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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측정불가(1)
제5장 측정불가
“아……!”
연희수는 멍한 정신 상태로 눈만 깜빡였다.
하급 뱀파이어였다.
아니, 하급 뱀파이어였던 시체였다.
아니, 이제는 그저 불티가 되어 흩날리는 재에 불과했다.
언데드(Undead) 계열 몬스터에 신성 타격을 주어 처치했을 때의 반응.
재가 되어 흩날리는 뱀파이어의 시체를 흩어내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를 본 연희수는 왈칵 눈물이 났다.
“매니저님……!”
“응.”
심혁진은 가볍게 손을 털었다.
연희수는 그제야 심혁진이 어떻게 뱀파이어를 처치했는지 떠올렸다.
패닉 상태에서도 보기는 봤던 것이다.
‘손날로 쳐서 반으로……!’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부 가르듯 쪼개 버렸다.
아무리 하급이라지만 뱀파이어 자체가 물살은 아닌데, 무기 하나 없이 갈라 버린 것이다.
처치 후의 반응으로 봐선 신성 스킬을 사용한 모양.
하지만 연희수는 당수처럼 내리찍는 신성 스킬에 대해서는 듣도 보도 못했다.
수많은 궁금증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이것이었다.
“대, 대체 어떻게 여기 계신 거예요?”
“몰래 따라왔지.”
“예?”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 하여간 이쪽은 대강 쓸어줄 테니 괜히 벗어나지 말고 가만히 틀어박혀 있어.”
“네?”
“웬만하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할 말만 짤막히 끝낸 심혁진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고도의 스피드로 인한 잔상.
이윽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거대한 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푸화아악!
탱커 한 명에게 우르르 몰려들던 좀비 떼가 단번에 도륙당해선 흩뿌려졌다.
수백, 수천 개의 조각이 튀어 오르는 모습은 전율 그 자체.
도움을 받은 탱커는 물론이고 멀찍이서 지켜보던 연희수조차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빛이 번쩍이고 좀비들이 찢겨 나갔을 뿐.
그래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심혁진의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 * *
‘흐흠.’
심혁진은 허공을 박차며 상공으로 치솟았다.
사이커(Psycher) 클래스의 이동 스킬 중 하나인 윈드 워크(Wind walk).
원래는 짧은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는 회피용 스킬이었으나, 스킬 레벨이 80을 넘기니 100m가량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상공으로 오르니 시야가 탁 트였다.
심혁진은 잠시 그곳에 부유하며 주변을 살폈다.
‘백작 놈은 보이는데.’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심혁진.
‘대장 놈이 코빼기도 안 비친단 말이지.’
도그마 차원에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차수린의 말이나 사람들이 멋대로 떠드는 것과는 달리, 이번 전투가 단순한 사냥 따위가 아니란 것을.
뱀파이어들은 멍청히 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전술을 수립하고 침입자를 대비한 갖가지 준비를 마친 뒤였다.
반면 세레니티 길드와 헌터들은 기고만장했다.
최소한의 조사조차 하지 않고 평소처럼 닥치고 돌격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고,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는 변명 말이다.
하지만 그건 멍청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99번 그랬다고 100번째에도 그러리란 보장 따위, 차원계에선 통하지 않았으니까.
심혁진은 한 발 더 나아가 뱀파이어 백작이 전부가 아님을 감지했다.
도그마 차원에 결계가 펼쳐져 있었던 까닭이다.
‘일개 백작급 몬스터가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서 이미 뱀파이어 로드의 개입을 알아챈 심혁진이었다.
그래서 놈을 찾는 데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뱀파이어들이 헌터들을 습격했고, 상당한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처음부터 헌터들을 도울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불가피하게 노출될 테고, 뱀파이어 로드에게 틈을 내줄 수도 있었다.
냉정히 말해 헌터들을 구해 줄 만한 의리 따위가 없기도 했고.
결국 몇 분여의 탐색 끝에 뱀파이어 로드가 없음을 확신한 뒤에야 나선 것이었다.
‘외부 차원에서 손을 쓴 모양인데, 생각보다 강한 놈인가 보군.’
그래도 아포칼립시온에 비할 바는 아닌 모양.
심혁진은 서서히 활강하며 한 지점을 응시했다.
뱀파이어 백작이 우뚝 서 있는 언덕배기였다.
파바바밧!
뱀파이어 백작도 심혁진의 접근을 알아챈 듯했다.
놈이 뭐라 소리를 치자 호위 중이던 뱀파이어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늦었어.”
우우우웅……!
나직이 중얼거리는 심혁진의 양손아귀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잠시 후.
번쩍!
꽈르르릉!
언덕 위로 거대한 뇌격이 내리꽂혔다.
* * *
[중계팀에서 들어온 속보입니다! 외부 필드에 나타난 뱀파이어 백작이 타격을 입은 모양입니다.]
치지직거리는 노이즈만 가득한 화면.
중계 카메라는 오래 전에 파손된지라 불분명한 화면과 캐스터의 설명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세레니티 길드에서 블러드 캐슬의 결계를 깨부순 모양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곽주성 해설?]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이제라도 세레니티 길드가 합세하였으니 전황을 뒤집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그렇습니다, 곽주성 해설. 한국 제일을 다투는 세레니티 길드인 만큼 이번에도 시청자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 캐스터.
방송 짬밥을 이상한 데로 먹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 그런데 말이지요.]
잘만 떠들던 캐스터의 어조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스피커에 집중하던 차수린은 욕설이 나올 것만 같았다.
“대체 뭔데 그러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캐스터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성내 중계팀의 보고로는… 아직 결계가 깨지지 않았다는군요?]
* * *
콰과과과!
고폭탄에라도 타격당한 듯 언덕 위로 거대한 폭발이 치솟았다.
그 충격파가 강풍이 되어 주변을 휩쓸고, 언덕을 이루던 흙더미는 폭발에 휩쓸려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소규모의 화산이라도 터진 듯한 광경.
외부 필드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헌터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누가 만들어낸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다.
단 두 명, 연희수와 그 장본인만 빼고.
“제법인데?”
치솟아 오르는 흙더미 사이에서 심혁진은 웃었다.
방어 스킬 ‘키네틱 실드(Kinetic Shield)’로 인해 파편들은 심혁진에게 닿지 못하고 스러졌다.
다만 눈앞을 가리기엔 충분했고, 때문에 심혁진은 눈이 아닌 기감으로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튀려고?”
퍼엉!
윈드 워크를 펼친 심혁진이 흙먼지를 뚫고 나왔다.
그의 전방 수십 미터 거리에 큰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물체가 존재했다.
뱀파이어 백작이었다.
스스슥!
심혁진이 날아드니 뱀파이어 백작이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등허리의 박쥐 날개는 너덜너덜해졌고 몸 곳곳에도 상처가 있었지만, 심혁진을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엔 생기가 넘쳤다.
우우우웅!
무형의 파장이 심혁진을 덮쳤다.
초음파에 마법적 저주를 실은 커스 샤우트(Curse Shout).
물리 방어용 보호막인 키네틱 실드로는 막을 수 없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심혁진은 냉소할 따름이었다.
“누가 박쥐 아니랄까봐.”
비웃음 섞인 한마디와 함께 실드의 기운을 바꾸었다.
또 다른 방어 스킬인 컨셉션 실드(Conception Shield).
물리 보호막인 키네틱 실드와는 달리 마법과 저주 같은 관념적 스킬에 최적화된 보호막이었다.
우우웅!
백작의 저주 음파가 컨셉션 실드 앞에 무력화됐다.
그 사이 심혁진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단번에 근접 거리로 다가들었다.
“인간!”
노호성과 함께 백작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갈고리 형태로 움켜쥔 손아귀에 붙들리면 강철도 찢겨 나갈 터.
그러나 상대는 강철보다도 강력한 내구성을 지닌 인간이었다.
턱!
심혁진이 마주 손을 뻗어 백작의 손목을 붙들었다.
움찔한 백작이 입을 벌려 초음파를 발하려는 순간.
콰직!
입 한복판에 심혁진의 왼 주먹이 틀어박혔다.
“끄……!”
“탕.”
심혁진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왼 주먹에 기운을 집중시켰다.
반쯤 입속에 박힌 왼 주먹에 푸른 섬전이 맺혔다.
조금 전 언덕을 날려 버린 빛이었다.
“……!”
백작이 고개를 뒤로 빼는 것과 스킬의 격발은 거의 동시였다.
꽈릉!
강렬한 뇌전이 왼 주먹에서 터져 나왔다.
그 뇌격에 휘말린 뱀파이어 백작의 얼굴이 반쯤 녹아내렸다.
심혁진이 애용하는 공격 스킬인 ‘사이킥 라이트닝(Psychic Lightning)’이었다.
“끄으, 끄그극!”
“어차피 재생 능력쯤은 가지고 있잖아. 엄살 부리긴.”
심혁진의 말대로 백작의 얼굴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도는 거의 달팽이 꿈틀대는 수준.
축적된 타격이 큰 데다 체력과 마나가 바닥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딱 심혁진이 원하는 상태.
스스스스.
심혁진의 손짓에 따라 바닥으로부터 몇 개의 돌조각들이 떠올랐다.
거기에 사이킥 에너지를 집중시켜 날리니, 뱀파이어 백작의 팔다리가 꼬치처럼 꿰였다.
“끄으으윽!”
뱀파이어 백작이 경련하며 침음성을 토했다.
심혁진은 백작을 끌고 보다 높은 상공으로 치솟았다.
어차피 볼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일말의 방해조차 받고 싶지 않았다.
“몇 가지만 좀 묻자. 대답 안 하고 뻗대는 거야 네 자유인데, 그러면 좀 많이 아플 거다.”
“웃기지 마라!”
어느 정도 얼굴을 수복시킨 백작이 충혈된 눈으로 일갈했다.
“위대한 뱀파이어가 식량에 불과한 너희 인간에게 굴복할 성싶으냐!”
“응.”
심혁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돌조각들이 푸른 스파크를 튀기자 강렬한 뇌전이 뱀파이어 백작을 강타했다.
“크아아악!”
침을 흘리고 눈알을 까뒤집으며 전율하는 백작.
대체 어떤 스킬을 응용한 것인지, 푸른 스파크는 보스급 몬스터조차 견디기 힘든 격통을 안겨 주고 있었다.
“죽고 싶어도 당분간은 힘들 거야.”
빙긋 웃은 심혁진이 무언가를 꺼내선 백작의 머리에 부었다.
“피, 피……?”
“정확히는 마족의 피지. 어지간한 몬스터의 체력은 바로 회복시킨다더군.”
심혁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다고 엘릭서 수준은 아니지만.”
빠지지직!
“그아아악!”
회복된 체력이 스파크로 인해 싹 날아갔다.
심혁진은 또 다른 시약병을 꺼내 들었다.
“한 20년쯤 뺑이만 치다 보니 이런 것도 모으게 되더라고.”
“이, 이십……?”
“몬스터 회복시켜서 뭐하겠나 싶었는데, 이런 데서 쓰게 되는군. 역시 무엇이든 쓸 데가 있긴 한가 봐.”
“대, 대체 무엇을 알고 싶은 거냐!”
“벌써 끝이야? 좀 더 버텨도 괜찮은데.”
“크으윽!”
뱀파이어 백작은 비굴한 표정이 되었다.
“묻는 것에 대답할 테니 그만해 다오!”
“뭐, 좋아. 피차 시간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니.”
심혁진은 팔짱을 꼈다.
“이곳에 결계를 친 건 뱀파이어 로드일 테지?”
“그, 그렇다.”
“놈은 지금 어디 있지?”
“와, 왈라키아(Wallachia) 차원에…….”
“그게 뭔데?”
“우리들 뱀파이어들의 고향 차원이다.”
“아, 그래. 알겠어. 그런데 너희들, 지금까진 멍청히 사냥만 당해 온 모양이던데. 갑자기 머리통을 굴리게 된 데엔 이유가 있나?”
“명운의 족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게 왜 깨졌는데?”
“대마신급 몬스터가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심혁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 때문인 건가.’
제5장 측정불가
“아……!”
연희수는 멍한 정신 상태로 눈만 깜빡였다.
하급 뱀파이어였다.
아니, 하급 뱀파이어였던 시체였다.
아니, 이제는 그저 불티가 되어 흩날리는 재에 불과했다.
언데드(Undead) 계열 몬스터에 신성 타격을 주어 처치했을 때의 반응.
재가 되어 흩날리는 뱀파이어의 시체를 흩어내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를 본 연희수는 왈칵 눈물이 났다.
“매니저님……!”
“응.”
심혁진은 가볍게 손을 털었다.
연희수는 그제야 심혁진이 어떻게 뱀파이어를 처치했는지 떠올렸다.
패닉 상태에서도 보기는 봤던 것이다.
‘손날로 쳐서 반으로……!’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부 가르듯 쪼개 버렸다.
아무리 하급이라지만 뱀파이어 자체가 물살은 아닌데, 무기 하나 없이 갈라 버린 것이다.
처치 후의 반응으로 봐선 신성 스킬을 사용한 모양.
하지만 연희수는 당수처럼 내리찍는 신성 스킬에 대해서는 듣도 보도 못했다.
수많은 궁금증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이것이었다.
“대, 대체 어떻게 여기 계신 거예요?”
“몰래 따라왔지.”
“예?”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 하여간 이쪽은 대강 쓸어줄 테니 괜히 벗어나지 말고 가만히 틀어박혀 있어.”
“네?”
“웬만하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할 말만 짤막히 끝낸 심혁진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고도의 스피드로 인한 잔상.
이윽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거대한 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푸화아악!
탱커 한 명에게 우르르 몰려들던 좀비 떼가 단번에 도륙당해선 흩뿌려졌다.
수백, 수천 개의 조각이 튀어 오르는 모습은 전율 그 자체.
도움을 받은 탱커는 물론이고 멀찍이서 지켜보던 연희수조차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빛이 번쩍이고 좀비들이 찢겨 나갔을 뿐.
그래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심혁진의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 * *
‘흐흠.’
심혁진은 허공을 박차며 상공으로 치솟았다.
사이커(Psycher) 클래스의 이동 스킬 중 하나인 윈드 워크(Wind walk).
원래는 짧은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는 회피용 스킬이었으나, 스킬 레벨이 80을 넘기니 100m가량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상공으로 오르니 시야가 탁 트였다.
심혁진은 잠시 그곳에 부유하며 주변을 살폈다.
‘백작 놈은 보이는데.’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심혁진.
‘대장 놈이 코빼기도 안 비친단 말이지.’
도그마 차원에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차수린의 말이나 사람들이 멋대로 떠드는 것과는 달리, 이번 전투가 단순한 사냥 따위가 아니란 것을.
뱀파이어들은 멍청히 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전술을 수립하고 침입자를 대비한 갖가지 준비를 마친 뒤였다.
반면 세레니티 길드와 헌터들은 기고만장했다.
최소한의 조사조차 하지 않고 평소처럼 닥치고 돌격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고,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는 변명 말이다.
하지만 그건 멍청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99번 그랬다고 100번째에도 그러리란 보장 따위, 차원계에선 통하지 않았으니까.
심혁진은 한 발 더 나아가 뱀파이어 백작이 전부가 아님을 감지했다.
도그마 차원에 결계가 펼쳐져 있었던 까닭이다.
‘일개 백작급 몬스터가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서 이미 뱀파이어 로드의 개입을 알아챈 심혁진이었다.
그래서 놈을 찾는 데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뱀파이어들이 헌터들을 습격했고, 상당한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처음부터 헌터들을 도울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불가피하게 노출될 테고, 뱀파이어 로드에게 틈을 내줄 수도 있었다.
냉정히 말해 헌터들을 구해 줄 만한 의리 따위가 없기도 했고.
결국 몇 분여의 탐색 끝에 뱀파이어 로드가 없음을 확신한 뒤에야 나선 것이었다.
‘외부 차원에서 손을 쓴 모양인데, 생각보다 강한 놈인가 보군.’
그래도 아포칼립시온에 비할 바는 아닌 모양.
심혁진은 서서히 활강하며 한 지점을 응시했다.
뱀파이어 백작이 우뚝 서 있는 언덕배기였다.
파바바밧!
뱀파이어 백작도 심혁진의 접근을 알아챈 듯했다.
놈이 뭐라 소리를 치자 호위 중이던 뱀파이어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늦었어.”
우우우웅……!
나직이 중얼거리는 심혁진의 양손아귀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잠시 후.
번쩍!
꽈르르릉!
언덕 위로 거대한 뇌격이 내리꽂혔다.
* * *
[중계팀에서 들어온 속보입니다! 외부 필드에 나타난 뱀파이어 백작이 타격을 입은 모양입니다.]
치지직거리는 노이즈만 가득한 화면.
중계 카메라는 오래 전에 파손된지라 불분명한 화면과 캐스터의 설명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세레니티 길드에서 블러드 캐슬의 결계를 깨부순 모양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곽주성 해설?]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이제라도 세레니티 길드가 합세하였으니 전황을 뒤집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그렇습니다, 곽주성 해설. 한국 제일을 다투는 세레니티 길드인 만큼 이번에도 시청자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 캐스터.
방송 짬밥을 이상한 데로 먹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 그런데 말이지요.]
잘만 떠들던 캐스터의 어조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스피커에 집중하던 차수린은 욕설이 나올 것만 같았다.
“대체 뭔데 그러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캐스터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성내 중계팀의 보고로는… 아직 결계가 깨지지 않았다는군요?]
* * *
콰과과과!
고폭탄에라도 타격당한 듯 언덕 위로 거대한 폭발이 치솟았다.
그 충격파가 강풍이 되어 주변을 휩쓸고, 언덕을 이루던 흙더미는 폭발에 휩쓸려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소규모의 화산이라도 터진 듯한 광경.
외부 필드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헌터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누가 만들어낸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다.
단 두 명, 연희수와 그 장본인만 빼고.
“제법인데?”
치솟아 오르는 흙더미 사이에서 심혁진은 웃었다.
방어 스킬 ‘키네틱 실드(Kinetic Shield)’로 인해 파편들은 심혁진에게 닿지 못하고 스러졌다.
다만 눈앞을 가리기엔 충분했고, 때문에 심혁진은 눈이 아닌 기감으로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튀려고?”
퍼엉!
윈드 워크를 펼친 심혁진이 흙먼지를 뚫고 나왔다.
그의 전방 수십 미터 거리에 큰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물체가 존재했다.
뱀파이어 백작이었다.
스스슥!
심혁진이 날아드니 뱀파이어 백작이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등허리의 박쥐 날개는 너덜너덜해졌고 몸 곳곳에도 상처가 있었지만, 심혁진을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엔 생기가 넘쳤다.
우우우웅!
무형의 파장이 심혁진을 덮쳤다.
초음파에 마법적 저주를 실은 커스 샤우트(Curse Shout).
물리 방어용 보호막인 키네틱 실드로는 막을 수 없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심혁진은 냉소할 따름이었다.
“누가 박쥐 아니랄까봐.”
비웃음 섞인 한마디와 함께 실드의 기운을 바꾸었다.
또 다른 방어 스킬인 컨셉션 실드(Conception Shield).
물리 보호막인 키네틱 실드와는 달리 마법과 저주 같은 관념적 스킬에 최적화된 보호막이었다.
우우웅!
백작의 저주 음파가 컨셉션 실드 앞에 무력화됐다.
그 사이 심혁진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단번에 근접 거리로 다가들었다.
“인간!”
노호성과 함께 백작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갈고리 형태로 움켜쥔 손아귀에 붙들리면 강철도 찢겨 나갈 터.
그러나 상대는 강철보다도 강력한 내구성을 지닌 인간이었다.
턱!
심혁진이 마주 손을 뻗어 백작의 손목을 붙들었다.
움찔한 백작이 입을 벌려 초음파를 발하려는 순간.
콰직!
입 한복판에 심혁진의 왼 주먹이 틀어박혔다.
“끄……!”
“탕.”
심혁진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왼 주먹에 기운을 집중시켰다.
반쯤 입속에 박힌 왼 주먹에 푸른 섬전이 맺혔다.
조금 전 언덕을 날려 버린 빛이었다.
“……!”
백작이 고개를 뒤로 빼는 것과 스킬의 격발은 거의 동시였다.
꽈릉!
강렬한 뇌전이 왼 주먹에서 터져 나왔다.
그 뇌격에 휘말린 뱀파이어 백작의 얼굴이 반쯤 녹아내렸다.
심혁진이 애용하는 공격 스킬인 ‘사이킥 라이트닝(Psychic Lightning)’이었다.
“끄으, 끄그극!”
“어차피 재생 능력쯤은 가지고 있잖아. 엄살 부리긴.”
심혁진의 말대로 백작의 얼굴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도는 거의 달팽이 꿈틀대는 수준.
축적된 타격이 큰 데다 체력과 마나가 바닥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딱 심혁진이 원하는 상태.
스스스스.
심혁진의 손짓에 따라 바닥으로부터 몇 개의 돌조각들이 떠올랐다.
거기에 사이킥 에너지를 집중시켜 날리니, 뱀파이어 백작의 팔다리가 꼬치처럼 꿰였다.
“끄으으윽!”
뱀파이어 백작이 경련하며 침음성을 토했다.
심혁진은 백작을 끌고 보다 높은 상공으로 치솟았다.
어차피 볼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일말의 방해조차 받고 싶지 않았다.
“몇 가지만 좀 묻자. 대답 안 하고 뻗대는 거야 네 자유인데, 그러면 좀 많이 아플 거다.”
“웃기지 마라!”
어느 정도 얼굴을 수복시킨 백작이 충혈된 눈으로 일갈했다.
“위대한 뱀파이어가 식량에 불과한 너희 인간에게 굴복할 성싶으냐!”
“응.”
심혁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돌조각들이 푸른 스파크를 튀기자 강렬한 뇌전이 뱀파이어 백작을 강타했다.
“크아아악!”
침을 흘리고 눈알을 까뒤집으며 전율하는 백작.
대체 어떤 스킬을 응용한 것인지, 푸른 스파크는 보스급 몬스터조차 견디기 힘든 격통을 안겨 주고 있었다.
“죽고 싶어도 당분간은 힘들 거야.”
빙긋 웃은 심혁진이 무언가를 꺼내선 백작의 머리에 부었다.
“피, 피……?”
“정확히는 마족의 피지. 어지간한 몬스터의 체력은 바로 회복시킨다더군.”
심혁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다고 엘릭서 수준은 아니지만.”
빠지지직!
“그아아악!”
회복된 체력이 스파크로 인해 싹 날아갔다.
심혁진은 또 다른 시약병을 꺼내 들었다.
“한 20년쯤 뺑이만 치다 보니 이런 것도 모으게 되더라고.”
“이, 이십……?”
“몬스터 회복시켜서 뭐하겠나 싶었는데, 이런 데서 쓰게 되는군. 역시 무엇이든 쓸 데가 있긴 한가 봐.”
“대, 대체 무엇을 알고 싶은 거냐!”
“벌써 끝이야? 좀 더 버텨도 괜찮은데.”
“크으윽!”
뱀파이어 백작은 비굴한 표정이 되었다.
“묻는 것에 대답할 테니 그만해 다오!”
“뭐, 좋아. 피차 시간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니.”
심혁진은 팔짱을 꼈다.
“이곳에 결계를 친 건 뱀파이어 로드일 테지?”
“그, 그렇다.”
“놈은 지금 어디 있지?”
“와, 왈라키아(Wallachia) 차원에…….”
“그게 뭔데?”
“우리들 뱀파이어들의 고향 차원이다.”
“아, 그래. 알겠어. 그런데 너희들, 지금까진 멍청히 사냥만 당해 온 모양이던데. 갑자기 머리통을 굴리게 된 데엔 이유가 있나?”
“명운의 족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게 왜 깨졌는데?”
“대마신급 몬스터가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심혁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 때문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