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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8화)
2장 세상으로 나가다 (4)


현재 초가장은 제녕에서 가장 강력한 실세였다.
그런 곳을 의심하고 조사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의문을 제기했다가 자칫 눈 밖에라도 나면 더 이상 제녕 땅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 소진태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조사를 진행한 것이 분명했다.
확실한 증거를 잡기까지는 혼자 조사하는 편이 초가장의 이목도 속이기 쉽고, 그만큼 위험도도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혹여 주변 사람들이 말려들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 며칠 네가 밤마다 없어졌던 것이냐?”
“네, 아버지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동안 초가장을 감시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즉에 내게 말을 해야지. 너 혼자 초가장을 감시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게냐?”
소진혁이 혀를 차며 소은설을 꾸짖었다.
자칫 초가장 무사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소은설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저도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숙부께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았어요.”
소진혁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그럼 내게 왔다는 것은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단 말이냐?”
상기된 목소리로 소진혁이 물었다.
“네!”
소은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사실 어젯밤 제가 사라졌던 것과 관계가 있어요.”
소은설은 어젯밤 자신이 겪었던 일을 상세히 소진혁에게 설명했다.
시체들을 목격하고 초가장 무사들에게 쫓겨 혈귀곡에 들어간 일. 그리고 탈출해서 여기까지 온 일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뭐! 혈귀곡에 들어갔다고?”
소진혁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에이! 농도 정도껏 해라. 혈귀곡이 어떤 곳인데, 그곳에 들어가고도 살아 나왔다는 것을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소진혁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대금지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겠는가.
이제껏 혈귀곡에 들어갔다 살아 나온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한데, 자신의 조카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사실이에요! 초가장 무사들도 제가 혈귀곡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니까요? 그리고 이 사람도 혈귀곡에서 저랑 함께 탈출했다구요.”
소은설이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 친구도 혈귀곡에 있었단 말이냐?”
아직도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소진혁이 물었다.
“네. 그는 혈귀곡에 남아 있던 유일한 생존자예요.”
“허…….”
소진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초가장 무사들이 시체를 배로 날랐다는 이야기보다도 혈귀곡에 들어갔다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욱 충격이었다.
중원 사대금지 중 하나가 깨진 것이다.
자신 앞에 그것을 증명하는 이가 둘이나 버티고 앉아 있으니 아니, 믿을 수도 없었다.
만일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여기저기서 난리가 날 것이다.
“허……. 초가장 무사들도 네가 혈귀곡에 들어간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지?”
“네.”
이대로 소은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들 역시 귀신을 본 듯 놀랄 것이다.
“그럼 어차피 숨길 수도 없을 것 같고…….”
소진혁은 어쩐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초가장에 대한 사실을 어떻게 세상에 알릴 지부터 생각해 봐야겠구나.”
조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니 초가장이 황포의원 화재를 일으킨 범인임은 확실했다.
한데 문제는 소은설의 증언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초가장에서 발뺌을 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증거 없이는 놈들을 엮을 수 없다. 먼저 증거를 잡아야 해.”
소진혁의 말에 소은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너는 몸을 숨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초가장에서 소은설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거참 쓸데없이 생각들이 많군.”
그때 심드렁한 목소리로 진운룡이 중얼거렸다.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내뱉은 말이었으나, 소은설과 소진혁의 귀에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커험, 험…….”
소진혁의 작은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거 아까부터 젊은 사람이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구만!”
“내가 워낙에 동안이라 그렇지, 보기보다 나이가 많소만.”
진운룡의 뻔뻔한 대답에 소진혁이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 그래? 대체 몇 살인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소진혁이 물었다.
“글쎄……. 백 살이 넘은 뒤로는 세어 본 적이 없어서…….”
진운룡이 미간을 찡그리며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듯 생각에 잠겼다.
혈귀곡에 있은 지 이미 백삼십 년이 지났고, 혈귀곡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백 살이 넘었던 그였다.
굳이 나이를 계산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소진혁은 물론 소은설까지도 똥 씹은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소진혁은 이제는 아예 허탈한 얼굴로 물었다.
“허허, 그렇다면 자네가 반로환동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맞소만.”
진운룡의 대답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소진혁과 소은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소은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동안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많았다.
최근 십 년 가까이 혈귀곡에서 실종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미 혈귀곡의 악명을 모르는 이가 없었기에 그 누구도 혈귀곡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운룡은 최소한 그 안에 십 년 넘게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나이는 많아야 스무 살로 보였는데, 그것은 곧 그가 적어도 열 살 이전에 혈귀곡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열 살 꼬마가 들어가서 살아남을 정도로 녹녹한 곳이었다면 혈귀곡이 결코 중원 사대금지로 꼽히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황제가 누군 줄도 모르고, 백 년 전 왕인 건문제를 거론했다.
만일 진운룡이 진정 반로환동의 고수이고 백 살이 넘었다면 이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서, 설마!’
진운룡이 진정 반로환동의 고수라면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은설이 동그래진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한편, 소진혁은 소진혁 대로 뜨끔한 상태였다.
진운룡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왠지 자꾸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노, 농담이겠지?”
소진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을 하려던 진운룡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멈칫했다.
‘이미 백삼십 년이 지난 지금 내 정체를 밝혀 봐야 무슨 소용인가.’
생각해 보니 자신의 나이와 신분을 밝혀 봐야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았다.
오늘처럼 일일이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자신이 백 살이 넘었고, 반로환동 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예전 경험에 의하면 날파리들도 많이 꼬일 것이다.
‘차라리 그냥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게 편하겠군.’
얼른 마음을 바꾼 진운룡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농담이오.”
“이, 이 사람이! 정말!”
얼굴이 붉게 상기된 소진혁이 너무 어이가 없어 손가락질만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은설은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에이! 진짜!”
잔뜩 기대했던 마음이 허물어지자 허탈감이 밀려오고 곧 이어 짜증이 솟아올랐다.
“농담할 게 따로 있지! 당신 정말!”
소은설이 막 핏대를 올리며 따지려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초가장이 범인인 것이 확실하다면 무엇 하러 증거를 찾는단 말이오?”
진운룡이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대체 어떤 복안이 있는 겐가?”
여전한 평대에 소진혁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진운룡의 말을 기다렸다.
순간, 진운룡의 입 꼬리가 묘하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시리도록 창백한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보는 이의 등골을 저릿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소은설과 소진혁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멍하니 진운룡을 바라봤다.
닫혀 있던 진운룡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쳐들어가서 모조리 족쳐 버리면 그만 아니겠소?”
잠시 멍하니 있던 소진혁이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진운룡과 소은설을 번갈아 바라봤다.
마치 ‘대체 어디서 이런 미친놈을 데려온 것이냐?’라고 묻는 듯했다.
소은설이 ‘끄응’ 하는 신음을 토해 냈다.
진운룡이 원래 허풍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
“자네는 대체 초가장이 어떤 곳인 줄이나 아는가?”
이제는 반쯤 포기한 소진혁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올시다……. 어차피 그래 봐야 상인이라 들었는데, 뭐 대단할 것이 있겠소?”
뻔뻔한 진운룡의 대답에 소진혁은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보게 그들은 보통 상인들이 아니야! 양주 염상과도 연계가 되어 있다고. 관은 물론 무림에도 연줄을 대고 제녕을 쥐락펴락 하는 자들이란 말이야! 게다가 무력도 어지간한 중소 문파를 능가한단 말일세!”
소진혁이 얼굴을 붉힌 채 열변을 토했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는 듯 진운룡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허…… 참. 젊은 혈기도 좋지만, 지나치면 제명대로 못 사는 법이야.”
소진혁이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차며 진운룡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뭐, 쉬운 길을 마다하고 꼭 증거를 먼저 찾아야겠다면 내가 가져다줄 순 있소.”
툭 내뱉듯 진운룡이 말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소은설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증거를 찾는 일이야 어려울 것이 없지. 초가장을 뒤져 보면 나올 테니.”
소진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진운룡이 또다시 허풍을 친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소은설의 표정은 달랐다.
초가장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리였지만, 진운룡 혼자 초가장에 침투하는 일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이미 혈귀곡에서 기척도 없는 진운룡의 움직임을 직접 겪어 봤던 그녀였다.
그 정도 은밀한 움직임이라면 충분히 초가장에 잠입해서 증거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 것이다.
“정말 증거를 찾아다 주실 건가요?”
소은설이 진지하게 묻자 소진혁이 의아한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설마 저놈 말이 진짜라고 여기는 겐가?’
단지 허풍꾼이라 보기에는 소은설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도와주기로 했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겠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야.”
소은설의 눈동자가 빛났다.
“허……. 너도 덩달아 정신이 나간 게냐? 거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가. 무사들 수만 이백 명이 넘어. 게다가 일류가 넘어선 자들도 수십 명이야. 초가장주가 제 놈 재산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투자를 했는지 알기나 하는 게야? 괜한 객기들 부리지 말고 당분간 자중들 하고 있어!”
결국 듣다 못한 소진혁이 호통을 쳤다.
“도와주세요!”
소진혁의 호통에 아랑곳 않고 소은설이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진운룡은 잠시 소은설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지막 순간 과거의 그녀가 보였던 눈빛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자신의 품에서 죽어 가던 그녀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운 랑. 제발 약속해 줘요…….

간절하던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이 소은설의 얼굴과 교차했다.
‘확실히 닮았어……. 하지만 그녀는 분명 그때 죽었지…….’
진운룡의 두 눈에 잠깐 동안 쓸쓸함이 어렸다 빠르게 사라졌다.
“좋아. 오늘 밤 움직이도록 하지.”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은설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겉으로는 강한 척 하며 씩씩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였지만, 결국 아직 열아홉밖에 안 된 소녀였다.
그만큼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이다.
잠시 울먹이던 소은설이 다시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신의가 있군요! 살려 준 보람이 있네요.”
소은설이 진운룡의 팔을 툭 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순간, 진운룡은 심장이 저릿해 왔다.
소은설의 속눈썹 위로 살짝 묻어 있는 눈물이 마지막 순간 ‘여령’의 감은 눈에 묻어 있던 눈물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두 번 다시 눈을 뜰 수 없었다.
진탕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운룡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에 반해 소은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헤헤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진운룡이 초가장에서 반드시 증거를 발견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초가장이 사건의 범인이란 증거를 발견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아버지를 찾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 지금은 한 가닥 희망의 끈이 생겨난 것이다.
그 끈이 동아줄이 아닌 가느다란 실에 불과하다 해도 소은설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허…… 참.”
뭐라 한 마디 하려던 소진혁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듯 더 이상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