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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측정불가(2)



다중차원의 세계는 광활하다.
몇 개의 차원이 있는지도 헤아리지 못하는데 몇 개의 생명이 존재할지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드넓은 공간 속에서, 어떠한 현상이 자신 때문이라 일컫는 것은 오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염마신왕 아포칼립시온을 해치우고 돌아오자마자 명운의 족쇄가 깨졌다.
그런 이상,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다 토해내.”
심혁진은 뱀파이어 백작을 향해 말했다.
“그 일과 관련해서 네가 아는 것은 모조리.”
“나, 나도 잘은 모른다. 그저 로드께서 그리 말씀하셨을 뿐이다.”
“뱀파이어 로드가 그리 말했다고?”
“그래.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왈라키아와 그 주변 세계를 둘러싼 명운의 저울이 크게 요동쳤다고. 조만간 거대한 격변이 벌어질 것이라고.”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건데?”
“모른다. 그저 그분께서 그리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래?”
심혁진은 잠시 고민했다.
좀 더 고문하여 정보를 뜯어낼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일개 백작 따위가 무엇을 더 알까 싶었다.
‘고작 A랭크일 뿐인데.’
게다가 시간을 끄는 동안 아래쪽 상황도 악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혹시 몰라 연희수 쪽 필드를 싹 쓸어놓긴 했는데…….’
몬스터야 다시 들어찰 수 있는 것.
게다가 언제나 만약의 경우란 게 존재하는 법이었다.
“좋아. 얘기해 줘서 고맙군. 별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심혁진은 오른손에 기운을 모았다.
“그래도 경험치랑 잡템은 도움이 좀 되겠지.”
“크윽!”
사태를 파악한 뱀파이어 백작이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광폭화 스킬인 ‘광상곡(Capriccio)’을 펼치려는 것.
그러나 심혁진이 더 빠르고 강맹했다.
꽈릉!
거대한 뇌성과 함께 사이킥 라이트닝이 작렬했다.
삽시간에 탄화된 뱀파이어 백작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A랭크 보스 몬스터, 뱀파이어 백작 ‘알피림’을 처치했습니다. 다음의 전리품을 획득했습니다.]

상태창이 뜨긴 했지만 심혁진은 곁눈질도 안 하고 치워 뒀다.
아이템이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것.
지금은 주변을 둘러싼 결계에 신경을 쓸 때였다.

* * *

오석호는 대한민국의 헌터다.
태성 매니지먼트 소속인 그의 랭크는 BB.
도그마 차원 레이드의 외부 필드에 배치된 것치고는 랭크가 높은 편이었다.
대부분이 C 언저리에, 좀 튀어 봤자 B랭크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살아남은 것은 랭크 때문이 아니었다.
‘씨발.’
조상현의 마지막 모습이 오석호의 눈가에 아른거렸다.
그는 오석호의 파티원이자 길드원, 즉 똑같은 태성 매니지먼트 소속 헌터였다.
전사인 그가 지켜야 할 도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제법 친분이 있는 동생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조상현은 기습해 온 뱀파이어에게 오석호 대신 물려 죽었다.
눈물겨운 희생 같은 건 아니었다.
당황한 오석호가 목덜미를 붙잡고 내던진 것이었으니까.
예기치 못한 배신에 조상현은 욕설을 토했다.
그게 개새끼였는지 씨발놈이었는지 오석호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하기도 싫었고.
‘망할, 망할, 망할, 망할!’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
패닉 상태에 빠진 그로선 모든 게 두렵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오석호는 정처 없이 내달렸다.
근처에서 사투 중인 헌터들의 도와달라는 외침도, 조금만 더 힘을 내자는 격려의 포효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 악몽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철퍼덕!
무언가에 채여 넘어진 오석호가 흙바닥을 뒹굴었다.
이윽고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으아아악!”
“괜찮아요! 같은 편이에요. 진정하세요.”
“아으아악!”
오석호는 광란하듯 몸부림쳤다.
그 반응에 살짝 물러난 상대가 돌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랫소리에 오석호의 몸이 진정되었다.
그게 바드의 스킬인 ‘진정의 멜로디’라는 것은 잠시 후에야 떠올릴 수 있었다.
“어, 으으……?”
“좀 진정되세요? 아직 수련 단계의 스킬이라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다행히도 먹혀든 모양이네요.”
“으으…….”
“우리 조금만 더 힘내도록 해요. 반드시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거예요.”
“…….”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린 오석호가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성 헌터였다.
저런 여자애한테 도움이나 받았다는 자괴감이 고개를 들려던 찰나.
그보다도 큰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저년!’
오석호는 눈을 부릅떴다.
김태성에게서 받은 개인적인 의뢰, 그 목표.
CS 매니지먼트의 헌터인 연희수가 분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펼친 진정의 멜로디 덕분에 오석호는 냉정을 되찾았다.
상황 판단력과 계산력 역시.
‘이쪽을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교적 근처에 있던 이들은 한창 전투 중.
이 근방으로 다가오는 몬스터 역시 거의 없었다.
기습하기에는 최적의 상황.
게다가 연희수 역시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기야 조금 전까지도 오줌을 지릴 기세로 달아나던 겁쟁이가, 자신을 해치려는 청부자일 거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으랴.
얼굴도 눈물과 땀범벅이라 알아보지 못한 모양.
아예 떠 먹으라고 상을 차려 놓은 모양새.
오석호로선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스륵.
그는 보조 무기인 시미터를 허리춤에서 뽑았다.
‘고맙다.’
오석호가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정신을 차리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짭짤한 의뢰비까지 수금하게 해 줘서!
“하압!”
오석호가 기합성을 토하며 쇄도했다.
연희수에게 들릴 테지만 상관없었다.
BB랭크 전사인 그의 돌진을 CC랭크의 바드가 받아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를 멈추게 한 것은 연희수가 아니었으니까.
하늘에서 내리꽂힌 뇌격이었지.
꽈릉!
“꺄악!”
연희수가 비명을 토하며 널브러졌다.
하지만 딱히 다치거나 데미지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심혁진이 세심하게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었다.
“아……!”
연희수는 뇌전이 내리꽂힌 곳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그녀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분명히 눈앞에서…….
“그 사람을 죽인 거예요?”
“응.”
심혁진은 담담히 말했다.
“심각하게 멍청하거나 순진한 게 아니라면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겠지?”
연희수는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조금 전 그 사내가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는 걸 그녀도 인지한 바.
다만 자연스레 죽이는 것까진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사람이었어요. 어쩌면 그 때문에 저를 공격한 걸지도 몰라요.”
“전혀. 놈의 공황은 네 스킬에 의해 진정됐어. 그러고도 너를 공격하려 한 이유는 하나뿐이지.”
“그 이유가 뭔데요?”
“의뢰를 받았으니까.”
연희수의 동공이 확장됐다.
“그렇다면 방금 그 사람이……?”
“태성에서 파견된 헌터야. 아마도 김태성의 사주를 받았을.”
연희수는 살짝 벌어진 입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그저 검은 연기만이 흩날릴 뿐.
시체 조각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가, 감사해요.”
연희수가 말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살려준 은인에 대한 당연한 반응.
살인에 대한 희미한 거부감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부지의 생각에 불과했다.
언제나 죽음과 인접해 있는 것이 헌터의 삶.
그리고 그 죽음은 마수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도 기인할 수 있었다.
연희수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심혁진을 나무랄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한바탕 악몽이 아닌 이상은, 그는 그녀의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헌터였으니까.
“저…….”
“일단 몇 가지만 말해 두지.”
심혁진이 선수를 쳤다.
“하나, 내 얘기 떠벌리고 다니지 마.”
“아…….”
“둘, 내 얘기 떠벌리고 다니지 마.”
“네.”
풀 죽은 태도로 대답한 연희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걸 보니 세 번째는 없나 보네요?”
“셋.”
심혁진은 피식 웃었다.
“살아남고 싶다면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의심해. 널 도와주려는 사람은 물론이고 네가 도와주려는 사람도 말이야.”
“네…….”
“머릿속에 잘 새겨뒀으면 따라와.”
“어딜 가시려는 건데요?”
“저 성.”
심혁진이 블러드 캐슬을 가리켰다.
붉은빛이 감도는 성의 외벽엔 여전히 반투명한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혁진 오빠가 뱀파이어 백작을 해치우셨는데도 결계가 남아 있네요?”
“오빠?”
“네, 혁진 오빠요.”
연희수가 수줍게 웃었다.
“매니저님은 너무 딱딱하잖아요.”
“언제는 아저씨라더니.”
“제가 원래 초면엔 수줍음을 잘 타요.”
“전혀 수줍어 보이지 않던데?”
“그냥 수줍어 보였다고 해주시면 안 돼요?”
심혁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벌써부터 끼 부리냐?”
“그, 그런 게 아니라요. 어찌 됐든 생명의 은인이신데 좋게 대하고 싶어서 그런 거죠.”
“그냥 평소처럼 해. 넉살 좋은 게 나쁠 건 없는데 너무 계산적으로 보인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연희수.
말투나 태도로 보건대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그만큼 심혁진을 신뢰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고.
심혁진은 앞서 날아가 성문 앞에 도달했다.
결계를 살펴보니 방어도가 상당한 듯했다.
‘술식의 구조는……?’
마법적인 힘으로 구축된 결계는 특정한 법칙에 따라 마나가 흐르게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법칙을 술식이라 하는데, 그 구조를 간파하면 보다 적은 힘으로 결계를 분쇄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심연급 차원인 아케론은 그러한 결계가 가득했던 곳.
마족들은 별별 방식으로 결계와 함정을 파두었었다.
덕분에 심혁진 일행은 결계와 함정의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 모든 게 살기 위한 투쟁의 결과.
얄궂게도 당시의 기억 덕분에, 심혁진은 비교적 간단히 결계의 술식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저기군.”
심혁진이 고개를 들었다.
도그마 차원의 상공.
육안으론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필드를 감싸는 반구형의 막이 존재했다.
그 천장의 한 지점에서 희미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양이 적어 희미한 게 아니라 감춰져 있어 희미한 것.
그 위장을 한 꺼풀 벗겨내면 막대한 에너지의 기류가 존재할 터였다.
“헉헉. 뭐, 뭐라도 좀 알아내셨어요?”
헐레벌떡 뒤쫓아 온 연희수가 무릎을 짚고서 헐떡거렸다.
심혁진은 그녀를 힐끔 보고 말했다.
“성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물러나 있으라고. 아니지. 결계를 부수면 안쪽에서 사람이 몰려나오겠지? 그러니 아예 멀리 나가 있도록 해.”
“네에?”
“보이지 않는 데 있어야 괜한 의심을 사지 않을 것 아냐.”
연희수는 바깥 방향을 돌아봤다.
뱀파이어 백작이 죽음으로써 헌터들이 조금씩이나마 전투의 승기를 잡아 가고 있었다.
“아, 알겠어요. 그럼 가서 사람들을 도울게요.”
“그래. 무리하지는 말고.”
“그럴게요. 그래도 위험해지면 구해 주실 거죠?”
“하는 거 봐서.”
“안 오시면 오빠 이름을 크게 부를 거예요. 사람들 다 듣게.”
“그런 말이 나한테 통할 것 같냐?”
“……아뇨.”
피식 웃은 심혁진이 말했다.
“걱정 말고 가도록 해.”
“네. ……정말로 감사해요. 두 번이나 구해 주셔서.”
고개를 꾸벅 숙인 연희수가 외부 필드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