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혈룡전 1권 (13화)
4장 신위를 드러내다 (3)


“이자는 대체…….”
초진도는 물론, 임덕화와 홍천상까지도 놀란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진운룡은 누가 봐도 한눈에 확 뜨이는 외모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그동안 그가 소진혁 일행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진운룡이 은신의 귀재이거나 존재감을 감출 수 있을 정도의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홍천상은 첫 번째 경우일 것이라 확신했다.
본래 도둑에게 은신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진운룡이 하오문도라 여긴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절정을 넘어선 홍천상의 이목까지 속이다니, 결코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반면 초진도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운룡을 노려봤다.
‘놈이 자객이구나!’
그제야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대체 하오문에 어찌 저런 자가!’
진화와 왕호를 죽이고 정보를 얻어낸 자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어젯밤 일을 감안해 볼 때 상대는 상당한 실력을 가진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개입된 이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기관을 발동할 준비를 하고, 무사들을 대기시켜라!
초진도는 즉시 공탁에게 전음을 날렸다.
진운룡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석실 왼쪽을 향해 걸어갔다.
진운룡이 멈춰 선 곳을 확인한 초진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멈춘 곳은 바로 비밀통로의 출구가 있던 자리였던 것이다.
“지금 뭐하는 것인가? 그대는 또 누구인가?”
임덕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진운룡은 임덕화의 질문을 무시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밀통로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범인들은 진천뢰를 사용했소. 진천뢰는 함부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건,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만일 이곳에서 진천뢰가 터진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면 초가장은 어떤 변명을 할 것이오?”
“진천뢰?”
홍천상이 의문이 담긴 얼굴로 초진도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전처럼 여유롭지 않았다.
만일 진운룡의 말대로 진천뢰의 흔적이 발견된다면 초가장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천뢰를 얻은 경로며, 사용 목적, 사용 후 은폐한 사실까지…… 초진도는 모두 해명해야 할 것이다.
초진도는 진운룡을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폭발 후 흙으로 덮은 상태라 진천뢰의 파편은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정하고 파낸다면 발견해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초진도가 공탁과 눈빛을 교환했다.
“쯧쯧. 우선 진천뢰가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그때 임덕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까지 하오문의 주장은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었다.
그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여겼다.
“좋소, 지금부터 그것을 증명하겠소.”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본 진운룡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진천뢰나 벽력탄 같은 물건에 들어 있는 화약이 폭발하게 되면 특별한 찌꺼기가 남게 되는데, 그 찌꺼기는 특이한 성질을 하나 가지고 있소.”
진운룡이 자신의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은을 검게 탈색시키는 성질이오.”
진운룡의 손에 들린 것은 한 냥짜리 은자였다.
“물을 좀 가져다주시오.”
진운룡이 홍천상을 보며 말했다.
“물을 가져와라.”
홍천상은 즉시 수하를 시켜 물을 가져오도록 했다.
명을 받은 제검문 무사가 급히 달려가 대접에 물을 담아 왔다.
물 대접을 전달받은 진운룡은 허리에 찬 검을 검집 채 빼 들어 자신이 서 있는 발 밑쪽 바닥에 깊이 박아 넣었다.
홍천상과 임덕화, 소은설 일행은 갑작스런 진운룡의 행동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왜 갑자기 땅에 검을 박아 넣는단 말인가.
그것도 검집 채로 말이다.
스으윽!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운룡이 마치 두부를 자르듯 바닥을 둥글게 잘라 낸 것이다. 삽이나 곡괭이를 이용한 것도 아니고, 검을 이용해 삼 척 정도의 깊이로 땅바닥을 잘라 낸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구나!’
그 모습에 초진도는 더욱 진운룡을 경계하게 되었다.
퉁!
둥글게 바닥을 자른 진운룡이 검을 가볍게 튕기자 원통 모양의 두터운 흙덩이가 위로 솟아올랐다가 한쪽 구석으로 떨어져 부서졌다.
마치 공깃돌을 가지고 놀듯 무거운 흙덩이를 다루는 모습에 지켜보는 이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흙덩이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느새 깊이가 삼 척에 달하는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진운룡은 구덩이 밑에서 흙을 한 움큼 집어 대접에 넣었다.
그가 이토록 번거로운 일을 벌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위쪽의 흙은 진천뢰를 이용해 비밀통로를 무너뜨린 초진도가 새로 덮은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진천뢰의 파편이나 폭발 후의 잔류물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잔류물이 남아 있을 흙을 얻기 위해 새로 덮은 흙을 들어낸 것이다.
진운룡은 손에 들고 있던 은자를 흙이 섞인 물 속에 담갔다.
모두의 시선이 대접으로 향했다.
소은설과 소진혁, 용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진운룡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만일 은자의 색깔이 검게 착색된다면 이곳에서 화약이 폭발했다는 증거였다.
그리되면 이곳 바닥을 샅샅이 수색해 진천뢰의 파편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아니,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진운룡이 조심스럽게 은자를 대접에서 꺼냈다.
“변했군!”
홍천상이 놀라 소리쳤다.
“이럴 수가!”
임덕화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은자와 초진도를 번갈아 쳐다봤다.
초진도의 안색은 더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결국,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까지 다다른 것이다.
“어디, 마땅한 변명을 해 보시오!”
소진혁이 날이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초 장주. 이것이 어찌 된 일이오? 확실한 해명을 해야 할 거요”.
홍천상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의 손은 당장에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검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초진도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변명을 한다 해도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어차피 진천뢰 파편이 발견되면 더는 발뺌하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눈을 뜸과 동시에 초진도의 표정이 변했다.
그에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쯧쯧! 모른 채 있었으면 목숨은 부지했을 것을…… 네놈들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진정 네놈이 범인이었구나!”
챙!
홍천상이 검을 뽑아 초진도에게 겨눴다.
“초, 초 장주, 대체!”
갑작스럽게 변한 초진도의 태도에 임덕화가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머뭇거렸다.
“기관을 발동하라!”
공탁에게 명령을 내린 초진도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구구구구궁!
기관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순간 천장으로부터 철창(鐵窓)들이 내려왔다.
철컹! 철컹!
철창들은 순식간에 하오문과 제검문 일행을 가로막았다.
“크아악!”
“아악!”
철창이 내려온 곳에 위치해 있던 무사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깔려 목숨을 잃었다.
소은설 일행과 제검문 무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우왕좌왕했다.
“엇!”
“초 장주! 뭐하는 짓이오!”
임덕화가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초진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궁사들은 준비하라!”
석궁을 든 무사들이 지하 계단으로 몰려 들어와 일렬로 섰다.
기관 장치를 이용해 발사하는 석궁은 그 속도가 빠르고 파괴력이 커서 어지간한 무인들도 막기가 쉽지 않았다.
제검문 무사들이라면 몰라도 소진혁과 소은설, 용태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공격이었다.
“이대로 우리를 죽이게 되면 제검문은 물론, 무림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홍천상이 위협에 초진도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네놈들을 살려 둬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모두 죽여 대비할 시간이라도 버는 편이 낫단 말이지.”
조사단과 하오문도들을 모두 죽이면 당분간 이 사실이 전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이면 충분히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도주할 수 있었다.
“더러운 돼지새끼!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천벌을 받을 것이다!”
소진혁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쳤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인 거요!”
홍천상의 물음에 초진도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흥! 곧 죽을 놈들이 그것을 알아 무엇하랴. 그냥 뒈져라!”
초진도가 손을 들어 올리자 궁사들이 석궁을 겨눴다.
모두의 얼굴에 두려움이 일었다.
“공자님! 제 뒤로 오십시오! 최대한 급소를 보호해라!”
수하들에게 명을 내린 홍천상이 임덕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홍천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임덕화의 안위였다.
임덕화는 이미 반쯤 얼이 빠진 상태였다.
믿었던 초진도가 화재사건의 범인이란 사실에 망연자실한 것이다.
“누, 누님 우리는 어떡하죠?”
용태가 겁먹은 얼굴로 소은설을 쳐다봤다.
“이봐요, 가만히만 있을 건가요? 무슨 수라도 써 봐요!”
소은설이 조바심이 담긴 목소리로 진운룡에게 말했다.
하지만 진운룡은 느긋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이렇게 된 이상 당신도 어쩔 수 없겠죠.”
진운룡이 고수라고 해도 철창에 갇힌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체념한 소은설이 두려움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대로 아버지를 찾지도 못한 채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고 허탈했다.
초진도의 잔인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