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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12화)
4장 신위를 드러내다 (2)


순간,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홍천상의 표정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소진혁이 초가장까지 직접 달려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그에 대한 증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제녕 제일의 위세를 자랑하고 있는 초가장을 함부로 건들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소진혁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척 심각한 일이었다.
범인의 소굴에 들어와 조사를 했으니, 그동안 조사단이 얻은 정보나 조사 계획들이 모두 새어 나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당연히 그로 인해 초가장에서는 자신들의 범행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제검문은 범인의 손에 놀아난 꼴이니 비난을 면키 어려울 터. 게다가 책임자인 임덕화는 초가장주가 마련해 준 여흥을 즐기느라 조사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가.
만일 정말로 초가장이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면, 지금이라도 범인을 잡아 그동안의 과오들을 만회해야 했다.
“하하하하! 참으로 재밌소이다. 우리 초가장이 황포의원 화재사건의 범인이라니, 그대들은 지금 나와 농담이라도 하자는 것이오?”
초진도가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소진혁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엔 여유가 넘쳐났다.
“하오문의 정보란 게 저렇소이다. 개방이나 다른 정보단체와는 다르게 정보의 신빙성이 떨어지지요. 그 정보를 가져오는 자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아니오? 하하하하!”
초진도의 말에 임덕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근거로 초가장을 범인이라 여기는 것인가? 만일 근거도 없이 음해한 것이라면 그에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일세!”
임덕화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호통 쳤다.
“당연히 증명할 수 있소! 우선 여기 내 질녀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이틀 전 초가장 무사들이 백 구가 넘는 시신들을 몰래 호수로 운반했소이다. 그 많은 시신들이 갑자기 어디에서 생겨났으며, 또 왜 한밤중에 은밀히 운반했겠소? 화재 사건 때 사라진 환자들이 분명하오! 게다가 초가장 무사들은 사실이 발각되자 내 조카아이를 살인멸구하려 했소. 그것이야말로 범행을 은폐하려는 행위가 아니면 무엇이겠소?”
소진혁의 이야기에 초진도는 코웃음을 쳤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대체 우리 무사들이 무슨 시신을 옮겼다는 것인가? 그대의 조카라면 실종 된 분타주의 어린 딸을 말하는 것 같은데, 도둑의 딸이면 역시 도둑이 아니던가? 겨우 그 아이의 말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겐가?”
“흥! 우리 아버지는 비록 도둑이었지만, 항상 도리를 지켜 왔어요! 그것은 이 제녕 땅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에요!”
아버지를 욕하자 참지 못한 소은설이 나섰다.
소은설의 아버지 소진태는 도둑이라기보다는 의적에 가까웠다.
소진태는 탐관오리들이나 부정하게 재물을 모은 자들의 집을 털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줬다.
그로 인해 제녕 근방의 무인들과 백성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쯧쯧, 의적이니 뭐니 해도 결국엔 남의 재물을 노리는 도적이 아닌가? 뭐 그건 제쳐 놓는다 하더라도 그대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초진도의 입가에는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은설은 이를 갈며 초진도를 노려봤다.
“어차피 우리도 초 장주가 부인할 것이라 생각했소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도 부인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소!”
소진혁의 자신감 있는 모습에 초진도는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다.
어젯밤 일어났던 자객의 침입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증명할 방법을 말해 보시오.”
홍천상이 나서자 그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허허!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하군.”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한 채 초진도가 말했다.
잠깐 동안 진운룡과 눈빛을 교환한 소진혁이 입을 열었다.
“화재 사건의 범인들이 지하 비밀통로를 통해 환자들을 빼냈다는 사실은 다들 알 것이오.”
모두의 시선이 소진혁에게로 쏠렸다.
“나는! 그 통로의 출구가 초가장으로 이어졌다 확신하오!”
초진도의 표정이 굳었다.
비밀통로는 이미 매몰시켜 흔적을 없앴다.
소진혁이 그 반대쪽 출구가 어디로 이어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데, 저토록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넘겨짚은 것인가?’
소은설의 말을 듣고 초가장이 범인이라 생각했다면, 비밀통로의 다른 한쪽이 초가장 내부로 연결됐다고 유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증명할 방법도 없이 저토록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혹시,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말인가?’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금원각 지하에 있는 출구를 직접 와 보지 않고 어찌 안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출구는 대리석으로 덮어 버린 상태였다.
‘가만!’
초진도는 갑자기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만일 어제 침입했던 자객이 놈들과 관계가 있다면!’
그가 진화나 왕호에게서 정보를 빼냈을 수도 있었다.
진화의 시체는 이빨이 모두 빠진 상태였다.
즉, 독단을 깨물어 자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초진도는 마음을 가라앉힌 채 소진혁을 바라봤다. 소진혁의 두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분명 관계가 있군!’
초진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증명할 수 있소?”
그때, 홍천상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허, 부대주께선 어찌 저런 자들의 말에 휘둘리는 것이오. 보나마나 또 근거도 없이 떠들어 대는 게 분명하오!”
임덕화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 이것은 결코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오문에서 문제를 제기한 이상 조사단에서는 최소한 그것을 검증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저들의 말을 허투루 넘겼다가 나중에 사실로 밝혀진다면, 공자님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이번 조사단을 맡은 제검문 전체에 불똥이 튀게 될 것입니다.”
홍천상의 태도가 워낙 엄중하자 임덕화도 더 이상 초진도의 편을 들 수만은 없었다.
“흥! 좋소. 그렇다면 그대들의 말을 증명해 보시오. 만일 제대로 증명하지 못할 경우 무림맹 조사단을 우롱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바로 금원각 지하에 비밀통로의 출구가 있습니다. 물론, 초가장에서 이미 손을 썼겠지만, 아직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소진혁이 말했다.
초진도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역시 예상대로 출구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침착해야 해! 이미 모두 매몰시켜 버렸고, 그마저도 대리석으로 덮어 버린 상태라 놈들이 발견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야!’
초진도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소진혁의 말을 본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허, 어이가 없구만. 더는 괜한 오해를 받기는 싫으니 직접 확인시켜 주도록 하지. 하지만 임 공자가 말했듯이 사실이 아닐 경우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네!”

초진도가 눈짓을 하자 공탁이 제검문과 하오문 일행을 금원각 지하로 안내했다.
“모두 따라오시지요.”
초진도가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자 소진혁은 은근히 불안해졌다.
‘정말 확실한 거겠지? 저 청년의 말만 믿고 왔는데…….’
흘끗 진운룡을 쳐다봤다.
진운룡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 너무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래, 확실치 않다면 저리 여유로울 수 없지!’
침을 꿀꺽 삼킨 소진혁이 마음을 다잡았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건가?”
금원각 지하에 도착하자마자 초진도가 보라는 듯이 바닥을 가리켰다.
진운룡은 석실을 구석구석 찬찬히 훑어봤다.
‘진화의 기억 속에 있던 곳이 저곳인가?’
진운룡의 시선이 멈춘 곳은 진화의 기억 속에 출구가 있던 위치였다.
바닥은 이미 모두 대리석으로 덮여 아무런 흔적도 없는 상태였다.
초진도가 바보가 아닌 이상 흔적을 없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흥! 대리석을 모두 들어내 보시오.”
소진혁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너무 지나치군! 지금 남의 집 장원을 맘대로 파헤치겠다는 건가?”
초진도가 소진혁을 노려봤다.
“뭐 거리낄 것이라도 있소?”
소진혁이 지지 않고 맞섰다.
“초 장주, 죄송하지만, 의심을 벗기 위해서라도 바닥을 뜯어내야 할 것 같소. 만일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한다면, 결국에 장주님의 결백이 증명되지 않겠소?”
홍천상까지 나서서 부탁하자 초진도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 들어내도록 하지. 그대들은 이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
초진도가 살기 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으름장을 놓았다.
‘어차피 현재 출구는 폭발시킨 후 흙으로 매운 상태라 대리석을 들어낸다 해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초진도는 이 일이 끝나면 소진혁과 소은설을 반드시 제거하겠다고 다짐했다.
“대리석을 들어내라!”
초진도의 명에 무사들 삼십여 명이 동원되어 바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지하 공간은 백 평 가까이 되었기에 바닥을 모두 들어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리석을 모두 들춰내는 데에만 이각이 넘게 걸렸다.
결국 대리석을 모두 걷어 내고 드디어 바닥이 드러났다.
모두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홍천상은 소진혁이 말한 출구의 흔적을 찾기 위해 드러난 흙바닥을 구석구석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출구는커녕 그 비슷한 흔적조차 없었다.
“흠…….”
홍천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으로는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었다.
결국, 소진혁과 하오문이 근거도 없이 초가장을 음해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 그대가 말한 출구의 흔적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초진도가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거짓으로 초가장을 모욕하고 조사단에 혼란을 준 죗값은 어떻게 치룰 것인가?”
늘어진 볼 살을 실룩거리며 초진도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진혁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는 이미 예측한 대로였다.
소진혁의 시선이 진운룡에게 향했다.
“이제부터 자네 차례일세.”
살짝 고개를 끄덕인 진운룡이 소은설을 한 번 바라본 후 앞으로 나섰다.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진운룡에게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