….”
“내가 내키는 대로 하면서 살겠다. 어느 누구도 내 행동과 의사를 좌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는 헌터 노릇을 하지 않겠다.”
“혁진 씨…….”
“예. 수린 씨의 말대로 말장난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저 고집에 불과한지도 모르죠. 근데 싫은 건 싫은 겁니다. 난 헌터가 싫습니다. 특히나 현시대의 헌터라면 더더욱.”
차수린은 심혁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 겪은 그의 반응으로 추측건대, 심혁진은 현재의 헌터 시장에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헌터를 권유한다는 건 못할 짓이었다.
하물며 벌써 몇 번이나 그의 도움을 받은 입장이라면 더더욱.
“알겠어요. 어쨌거나, 조금 전의 얘기와는 별개로…….”
차수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희수와 사람들을 구해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