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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9화)
3장 초가장 (1)


삼경이 넘은 초가장 동편 담벼락 위로 한 마리 야조(夜鳥)가 내려앉았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넘나들며 초가장 전각들 사이를 이동하던 야조가 훌쩍 뛰어오르더니 초가장주의 집무실이 있는 금원각 꼭대기에 올라섰다.
경비를 서는 호위들이나 순찰을 도는 경비무사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장주가 머문다는 금원각이 이곳인가?”
무려 칠층에 이르는 금원각 지붕위에 걸터앉은 그림자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림자는 바로 진운룡이었다.
소은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초가장에 잠입한 것이다.
그가 전각들을 여기저기 훑으며 초가장을 들쑤시고 다녔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귀찮게 여기저기 뒤지느니, 알 만한 놈을 잡는 게 훨씬 쉽지.”
예전부터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었던 그였다.
진운룡은 우선 기감을 끌어올려 장주 집무실 안쪽을 살폈다.
초가장주인 듯한 인물이 안쪽에 홀로 있었고, 집무실 주변으로 매복해 있는 다섯 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도 비밀 호위들 쯤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진운룡이 머무는 지붕 바로 아래쪽에서 은신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머리 위에 진운룡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호오……. 결코 평범한 상인은 아니군.”
장주 집무실을 살피던 진운룡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초가장주로 짐작되는 자의 공력이 오히려 초가장의 무사들을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껴지는 공력의 양으로 짐작할 때 이미 절정은 넘어선 듯했다.
일반적인 상인이라고 보기엔 너무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의심스럽긴 하군. 어디 놈을 잡아서 족쳐 볼까?’
만일 소은설의 말대로 초가장이 이번 사건에 개입되어 있다면, 초진도가 모든 것을 총괄했을 가능성이 높다.
초진도를 잡아 족친다면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것은 물론, 증거를 얻는 일도 모두 단숨에 해결될 것이다.
스슷!
순간 금원각 지붕 위에 있던 진운룡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스스스스슷!
터터터터턱!
동시에 지붕 바로 아래 은밀한 공간에 매복해 있던 다섯 명의 호위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진운룡이 어느새 그들의 혈도를 짚은 것이다.
그의 신형은 이미 장주 집무실 창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단지 숨 한 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에 다섯 호위를 행동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운룡은 열린 창문으로 초진도를 바라봤다.
적어도 삼백 근은 족히 나갈 듯 보이는 비대한 몸집, 가늘고 간사해 보이는 두 눈, 축 늘어진 볼 살까지 척 봐도 돈 많고 욕심 많은 상인의 모습이었다.
초진도는 진운룡이 창문 밖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장부를 살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 네놈의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볼까?’
초진도를 잡기 위해 막 몸을 움직이려던 진운룡이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우뚝 멈춰 섰다.
‘아니지……. 놈은 그 아이의 몫이지…….’
갑자기 자신에게 애원하던 소은설의 간절한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라도 초진도가 소진태를 죽였다면, 그에 대한 복수를 할 자격이 있는 이는 오직 소은설뿐이니까.
자신의 역할은 그저 그것이 가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
“그렇다면, 다른 놈을 잡아야겠군.”
일단은 사건에 대해 알 만한 자를 색출해 내야 했다.
사건을 직접 지휘하고 계획에 참여한 핵심 인물들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무공이 높은 놈들을 찾으면 되겠군.”
물론, 수뇌 급 인물이라고 모두 무공이 높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무공이 높은 자들은 그에 맞는 지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디 조금 놀아 볼까?”
화아아아아악!
진운룡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는가 싶더니 그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기파가 퍼져 나갔다. 기파는 계속 퍼져 나가 초가장 전체를 뒤덮었다.
진운룡은 눈을 감고 기감을 끌어 올렸다.
기파가 지나가는 곳의 반응들이 그대로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잠에서 깨거나 방을 나서는 인물들이 그의 감각에 잡혔다.
초진도 다음으로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장원 북서쪽에 하나, 동쪽에 둘, 북동쪽 전각에 하나 해서 모두 네 명이었다.
네 명이 거의 비슷한 공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북서쪽은 제외했다.
소진혁과 함께 있던 홍천상과 기운이 흡사했기 때문이다.
‘두 놈이 있는 동쪽 전각이 좋겠군.’
최소한 두 사람 중 하나는 이번 사건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운룡은 즉시 동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방금 그 기운은 뭐지? 자네도 느꼈나?”
호위단 부단주 왕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진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주 미미했지만,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기운 말씀이십니까? 저는 잘…….”
왕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회를 바라봤다.
“음……. 내가 잘못 느낀 것인가?”
진회 역시도 확실하게 느낀 것은 아니었기에 뭐라 말하기가 애매했다.
그래도 왠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주변에 무슨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조사해 보도록 하게.”
진회는 만약을 대비해 수하들에게 근처를 살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왕호가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덜컥!
방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려고?”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바로 진운룡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누구냐!”
“침입자다! 게 아무도 없느냐!”
왕호와 진호가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 아이들을 찾으시나?”
진운룡이 문에서 비켜나자 바깥 풍경이 드러났다.
“허억!”
진화와 왕호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헛바람을 토해 냈다.
문밖에는 이미 경비를 서던 열 명의 무사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진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하들이 모두 쓰러지는 동안 그 어떠한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밤에는 소리가 더 멀리 퍼져 나가기 마련인데, 방금 자신의 고함 소리를 듣고도 장원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그것은 곧 둘 중의 하나를 말했다.
진운룡이 장원의 다른 무사들을 모두 죽였든가, 아니면 자신들의 소리를 차단할 정도의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진운룡은 감히 진화나 왕호가 감당할 수 없는 자였다.
진화는 왕호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정면 대결을 해 봐야 개죽음.
차라리 신호를 보내 침입자가 있음을 알리고 무사들을 불러 모아야 했다.
진화의 뜻을 눈치챈 왕호가 주춤주춤 책상을 향해 물러섰다.
책상 아래쪽에 잡아당기면 비상용 폭죽을 쏘아 올리는 줄이 숨겨져 있었다.
“대, 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이요!”
진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운룡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려 왕호의 행동을 숨기려는 것이다.
피슛!
“크악!”
하지만 그의 의도는 진운룡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파공성과 함께 막 책상에 달린 끈을 잡아당기려던 왕호가 손목을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은 손목 부근부터 뎅강 잘려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장난 칠 생각은 마라. 내가 좀 성질이 더럽거든.”
진운룡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오른손 검지는 정확히 왕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풍(指風)을 날려 왕호의 손목을 자른 것이다.
꿀꺽!
진화는 너무도 놀라 말도 잊은 채 석상처럼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단지 지풍 만으로 사람의 손목을 잘라 냈다.
더욱이 진운룡이 어떻게 지풍을 쏘았는지 보지도 못했다.
‘괴, 괴물!’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진운룡이 결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그때, 진운룡의 몸으로부터 사위를 찍어 누르는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크윽!”
쿵!
진화는 어마어마한 압력을 버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장이 진탕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방을 가득 채웠다.
손목이 잘린 왕호는 충격과 출혈로 인해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진운룡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몇 가지 물을 것이 있다. 대답 여부에 따라 너희가 사느냐 죽느냐가 달려 있다. 물론, 쓸데없는 충성심으로 죽음을 택한다 해도 좋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오랜만에 실컷 피 맛을 보게 되겠지.”
살벌한 내용과는 다르게 너무도 차분한 진운룡의 목소리에 진화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너무도 평범한 협박이었으나, 진운룡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것은 절대적인 공포가 되었다.
극한의 두려움에 의해 사지가 그 끝에서부터 차츰 얼어붙어서 결국 눈꺼풀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포식자의 그것처럼 번들거리는 진운룡의 두 눈이 진화를 향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
씨익!
진운룡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순간, 굳어 버렸던 진화의 몸이 조금 풀렸다.
“차, 차라리 주, 죽여라…….”
따닥거리며 떨리는 턱을 간신히 움직이며 진화가 저항했다.
진운룡이 두렵긴 했지만, 자신이 속한 곳은 더욱 무서운 곳이었다.
진운룡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진화는 분명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곳을 거역하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 친구, 그와 관계된 모든 이들이 죽게 될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가족이라도 살리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진화에게는 아직 어금니에 숨겨 놓은 독단이 있었다. 진운룡이 미처 고문을 하기 전에 자결을 할 생각이었다.
결심을 한 진화가 막 독단을 깨물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분명 경고했었는데!”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진운룡의 눈동자가 노랗게 변했다.
우우우우웅!
동시에 진화는 마치 자신의 혼이 진운룡의 두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더니, 두개골이 깨져 나갈 듯 극심한 통증이 진화의 뇌를 들쑤셨다.
“으어어어어…….”
곧이어 진화의 의지와는 다르게 턱이 제멋대로 열려 침이 흘러나왔다.
우드득!
피슈슛!
“우어어어…….”
그리고 진화의 이빨들이 하나둘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진화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피슈슈슛!
생니가 통째로 뽑혀 나간 잇몸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뭐, 나야 고맙지만 말이지…….”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은 진운룡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화의 입에서 흘러나온 핏물들이 허공을 부유해 진운룡에게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핏물들은 꿈틀거리며 진운룡을 향해 움직였다.
츠츠츠츠!
핏물들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진운룡에게 빨려 들어갔다.
“어허헉…….”
진화는 눈을 거꾸로 뒤집은 채 경련하고 있었다.
덜덜덜!
진화의 피를 흡수한 진운룡의 눈은 노란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핏빛으로 변했다.
진화의 경련이 심해질수록 진운룡의 입가에 머무는 미소 역시 점점 더 짙어졌고, 그의 얼굴에는 실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이를 드러낸 채 괴소(怪笑)를 흘리는 진운룡의 모습은 마치 악귀를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