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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경쟁사와의 마찰(3)
김태성의 눈썹이 크게 꿈틀댔다.
하지만 윽박을 지르거나 고함을 치진 못했다.
심혁진이 두렵다기보다는 상황 자체가 황당한지라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던 것이다.
“차수린 사장,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입니까?”
“왜 제게 그걸 물으시죠?”
“당신네 직원이잖습니까!”
“그 사람.”
차수린이 냉랭히 말했다.
“우리 직원 아니에요.”
“저 남자가 김창준을 납치하고 폭행했는데도 말입니까?”
“누가 그러던가요? 김창준 씨 본인이 그러던가요? 증거나 증인은 있고요?”
일단 뻗대고 보는 차수린.
정말 증인이나 증거가 나오면 어쩌나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 김태성은 주춤했다.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지금 김 사장님은 여기 심혁진 씨에게 누명을 씌우신 거군요?”
“누, 누명이라니. 정말 김창준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주장하려는 겁니까?”
“하긴 했죠. 충분한 대화를 통해 합의를 끌어냈으니.”
“대화를 통해 합의했는데 왜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단 말입니까?”
“글쎄요?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것 아닐까요?”
“…….”
“애초에 그 질문은 우리한테 하셔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인데.”
“차 사장, 이런 식으로 나와서 좋은 게 없을 텐데요.”
“어머나, 이젠 협박까지 하시려는 건가요?”
“협박이라니. 그저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염려해 주시는 데엔 감사드리죠. 불필요한 일이지만.”
차수린이 냉랭히 말을 이었다.
“그럼 할 얘기 더 없으시면 이만 가주시겠어요? 오후에 약속도 있는지라.”
“…….”
김태성은 뭐 씹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차수린과 심혁진을 번갈아 노려본 그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김태성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열흘 뒤에 있을 도그마 차원 공략전. CS에서도 헌터를 내보낸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데요?”
고개를 돌린 김태성이 사납게 웃었다.
“별건 아니고, 서로 파이팅하자는 겁니다.”
“…….”
“그럼 이만.”
김태성이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떠났다.
차수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뭡니까, 저거?”
“김태성. 태성 매니지먼트 사장. 부모 잘 만난 금수저. 할 줄 아는 건 여자 끼고 노는 것밖에 없는 머저리 겸 개자식.”
“요약 한 번 잘했군요.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심혁진은 피식 웃었다.
“근데 금수저? 은수저 아닙니까? 보통 은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하는데.”
“요새는 바리에이션이 다양해요. 금, 은, 흙, 다이아몬드까지 두루 쓰이죠.”
“흐음.”
“그건 그렇고, 대체 왜 그러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차수린이 심혁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굳이 시비를 걸 것까진 없었잖아요.”
“굳이 걸지 않을 이유도 없었죠. 게다가.”
심혁진이 피식 웃었다.
“수린 씨도 신나서 같이 퍼부어댔잖습니까.”
“그거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런 거죠. 원래 계획은 적당히 구슬려서 합의점을 찾는 거였어요. 김태성도 그러려고 찾아왔을 테고요.”
소파에 주저앉은 차수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김창준 데려올 때 증인이나 증거를 남기지 않으신 건 맞죠?”
“예, 아마도.”
“아마도라니요? 확실하지 않다는 거예요?”
“확실합니다.”
“정말로요?”
“정말로.”
“……알겠어요.”
반신반의하는 차수린을 보며 심혁진은 혀를 찼다.
“날 믿었으니까 그놈 앞에서 철석같이 잡아뗀 것 아닙니까?”
“확신 없이 굴었다간 약점을 물릴 것 같아서 일부러 강경하게 나간 거예요. 다행히 태성 쪽에서도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앞으로도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에너지 배리어 덕분에 클럽엔 손상 하나 가지 않았고, 별실이야 어질러졌다지만 클럽의 특성상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바글거리는 취객들 속에서 김창준이나 자신에게 신경 쓸 이가 있을 리도 만무.
설령 있다 해도 남들 앞에선 놈을 팬 적도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알겠어요. 그렇더라도 일정은 취소해야겠네요.”
“일정? 그 도그마 차원인지 뭔지 하는 거 말입니까?”
“그래요.”
“대강 추측은 가는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차수린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이 나갈 때 떠든 거 들으셨죠? 경고예요. 우리 쪽 헌터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경고요.”
“그놈, 머저리 맞나 보군요. 대놓고 그런 소릴 지껄이다니.”
“머저리 맞아요. 하지만 돈 많고 힘도 꽤나 있는 머저리죠.”
둘 중 하나만 많아도 어느 정도의 멍청함은 커버가 되는 법.
한데 김태성은 둘 다 있으니, 적정 수준 이상의 멍청함도 메우는 게 가능할 터였다.
“자세한 얘기나 좀 해주시죠. 그 도그마 차원이란 데서 뭘 하는 겁니까?”
“정기 레이드(Raid)예요. 도그마 차원은 뱀파이어계 마족들의 인터 디멘션(Inter Dimension)이거든요.”
“인터 디멘션?”
“중계 차원을 뜻해요. 간단히 말해 전진기지죠.”
차수린의 대답에 심혁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터 디멘션이란 개념은 그에게 있어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가 경험한 이차원(異次元)은 아케론 하나뿐.
게다가 그가 지구를 떠난 것은 차원 전쟁 초기인지라, 지금과 같은 세분화된 분류법은 존재도 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은 주기적으로 도그마 차원에 병력을 전진 배치시켜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곳을 쳐서 놈들의 전력을 소모시키죠.”
“놈들은 그걸 알면서도 계속 같은 짓을 하고 말입니까?”
“네.”
“걔들 뇌는 텅텅 비었답니까?”
“뱀파이어 로드(Vampire Lord)의 생각이야 우리가 알지 못할 일이죠. 차원학자들은 그런 현상을 명운의 족쇄 때문이라 보고 있다더군요.”
“명운의 족쇄?”
“각 차원을 옭아매는 일종의 시스템이에요. 한 차원에 구속된 존재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철칙 같은 거죠.”
“흐흠.”
심혁진이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뱀파이어 로드는 그 족쇄 때문에 패할 걸 뻔히 알면서도 병력을 보낸다는 거군요.”
“그래요.”
“강합니까, 그놈들?”
“약하진 않아요. 병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울들은 기껏해야 C에서 B랭크 사이의 몬스터지만, 지휘관격인 순혈 뱀파이어는 대략 A랭크쯤 되거든요.”
“…….”
“기록상으로는 트리플 A랭크까지 확인된 적이 있어요. 그 정도면 상당한 난적이라 할 수 있죠.”
“아, 예…….”
“왜 그러세요?”
차수린의 질문에 심혁진은 쓰게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새삼 이래저래 생각이 복잡해졌다.
기나긴 전쟁을 거치며 이래저래 차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어째서 아케론 차원에 구조대를 파견하지 못했는가.
지금에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차수린은 심혁진의 표정을 다른 쪽으로 해석했다.
“레이드 자체는 문제될 게 없어요. 국내 최대의 길드인 세레니티에서 철저히 통제에 들어가거든요.”
“통제?”
“예. 엄밀히 말하면 본 게임은 그들이 도맡고 외부 헌터들은 잡몹들만 처리하는 식이죠.”
“알맹이는 자기네가 먹어치우고 찌꺼기만 남겨 준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정확히 보셨어요.”
차수린이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그 찌꺼기조차도 우리 같은 군소 업체에겐 소중해요.”
“그런데 김태성 그놈은 대놓고 방해하겠노라 선전포고를 한 거군요.”
“그런 거죠.”
“그 국내 최대 길드란 곳에 일러바치는 건 어떻습니까?”
“들은 척도 하지 않을걸요. 아니, 애초에 연락조차 할 길이 없어요.”
“걔네한텐 전화기 없답니까?”
“대표 번호로 걸어 봤자 상담원이나 받겠죠. 길드장이나 사장은 물론이고 소속 헌터와 연락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렇더라도 그쪽에서 통제를 한다니, 김태성네 헌터들이 함부로 나대진 못할 텐데요.”
“말이 좋아 통제지, 말단 헌터들에게까지 관심을 두진 않을 거예요.”
“태성 쪽의 방해를 받는다 치면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가 될 것 같습니까?”
“우리 헌터가 다치겠죠. 최악의 경우엔…….”
“죽을 수도 있다?”
“네.”
차수린은 음울한 얼굴로 긍정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이드의 본질은 전투.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필연이니까요.”
“그렇다면…….”
“전투 자체에만 임해도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데, 방해공작까지 들어온다면 말할 것도 없죠. 포기하는 게 최선이에요.”
“태성 쪽 헌터들이 그렇게 강합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 헌터보다는 강해요.”
“우리 헌터? 한 명입니까?”
“네.”
차수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도 어렵사리 끼워 넣은 거였는데…….”
“그럼 취소하지 마시죠.”
“그럴 순 없어요. 저 한 명의 자존심 때문에 애꿎은 헌터를 상하게 할 순 없어요.”
“다치지 않게 하면 되잖습니까.”
“대체 어떻게요? 혁진 씨가 대신 나가기라도 할 건가요?”
“어…….”
“미안해요.”
차수린은 곧장 사과했다.
“헌터도 아닌 분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네요.”
심혁진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하죠. 김태성을 열 받게 만든 데엔 내 책임도 있으니, 고용 건과는 별개로 이번 일은 내가 해결하는 걸로 말입니다.”
“뭔가 좋은 수라도 있단 말씀인가요?”
“아마도요. 일단은 그 헌터부터 만나봐야겠지만 말입니다.”
차수린의 얼굴에 희미한 불신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그렇지만…….”
“하나만 묻죠. 이번 레이드, 소속 헌터의 참가를 취소할 경우의 손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주저를 거듭하던 차수린이 돌연 정신을 차렸다.
“막심해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그렇다면 승부수를 던져 봐야죠. 안 그렇습니까?”
차수린은 한결 명료해진 눈으로 심혁진을 응시했다.
“할 수 있겠어요?”
“예.”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믿어 볼게요. 그리고 이번 일을 잘 해내시면.”
잠시 머뭇거리던 차수린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심혁진 씨를 고용하겠어요.”
사실 고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을 올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차수린도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어째 지고 들어가는 느낌인지라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부끄럽기도 했고.
게다가 심혁진이 원인 제공을 한 측면도 있으니, 어느 정도 합리화하게 되는 면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해결할 생각인거죠?”
“좀 전에도 말했지만 일단 그 헌터부터 만나봐야겠습니다.”
딱 잘라 말한 심혁진이 이어서 말했다.
“기본 정보와 연락처 정도는 있겠죠? 내가 알아서 찾아가볼 테니 말해줬으면 합니다만.”
“그럴 필요 없어요. 곧 여기로 올 거니까.”
“여기로?”
“네. 오후에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차수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열렸다.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실제로도 교복을 입은 소녀 하나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 늦은 거 아니죠? 담임 쌤한테 말하고 오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아니야. 괜찮아. 마침 제때 잘 왔어, 희수야.”
살갑게 웃으며 맞이하는 차수린.
심혁진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서 물었다.
“저 애가 설마?”
“네.”
차수린의 태도가 순식간에 사무적으로 변했다.
“우리 매니지먼트 소속의 더블C 랭크 헌터 연희수.”
“…….”
“바로 저 아이가 제가 말한 헌터예요.”
김태성의 눈썹이 크게 꿈틀댔다.
하지만 윽박을 지르거나 고함을 치진 못했다.
심혁진이 두렵다기보다는 상황 자체가 황당한지라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던 것이다.
“차수린 사장,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입니까?”
“왜 제게 그걸 물으시죠?”
“당신네 직원이잖습니까!”
“그 사람.”
차수린이 냉랭히 말했다.
“우리 직원 아니에요.”
“저 남자가 김창준을 납치하고 폭행했는데도 말입니까?”
“누가 그러던가요? 김창준 씨 본인이 그러던가요? 증거나 증인은 있고요?”
일단 뻗대고 보는 차수린.
정말 증인이나 증거가 나오면 어쩌나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 김태성은 주춤했다.
“그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지금 김 사장님은 여기 심혁진 씨에게 누명을 씌우신 거군요?”
“누, 누명이라니. 정말 김창준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주장하려는 겁니까?”
“하긴 했죠. 충분한 대화를 통해 합의를 끌어냈으니.”
“대화를 통해 합의했는데 왜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단 말입니까?”
“글쎄요?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것 아닐까요?”
“…….”
“애초에 그 질문은 우리한테 하셔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인데.”
“차 사장, 이런 식으로 나와서 좋은 게 없을 텐데요.”
“어머나, 이젠 협박까지 하시려는 건가요?”
“협박이라니. 그저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염려해 주시는 데엔 감사드리죠. 불필요한 일이지만.”
차수린이 냉랭히 말을 이었다.
“그럼 할 얘기 더 없으시면 이만 가주시겠어요? 오후에 약속도 있는지라.”
“…….”
김태성은 뭐 씹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차수린과 심혁진을 번갈아 노려본 그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김태성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운을 뗐다.
“열흘 뒤에 있을 도그마 차원 공략전. CS에서도 헌터를 내보낸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데요?”
고개를 돌린 김태성이 사납게 웃었다.
“별건 아니고, 서로 파이팅하자는 겁니다.”
“…….”
“그럼 이만.”
김태성이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떠났다.
차수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뭡니까, 저거?”
“김태성. 태성 매니지먼트 사장. 부모 잘 만난 금수저. 할 줄 아는 건 여자 끼고 노는 것밖에 없는 머저리 겸 개자식.”
“요약 한 번 잘했군요.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심혁진은 피식 웃었다.
“근데 금수저? 은수저 아닙니까? 보통 은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하는데.”
“요새는 바리에이션이 다양해요. 금, 은, 흙, 다이아몬드까지 두루 쓰이죠.”
“흐음.”
“그건 그렇고, 대체 왜 그러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차수린이 심혁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굳이 시비를 걸 것까진 없었잖아요.”
“굳이 걸지 않을 이유도 없었죠. 게다가.”
심혁진이 피식 웃었다.
“수린 씨도 신나서 같이 퍼부어댔잖습니까.”
“그거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런 거죠. 원래 계획은 적당히 구슬려서 합의점을 찾는 거였어요. 김태성도 그러려고 찾아왔을 테고요.”
소파에 주저앉은 차수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김창준 데려올 때 증인이나 증거를 남기지 않으신 건 맞죠?”
“예, 아마도.”
“아마도라니요? 확실하지 않다는 거예요?”
“확실합니다.”
“정말로요?”
“정말로.”
“……알겠어요.”
반신반의하는 차수린을 보며 심혁진은 혀를 찼다.
“날 믿었으니까 그놈 앞에서 철석같이 잡아뗀 것 아닙니까?”
“확신 없이 굴었다간 약점을 물릴 것 같아서 일부러 강경하게 나간 거예요. 다행히 태성 쪽에서도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앞으로도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에너지 배리어 덕분에 클럽엔 손상 하나 가지 않았고, 별실이야 어질러졌다지만 클럽의 특성상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바글거리는 취객들 속에서 김창준이나 자신에게 신경 쓸 이가 있을 리도 만무.
설령 있다 해도 남들 앞에선 놈을 팬 적도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알겠어요. 그렇더라도 일정은 취소해야겠네요.”
“일정? 그 도그마 차원인지 뭔지 하는 거 말입니까?”
“그래요.”
“대강 추측은 가는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차수린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이 나갈 때 떠든 거 들으셨죠? 경고예요. 우리 쪽 헌터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경고요.”
“그놈, 머저리 맞나 보군요. 대놓고 그런 소릴 지껄이다니.”
“머저리 맞아요. 하지만 돈 많고 힘도 꽤나 있는 머저리죠.”
둘 중 하나만 많아도 어느 정도의 멍청함은 커버가 되는 법.
한데 김태성은 둘 다 있으니, 적정 수준 이상의 멍청함도 메우는 게 가능할 터였다.
“자세한 얘기나 좀 해주시죠. 그 도그마 차원이란 데서 뭘 하는 겁니까?”
“정기 레이드(Raid)예요. 도그마 차원은 뱀파이어계 마족들의 인터 디멘션(Inter Dimension)이거든요.”
“인터 디멘션?”
“중계 차원을 뜻해요. 간단히 말해 전진기지죠.”
차수린의 대답에 심혁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터 디멘션이란 개념은 그에게 있어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가 경험한 이차원(異次元)은 아케론 하나뿐.
게다가 그가 지구를 떠난 것은 차원 전쟁 초기인지라, 지금과 같은 세분화된 분류법은 존재도 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들은 주기적으로 도그마 차원에 병력을 전진 배치시켜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곳을 쳐서 놈들의 전력을 소모시키죠.”
“놈들은 그걸 알면서도 계속 같은 짓을 하고 말입니까?”
“네.”
“걔들 뇌는 텅텅 비었답니까?”
“뱀파이어 로드(Vampire Lord)의 생각이야 우리가 알지 못할 일이죠. 차원학자들은 그런 현상을 명운의 족쇄 때문이라 보고 있다더군요.”
“명운의 족쇄?”
“각 차원을 옭아매는 일종의 시스템이에요. 한 차원에 구속된 존재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철칙 같은 거죠.”
“흐흠.”
심혁진이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뱀파이어 로드는 그 족쇄 때문에 패할 걸 뻔히 알면서도 병력을 보낸다는 거군요.”
“그래요.”
“강합니까, 그놈들?”
“약하진 않아요. 병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울들은 기껏해야 C에서 B랭크 사이의 몬스터지만, 지휘관격인 순혈 뱀파이어는 대략 A랭크쯤 되거든요.”
“…….”
“기록상으로는 트리플 A랭크까지 확인된 적이 있어요. 그 정도면 상당한 난적이라 할 수 있죠.”
“아, 예…….”
“왜 그러세요?”
차수린의 질문에 심혁진은 쓰게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새삼 이래저래 생각이 복잡해졌다.
기나긴 전쟁을 거치며 이래저래 차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어째서 아케론 차원에 구조대를 파견하지 못했는가.
지금에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차수린은 심혁진의 표정을 다른 쪽으로 해석했다.
“레이드 자체는 문제될 게 없어요. 국내 최대의 길드인 세레니티에서 철저히 통제에 들어가거든요.”
“통제?”
“예. 엄밀히 말하면 본 게임은 그들이 도맡고 외부 헌터들은 잡몹들만 처리하는 식이죠.”
“알맹이는 자기네가 먹어치우고 찌꺼기만 남겨 준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정확히 보셨어요.”
차수린이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그 찌꺼기조차도 우리 같은 군소 업체에겐 소중해요.”
“그런데 김태성 그놈은 대놓고 방해하겠노라 선전포고를 한 거군요.”
“그런 거죠.”
“그 국내 최대 길드란 곳에 일러바치는 건 어떻습니까?”
“들은 척도 하지 않을걸요. 아니, 애초에 연락조차 할 길이 없어요.”
“걔네한텐 전화기 없답니까?”
“대표 번호로 걸어 봤자 상담원이나 받겠죠. 길드장이나 사장은 물론이고 소속 헌터와 연락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렇더라도 그쪽에서 통제를 한다니, 김태성네 헌터들이 함부로 나대진 못할 텐데요.”
“말이 좋아 통제지, 말단 헌터들에게까지 관심을 두진 않을 거예요.”
“태성 쪽의 방해를 받는다 치면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가 될 것 같습니까?”
“우리 헌터가 다치겠죠. 최악의 경우엔…….”
“죽을 수도 있다?”
“네.”
차수린은 음울한 얼굴로 긍정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이드의 본질은 전투.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필연이니까요.”
“그렇다면…….”
“전투 자체에만 임해도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데, 방해공작까지 들어온다면 말할 것도 없죠. 포기하는 게 최선이에요.”
“태성 쪽 헌터들이 그렇게 강합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 헌터보다는 강해요.”
“우리 헌터? 한 명입니까?”
“네.”
차수린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도 어렵사리 끼워 넣은 거였는데…….”
“그럼 취소하지 마시죠.”
“그럴 순 없어요. 저 한 명의 자존심 때문에 애꿎은 헌터를 상하게 할 순 없어요.”
“다치지 않게 하면 되잖습니까.”
“대체 어떻게요? 혁진 씨가 대신 나가기라도 할 건가요?”
“어…….”
“미안해요.”
차수린은 곧장 사과했다.
“헌터도 아닌 분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네요.”
심혁진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하죠. 김태성을 열 받게 만든 데엔 내 책임도 있으니, 고용 건과는 별개로 이번 일은 내가 해결하는 걸로 말입니다.”
“뭔가 좋은 수라도 있단 말씀인가요?”
“아마도요. 일단은 그 헌터부터 만나봐야겠지만 말입니다.”
차수린의 얼굴에 희미한 불신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그렇지만…….”
“하나만 묻죠. 이번 레이드, 소속 헌터의 참가를 취소할 경우의 손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주저를 거듭하던 차수린이 돌연 정신을 차렸다.
“막심해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그렇다면 승부수를 던져 봐야죠. 안 그렇습니까?”
차수린은 한결 명료해진 눈으로 심혁진을 응시했다.
“할 수 있겠어요?”
“예.”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믿어 볼게요. 그리고 이번 일을 잘 해내시면.”
잠시 머뭇거리던 차수린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심혁진 씨를 고용하겠어요.”
사실 고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을 올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차수린도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어째 지고 들어가는 느낌인지라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부끄럽기도 했고.
게다가 심혁진이 원인 제공을 한 측면도 있으니, 어느 정도 합리화하게 되는 면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해결할 생각인거죠?”
“좀 전에도 말했지만 일단 그 헌터부터 만나봐야겠습니다.”
딱 잘라 말한 심혁진이 이어서 말했다.
“기본 정보와 연락처 정도는 있겠죠? 내가 알아서 찾아가볼 테니 말해줬으면 합니다만.”
“그럴 필요 없어요. 곧 여기로 올 거니까.”
“여기로?”
“네. 오후에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차수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열렸다.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실제로도 교복을 입은 소녀 하나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 늦은 거 아니죠? 담임 쌤한테 말하고 오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아니야. 괜찮아. 마침 제때 잘 왔어, 희수야.”
살갑게 웃으며 맞이하는 차수린.
심혁진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서 물었다.
“저 애가 설마?”
“네.”
차수린의 태도가 순식간에 사무적으로 변했다.
“우리 매니지먼트 소속의 더블C 랭크 헌터 연희수.”
“…….”
“바로 저 아이가 제가 말한 헌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