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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경쟁사와의 마찰(2)
‘미행.’
분명했다.
기감을 통해 느껴지는 움직임의 이질감이 다른 이들에 비해 두드러졌다.
당장 떠오르는 가능성은 두 가지.
‘정부 측에서 보냈거나…….’
태성이라 했던가?
CS로부터 김창준을 빼갔다는 매니지먼트사.
그쪽에서 앙심을 품고 사람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심혁진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어느 쪽이 됐든 위협적이진 않았던 까닭이다.
“여기네요.”
큼직한데 세련되기까지 한 건물 앞에서 차수린이 멈춰 섰다.
고개를 뒤로 젖힌 심혁진은 그 위용에 입을 벌렸다.
“백화점입니까?”
“S사 디지털 플라자예요.”
“한 회사 물건만 파는데 이렇게 크다는 겁니까?”
“요즘은 그래요.”
심혁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나라가 꽤 잘 살게 됐나 본데요.”
“잘난 사람만 잘 살아요. 서민들 등골이 휘는 건 똑같죠. 뭐, 그래도 예전보단 사정이 좀 낫지만.”
차수린은 심혁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핸드폰하고 노트북을 하나 사려는데요.”
“생각하시는 가격대가 있으십니까?”
“대충…….”
직원의 설명과 차수린의 질문을 한 귀로 흘리며 심혁진은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미행자는 건물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진 않으려는 모양.
하기야 여기까지 따라 들어오는 건 너무 부담이 클 것이다.
“이봐요, 심혁진 씨.”
차수린의 말에 심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습니다.”
“몇 번씩이나 묻는데 대답 한 번 안 했으면서요?”
심혁진이 그녀를 돌아봤다.
“그랬습니까?”
“그랬어요.”
“질문이 뭐였는데요.”
“……가격대, 얼마 정도 생각 하냐고 물었잖아요.”
“그랬군요. 적당한 가격대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 적당한 게 어느 정도…….”
“제일 비싼 거.”
차수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그럴 거였으면 내가 같이 올 것도 없었잖아요?”
“비싼 가격대여도 성능 차이는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걸 수린 씨가 좀 골라 달라고요.”
“……그냥 알아서 고를게요. 주는 대로 써요.”
“예.”
잠시 후, 차수린의 요구대로 직원이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핸드폰은 납작했고 노트북은 아담했다.
“숫자 버튼이 없는데 뭘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렇게요.”
차수린이 손가락을 얹자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그것을 본 심혁진은 깜짝 놀랐다.
“아니, 화면을 직접 눌러 조작한다는 겁니까?”
“목소리 좀 낮춰요. 남들이 보면 바보인 줄 알겠어요.”
“…….”
“조작법은 어린애들도 금방 익힐 정도니까 꼬치꼬치 묻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제 됐죠?”
“예.”
심혁진은 인벤토리에서 5만 원짜리 다발을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돈 뭉치를 받아든 직원은 멍한 표정을 했다.
“저…….”
“됐어요. 제가 결제하죠.”
보다 못한 차수린이 카드를 내밀었다.
“왜요. 요즘 이런 데선 현금 안 받습니까?”
“굳이 결제한다면 못할 것은 없는데… 그래도 카드가 나아요. 어쨌든 기입할 게 많으니까 작성부터 하세요.”
차수린의 말에 직원이 멋쩍게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앞에서 심혁진은 잠시 고민했다.
일단 그는 사망 처리된 상태고, 국정원 측에서 수정했을지는 미지수였던 것이다.
분위기를 본 차수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은 제 명의로 하죠.”
“어? 그래도 됩니까?”
“딱히 문제될 건 없을 거예요. 심혁진 씨가 사고라도 치지 않는 이상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걸리지 않을 거니까.”
“……퍽이나 믿음직스러운 말이네요.”
한숨을 쉬면서도 차수린은 서류를 작성했다.
그러는 동안 심혁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 중에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디스플레이 기기마다 영상의 화질은 왜 이리도 깨끗한지.
모든 것이 세련되고 깔끔한지라 이질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나저나… 나는 수린 씨 회사에 고용된 겁니까?”
“아직 결정 안 했어요.”
“알겠습니다.”
고용했노라고 대답했다면 말했을 텐데.
속으로만 중얼거린 심혁진이 기지개를 켰다.
“다 끝났습니까? 그럼 밥이나 먹죠.”
“미안한데 시켜 먹는 곳이 따로 있어요.”
“개인적인 호의로 사려는 겁니다만.”
“그래서 싫다는 거예요.”
박스에 담긴 노트북과 핸드폰을 건넨 차수린은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
어깨를 으쓱인 심혁진은 조금 기다렸다.
미행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것.
행동에 따라 본인과 차수린, 어느 쪽을 미행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행자는 떠나는 그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나로군.’
쓰게 웃은 심혁진이 플라자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의외로 미행자는 거리를 벌리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심혁진이 다가오는데도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미행자는 정장 차림의 사내로, 큼직한 무테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사무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남의 뒤나 밟으면서 얼굴 가죽 한 번 두꺼운걸.”
“미행한 게 아니라 그저 뒤를 따랐을 뿐입니다.”
심혁진의 말에 무테안경이 대꾸했다.
“우연히 내 뒤를 따라왔다고 말하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쥐새끼처럼 미행한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일부러 내게 기척을 들켰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심혁진 님.”
“너, 뭐하는 놈인데?”
“백영민이라고 합니다. 조상곤 장관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건 또 누군데?”
“현 정보통신부 장관님이십니다.”
“그런 양반이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지?”
“그저 친하게 지내자는 것이지요.”
백영민이 품속에서 봉투를 꺼냈다.
뜯어보니 심혁진과 관련된 몇 장의 문서가 있었다.
“심혁진 님의 국민 신분이 회복되었습니다. 모든 절차는 합법적으로 처리되었으니 신분 문제가 불거질 일은 없을 겁니다.”
봉투 안쪽을 보니 주민등록증도 들어 있었다.
사진까지 새 걸로 찍혀 있었는데, 구도를 보자니 CCTV 화면을 그대로 따온 듯했다.
“죽은 자에서 산 사람이 되었다는 거군. 그 대가는 뭐지?”
“없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께 이 정도는 응당 해드려야 하는 일이지요.”
“그건 그래. 하긴 고작 이런 것 가지고 생색내서야 웃기는 일이지. 미국이나 다른 나라였으면 보상금도 왕창 줬을 텐데.”
“…….”
“그나저나 줄 거면 빨리 주지 그랬어? 기왕이면 핸드폰 사기 전에 줬으면 좋았잖아.”
“동행자가 있어서 심혁진 님이 껄끄러워 하실 것 같았습니다.”
“눈치가 없지는 않군. 근데 왜 이걸 정보통신부 사람이 전달해 주는 거지?”
오랜 기간 사회와 단절되었던 심혁진이지만, 정보통신부에서 주민등록증을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는 정보통신부 직원이 아닙니다.”
“조 장관이란 작자의 사조직 소속이란 뜻이군. 하긴 공무원 같진 않다고 생각했어.”
“…….”
백영민이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심혁진은 피식 웃었다.
“왜? 허우대만 멀쩡한 옛날 사람이라 머리까지 굳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런 건 아닙니다. 오해의 여지를 드렸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네 사과 같은 건 필요 없고, 앞으로 다시 볼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군.”
“그것은 제 뜻대로 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 네 윗대가리더러 잘 생각하라고 전해야겠네.”
심혁진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현직 장관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왜 나한테 호의를 베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쪽이랑 별로 얽히고 싶지 않거든.”
“…….”
“네가 나한테 무슨 말을 전하려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더 말을 섞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가서 전해. 내 일에 신경 끄고 다시는 보는 일 없도록 하자고.”
심혁진은 백영민의 어깨에 넌지시 손을 얹었다.
그냥 봐선 별것 아닌 동작.
하지만 어깨를 잡힌 백영민의 낯빛은 실시간으로 푸르죽죽하게 변해 갔다.
“외우지 못할 얘기는 아니겠지?”
“그렇… 습니다.”
“장관님께 잘 전해드릴 수 있겠지? 내 의도를 정확히 살려서 말이야.”
“예…….”
“좋아.”
심혁진이 웃으며 손을 뗐다.
백영민은 붙들렸던 어깨 부위를 조심스레 주무르며 한숨을 토했다.
“그럼 잘 좀 부탁하지. 그리고 다신 내 주변에 얼씬대지 마.”
“…….”
“잘 가라고. 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할 말을 마친 심혁진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백영민은 욱신대는 어깨를 움켜쥔 채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 * *
사무실로 돌아오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구석에 마련된 응접용 테이블에 차수린과 또 다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들어서는 길에 유달리 이목을 끄는 고급 외제차가 놓여 있었다.
사내의 외관을 보자마자 차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차수린과 마주 보며 앉아 있던 사내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려던 심혁진이 말끝을 흐렸다.
차수린이 눈짓으로 그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뭔가 싶어서 가만히 있자니 그녀가 대꾸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네요, 김 사장님.”
“글쎄요. 김창준을 납치, 감금, 폭행한 남성의 인상착의가 저분과 상당히 흡사한데요.”
“김창준이 그럽디까? 자기가 납치, 감금, 폭행을 당했다고?”
심혁진이 대놓고 묻자 차수린이 한숨을 쉬었다.
부티 나는 사내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당신이 했습니까?”
“김창준을 만난 적은 있지. 납치한 적도, 감금한 적도 없지만.”
“폭행한 적은 있단 말씀이군요?”
“내가 걔를 폭행했으면.”
심혁진은 빙긋 웃었다.
“지구상에 김창준이란 인간의 흔적 하나 남지 않았을 거요.”
“…….”
“그만하세요, 혁진 씨. 김태성 사장님도 적당히 하시죠. 저희는 사과를 해야 할 입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입니다.”
차수린이 중재에 나서자 사내, 김태성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과라. 우리가 CS에 뭔가 잘못이라도 했다는 투로군요.”
“그럼 아닌가요? 대놓고 이중계약을 맺었는데.”
“그야 김창준 측에서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시네요. 설령 그 말씀대로라 해도 사전에 꼼꼼히 확인을 하셨어야죠.”
김태성은 슬쩍 상체를 뒤로 당겼다.
“김창준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자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상담치료사를 보내고 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난리도 아니라더군요.”
“애석하게도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네요.”
“투자 가치를 지녔던 헌터 하나가 그대로 망가졌습니다. 뭐, 기껏해야 B급에 지나지 않지만. 어쨌든 잘만 키우면 짭짤하게 벌어다 줄 재목이었는데 말이지요.”
“…….”
차수린의 얼굴에 강한 반감이 드러났다.
김창준은 망할 놈이었지만 어찌 됐든 CS의 간판.
그를 헐뜯는 것은 결국 CS를 돌려서 비하하는 것과 같았다.
김태성의 의도도 그것일 테고.
“저 치가 태성 매니지먼트인가 하는 곳 사장입니까?”
“……그래요.”
태연히 묻는 심혁진과 한숨 쉬며 대답하는 차수린.
김태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사장끼리 얘기하는 것 안 보입니까?”
“잘 보이는데.”
심혁진이 담담히 대꾸했다.
“그래서?”
‘미행.’
분명했다.
기감을 통해 느껴지는 움직임의 이질감이 다른 이들에 비해 두드러졌다.
당장 떠오르는 가능성은 두 가지.
‘정부 측에서 보냈거나…….’
태성이라 했던가?
CS로부터 김창준을 빼갔다는 매니지먼트사.
그쪽에서 앙심을 품고 사람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심혁진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어느 쪽이 됐든 위협적이진 않았던 까닭이다.
“여기네요.”
큼직한데 세련되기까지 한 건물 앞에서 차수린이 멈춰 섰다.
고개를 뒤로 젖힌 심혁진은 그 위용에 입을 벌렸다.
“백화점입니까?”
“S사 디지털 플라자예요.”
“한 회사 물건만 파는데 이렇게 크다는 겁니까?”
“요즘은 그래요.”
심혁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나라가 꽤 잘 살게 됐나 본데요.”
“잘난 사람만 잘 살아요. 서민들 등골이 휘는 건 똑같죠. 뭐, 그래도 예전보단 사정이 좀 낫지만.”
차수린은 심혁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핸드폰하고 노트북을 하나 사려는데요.”
“생각하시는 가격대가 있으십니까?”
“대충…….”
직원의 설명과 차수린의 질문을 한 귀로 흘리며 심혁진은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미행자는 건물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진 않으려는 모양.
하기야 여기까지 따라 들어오는 건 너무 부담이 클 것이다.
“이봐요, 심혁진 씨.”
차수린의 말에 심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습니다.”
“몇 번씩이나 묻는데 대답 한 번 안 했으면서요?”
심혁진이 그녀를 돌아봤다.
“그랬습니까?”
“그랬어요.”
“질문이 뭐였는데요.”
“……가격대, 얼마 정도 생각 하냐고 물었잖아요.”
“그랬군요. 적당한 가격대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 적당한 게 어느 정도…….”
“제일 비싼 거.”
차수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그럴 거였으면 내가 같이 올 것도 없었잖아요?”
“비싼 가격대여도 성능 차이는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걸 수린 씨가 좀 골라 달라고요.”
“……그냥 알아서 고를게요. 주는 대로 써요.”
“예.”
잠시 후, 차수린의 요구대로 직원이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핸드폰은 납작했고 노트북은 아담했다.
“숫자 버튼이 없는데 뭘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렇게요.”
차수린이 손가락을 얹자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그것을 본 심혁진은 깜짝 놀랐다.
“아니, 화면을 직접 눌러 조작한다는 겁니까?”
“목소리 좀 낮춰요. 남들이 보면 바보인 줄 알겠어요.”
“…….”
“조작법은 어린애들도 금방 익힐 정도니까 꼬치꼬치 묻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제 됐죠?”
“예.”
심혁진은 인벤토리에서 5만 원짜리 다발을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돈 뭉치를 받아든 직원은 멍한 표정을 했다.
“저…….”
“됐어요. 제가 결제하죠.”
보다 못한 차수린이 카드를 내밀었다.
“왜요. 요즘 이런 데선 현금 안 받습니까?”
“굳이 결제한다면 못할 것은 없는데… 그래도 카드가 나아요. 어쨌든 기입할 게 많으니까 작성부터 하세요.”
차수린의 말에 직원이 멋쩍게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앞에서 심혁진은 잠시 고민했다.
일단 그는 사망 처리된 상태고, 국정원 측에서 수정했을지는 미지수였던 것이다.
분위기를 본 차수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은 제 명의로 하죠.”
“어? 그래도 됩니까?”
“딱히 문제될 건 없을 거예요. 심혁진 씨가 사고라도 치지 않는 이상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걸리지 않을 거니까.”
“……퍽이나 믿음직스러운 말이네요.”
한숨을 쉬면서도 차수린은 서류를 작성했다.
그러는 동안 심혁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 중에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디스플레이 기기마다 영상의 화질은 왜 이리도 깨끗한지.
모든 것이 세련되고 깔끔한지라 이질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나저나… 나는 수린 씨 회사에 고용된 겁니까?”
“아직 결정 안 했어요.”
“알겠습니다.”
고용했노라고 대답했다면 말했을 텐데.
속으로만 중얼거린 심혁진이 기지개를 켰다.
“다 끝났습니까? 그럼 밥이나 먹죠.”
“미안한데 시켜 먹는 곳이 따로 있어요.”
“개인적인 호의로 사려는 겁니다만.”
“그래서 싫다는 거예요.”
박스에 담긴 노트북과 핸드폰을 건넨 차수린은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
어깨를 으쓱인 심혁진은 조금 기다렸다.
미행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것.
행동에 따라 본인과 차수린, 어느 쪽을 미행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행자는 떠나는 그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나로군.’
쓰게 웃은 심혁진이 플라자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의외로 미행자는 거리를 벌리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심혁진이 다가오는데도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미행자는 정장 차림의 사내로, 큼직한 무테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사무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남의 뒤나 밟으면서 얼굴 가죽 한 번 두꺼운걸.”
“미행한 게 아니라 그저 뒤를 따랐을 뿐입니다.”
심혁진의 말에 무테안경이 대꾸했다.
“우연히 내 뒤를 따라왔다고 말하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쥐새끼처럼 미행한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일부러 내게 기척을 들켰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심혁진 님.”
“너, 뭐하는 놈인데?”
“백영민이라고 합니다. 조상곤 장관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건 또 누군데?”
“현 정보통신부 장관님이십니다.”
“그런 양반이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지?”
“그저 친하게 지내자는 것이지요.”
백영민이 품속에서 봉투를 꺼냈다.
뜯어보니 심혁진과 관련된 몇 장의 문서가 있었다.
“심혁진 님의 국민 신분이 회복되었습니다. 모든 절차는 합법적으로 처리되었으니 신분 문제가 불거질 일은 없을 겁니다.”
봉투 안쪽을 보니 주민등록증도 들어 있었다.
사진까지 새 걸로 찍혀 있었는데, 구도를 보자니 CCTV 화면을 그대로 따온 듯했다.
“죽은 자에서 산 사람이 되었다는 거군. 그 대가는 뭐지?”
“없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께 이 정도는 응당 해드려야 하는 일이지요.”
“그건 그래. 하긴 고작 이런 것 가지고 생색내서야 웃기는 일이지. 미국이나 다른 나라였으면 보상금도 왕창 줬을 텐데.”
“…….”
“그나저나 줄 거면 빨리 주지 그랬어? 기왕이면 핸드폰 사기 전에 줬으면 좋았잖아.”
“동행자가 있어서 심혁진 님이 껄끄러워 하실 것 같았습니다.”
“눈치가 없지는 않군. 근데 왜 이걸 정보통신부 사람이 전달해 주는 거지?”
오랜 기간 사회와 단절되었던 심혁진이지만, 정보통신부에서 주민등록증을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는 정보통신부 직원이 아닙니다.”
“조 장관이란 작자의 사조직 소속이란 뜻이군. 하긴 공무원 같진 않다고 생각했어.”
“…….”
백영민이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심혁진은 피식 웃었다.
“왜? 허우대만 멀쩡한 옛날 사람이라 머리까지 굳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런 건 아닙니다. 오해의 여지를 드렸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네 사과 같은 건 필요 없고, 앞으로 다시 볼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군.”
“그것은 제 뜻대로 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 네 윗대가리더러 잘 생각하라고 전해야겠네.”
심혁진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현직 장관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왜 나한테 호의를 베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쪽이랑 별로 얽히고 싶지 않거든.”
“…….”
“네가 나한테 무슨 말을 전하려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더 말을 섞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가서 전해. 내 일에 신경 끄고 다시는 보는 일 없도록 하자고.”
심혁진은 백영민의 어깨에 넌지시 손을 얹었다.
그냥 봐선 별것 아닌 동작.
하지만 어깨를 잡힌 백영민의 낯빛은 실시간으로 푸르죽죽하게 변해 갔다.
“외우지 못할 얘기는 아니겠지?”
“그렇… 습니다.”
“장관님께 잘 전해드릴 수 있겠지? 내 의도를 정확히 살려서 말이야.”
“예…….”
“좋아.”
심혁진이 웃으며 손을 뗐다.
백영민은 붙들렸던 어깨 부위를 조심스레 주무르며 한숨을 토했다.
“그럼 잘 좀 부탁하지. 그리고 다신 내 주변에 얼씬대지 마.”
“…….”
“잘 가라고. 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할 말을 마친 심혁진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백영민은 욱신대는 어깨를 움켜쥔 채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 * *
사무실로 돌아오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구석에 마련된 응접용 테이블에 차수린과 또 다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들어서는 길에 유달리 이목을 끄는 고급 외제차가 놓여 있었다.
사내의 외관을 보자마자 차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차수린과 마주 보며 앉아 있던 사내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려던 심혁진이 말끝을 흐렸다.
차수린이 눈짓으로 그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뭔가 싶어서 가만히 있자니 그녀가 대꾸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네요, 김 사장님.”
“글쎄요. 김창준을 납치, 감금, 폭행한 남성의 인상착의가 저분과 상당히 흡사한데요.”
“김창준이 그럽디까? 자기가 납치, 감금, 폭행을 당했다고?”
심혁진이 대놓고 묻자 차수린이 한숨을 쉬었다.
부티 나는 사내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당신이 했습니까?”
“김창준을 만난 적은 있지. 납치한 적도, 감금한 적도 없지만.”
“폭행한 적은 있단 말씀이군요?”
“내가 걔를 폭행했으면.”
심혁진은 빙긋 웃었다.
“지구상에 김창준이란 인간의 흔적 하나 남지 않았을 거요.”
“…….”
“그만하세요, 혁진 씨. 김태성 사장님도 적당히 하시죠. 저희는 사과를 해야 할 입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입니다.”
차수린이 중재에 나서자 사내, 김태성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과라. 우리가 CS에 뭔가 잘못이라도 했다는 투로군요.”
“그럼 아닌가요? 대놓고 이중계약을 맺었는데.”
“그야 김창준 측에서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시네요. 설령 그 말씀대로라 해도 사전에 꼼꼼히 확인을 하셨어야죠.”
김태성은 슬쩍 상체를 뒤로 당겼다.
“김창준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자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상담치료사를 보내고 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난리도 아니라더군요.”
“애석하게도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네요.”
“투자 가치를 지녔던 헌터 하나가 그대로 망가졌습니다. 뭐, 기껏해야 B급에 지나지 않지만. 어쨌든 잘만 키우면 짭짤하게 벌어다 줄 재목이었는데 말이지요.”
“…….”
차수린의 얼굴에 강한 반감이 드러났다.
김창준은 망할 놈이었지만 어찌 됐든 CS의 간판.
그를 헐뜯는 것은 결국 CS를 돌려서 비하하는 것과 같았다.
김태성의 의도도 그것일 테고.
“저 치가 태성 매니지먼트인가 하는 곳 사장입니까?”
“……그래요.”
태연히 묻는 심혁진과 한숨 쉬며 대답하는 차수린.
김태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사장끼리 얘기하는 것 안 보입니까?”
“잘 보이는데.”
심혁진이 담담히 대꾸했다.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