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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10화)
3장 초가장 (2)


“크으……. 더는 한계로군…….”
광기 어린 목소리로 진운룡이 말했다.
여기서 더 피를 흡수하게 된다면 진화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에게 빨려 들어오던 핏줄기가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좋군!”
만족감이 담긴 탄성을 토해 낸 진운룡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광기를 떨칠 수 없어……. 역시 그 아이가 특별한 것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내뱉은 진운룡이 진화를 바라봤다.
“끄으으…….”
아직 의식이 붙어 있는 듯 진화는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인 법이지. 너 같은 놈들은 꼭 피를 봐야 말을 듣는단 말이지. 어디 이제 진실을 알아내 볼까?”
진운룡이 진화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크으으…….”
이미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진화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진운룡은 진화의 머리를 코앞으로 가져와 시선을 맞댔다.
“네놈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자.”
번쩍!
순간, 진운룡의 두 눈에서 황금빛 섬광이 일자, 진화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진화는 멍하니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진운룡은 초점이 사라진 진화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는 지금 제령안이라는 특수한 절기를 시전하고 있었다.
제령안은 상대의 정신을 제압하고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무서운 술법이었다.
물론, 제령안을 사용한다 해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 중 열에 일곱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제령안이 더욱 무서운 점은 이 술법에 당하게 되면 뇌에 충격을 받아 미치거나 백치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가만 있어보자……. 화약, 진천뢰? 진천뢰라…….”
한동안 진화의 기억들을 살피던 진운룡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고 환자들을 운반하기 위해서 진화 등은 비밀통로의 출입구를 초가장 내에 만들었다.
그곳은 바로 금원각 지하였다.
놈들은 비밀통로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진천뢰를 사용한 것이다.
진천뢰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군이 사용하는 무기였기에 일반인은 함부로 소지할 수 없을뿐더러 생산과 운반, 보관 등의 과정이 매우 까다롭게 관리되고 있었다.
물론 관과 결탁을 해 몰래 빼돌리는 방법도 있었으나, 아무리 타락한 관리라 해도 이번 사건 같은 곳에 사용될 것을 알았다면 결코 진천뢰를 넘길 리 없었다.
돈 몇 푼 벌자고 관직과 목숨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해서 초가장이 선택한 방법은 암거래였다.
현재 무림에서 공식적으로 진천뢰를 제작하는 곳은 오로지 사천당가와 벽력문뿐이었다.
그중 사천당가는 정파에 속해 있어서 불법적으로 폭약이나 화탄을 거래하지 않는다. 또한, 거의 문외로 유출하는 경우도 없다.
그러나 관부의 하청을 받아 군에 납품할 화기들을 제작하는 벽력문은 정(正), 사(邪) 중간에 위치한 문파로 암암리에 폭약이나 화탄을 밀거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만 지불한다면 그 사용 용도나 사들이는 이가 누구인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들이 만든 벽력탄이 마교나 사파에게도 흘러 들어가서 정파인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었다.
초가장의 진천뢰는 바로 그들에게서 입수한 것이었다.
‘어쨌든 진천뢰를 사용했다는 증거를 잡으면 놈들의 범행이 밝혀지겠군.’
이미 비밀통로의 출입구는 진천뢰를 이용해 파괴한 상태였지만, 만일 그곳에서 화약을 사용한 흔적을 발견한다면 초진도도 변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혹 초진도가 화재사건의 범인임을 끝까지 부인한다 해도 진천뢰를 암거래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국법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초진도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고, 황포의원의 비밀통로 입구에서도 같은 흔적이 발견된다면 더 이상 발뺌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잠시 더 진화의 머릿속을 살핀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대로 소진태의 실종은 초가장의 짓이었다.
그런데 그를 죽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보낸 듯했다.
그곳에 어디인지, 왜 다른 곳으로 보냈는지는 진화 역시 모르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한계군.”
툭!
진운룡이 이미 정신이 나간 진화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놈에게서는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차피 초진도가 알고 있겠지.”
소은설의 아버지를 데려간 곳이 초가장인 것이 확실해진 이상 나머지는 초진도에게 알아내면 된다.
생각을 정리한 진운룡이 진화와 왕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놈들의 기억을 살펴보니 살려 둘 가치가 없는 놈들이로구나.”
진운룡의 눈빛이 차가와졌다.
실종된 환자들과 의생은 화재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초가장에 도착했을 당시에 환자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그들을 죽인 것은 바로 진화와 그 수하들이었다.
그것도 산채로 심장을 뽑아냈다.
그중에는 여인과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서 어찌 백 명이 넘는 이들의 심장을 도려낸단 말인가.
결코 살려 둬서는 안 될 무리들인 것이다.
퍼퍽!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풍을 날려 두 악적의 이마에 구멍을 낸 진운룡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 * *

“허……. 정말 초가장에 들어갔다 온 것인가?”
양화루로 돌아온 진운룡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진혁이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운룡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난 내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오만?”
소진혁은 진운룡의 평대에 울컥했으나 애써 진정시킨 후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혈귀곡에 갇혀 있던 진운룡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화재 사건 조사나, 소진태의 실종에 관련된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었고 혈귀곡을 나오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쓸데없이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었다.
‘그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허풍이나 떠는 귀하게 자란 도련님일 것이라 여겼는데, 진정한 고수였단 말인가? 하기야 혈귀곡에서 살아남은 자가 절대 평범할 리는 없지…….’
그제야 소은설이 진운룡에게 믿음을 보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던 소은설도 진운룡이 초가장 잠입에 성공했다는 말에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 정말로 증거들을 가지고 온 것인가요?”
“내가 마음먹은 이상 그 정도야 아이들 당과를 뺏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진운룡이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헐…….”
소은설은 온몸에 두 겹으로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한데 가져온 증거는 어디 있죠?”
간신히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힌 소은설이 진운룡에게 물었다.
“그런 건 없어. 증거를 직접 가져온 것이 아니라, 놈들의 짓임을 밝혀낼 방법은 알아 왔거든.”
진운룡은 제령안을 통해 알아낸 사실을 두 사람에게 말해 줬다. 물론, 제령안을 쓴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진화와 왕호를 심문해서 자백을 받아 냈다 했다.
소진혁과 소은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진운룡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직접 초가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면, 오랜 시간 혈귀곡에만 있다 오늘에야 세상에 나온 그가 진화와 왕호의 이름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가장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호위대주를 제압해 정보를 빼내다니.
두 사람은 진운룡의 경지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높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진운룡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두 사람은 크게 분노했다.
“흥, 개 같은 놈들! 사람의 심장을 뽑아내다니! 게다가 진천뢰까지 사용을 했을 줄이야.”
소진혁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욕지기를 토해 냈다.
환자를 돌보는 의원에 화재를 일으킨 것만 해도 용서받지 못할 짓인데, 더욱 잔혹하고 천인공로 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대, 대체 무엇 때문에 심장을 도려낸 걸까요?”
초가장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소은설이 물었다.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산 사람의 심장을 뽑아내다니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글쎄, 그것까지 알아내진 못했어. 놈들은 그저 초진도의 명에 따랐을 뿐이라 그 이유나 목적은 잘 알지 못하더군.”
“호, 혹시 초가장주가 요괴인 것은 아닐까요? 아, 왜! 천, 천 년 묵은 여우나 그런 것들이 사람 간과 심장을 파먹는다는 소리가 있잖아요.”
용태가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요괴보다도 잔인한 놈이지!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콧수염을 실룩거리며 소진혁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수고가 많았네. 이 정도면 무림맹 조사단에 충분히 이야기해 볼 수 있겠군!”
초가장의 악행을 증명할 길이 생긴 이상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물론 초진도나 초가장 쪽에서는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겠지만, 하오문 쪽에서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조사단도 최소한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은 할 것이다.
“하지만 조사단을 믿을 수 있을까요? 초가장이 벌써 매수했을 수도 있어요.”
소은설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누님 말씀이 맞아요! 초가장에서 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죄다 한통속이 틀림없다구요!”
용태 역시 소은설의 의견에 찬동했다.
조사단이 머물고 있는 장소가 초가장이다 보니, 혹시라도 매수되었거나, 애초에 작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긴 것이다.
“아니야. 책임자인 임 공자는 몰라도 홍 부대주는 성격이 워낙에 강직하고 고지식해서 결코 매수되거나 할 사람이 아니다. 분명 우리 말을 무시하지 않을 게야. 만일 초진도가 조사를 거부한다면 스스로 죄를 시인하는 꼴이지.”
홍천상은 연주나 제령 근방에서는 제법 알려진 무인이었다. 그는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초가장의 재물에 현혹되어 그들의 만행을 모른 채 할 리가 없었다.
“저어……. 혹시 아버지에 대한 것은 알아내지 못했나요?”
소은설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잠시 소은설을 바라보던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 듯하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왜 옮긴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소은설의 얼굴에 잠깐 동안 희비가 교차했다.
그녀는 일단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소진태가 죽었을 것이라 여겼던 그녀였다.
초가장이 자신들의 비밀을 알아차린 소진태를 살려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다행히도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또다시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쯧쯧,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초진도에게서 들으면 되니까.”
진운룡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소은설이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아요! 초진도는 아버지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예요!”
미처 그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모든 사건의 원흉인 초진도라면 아버지의 행방과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 희망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좋아! 내일 당장 초가장으로 가서 그 빌어먹을 놈들이 저지른 짓을 세상에 다 까발려 버리자!”
“당연하죠!”
소진도와 용태가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자네. 절대 내일은 내가 신호할 때까지 잠자코 있게. 무림맹 조사단 앞에서도 그렇게 버릇없이 굴었다가는 다 된 일을 망치고 말 게야, 알겠지?”
소진혁이 두 번 세 번 진운룡에게 주의를 줬다.
만일 조사단 앞에서도 평대를 하고 게다가 허세까지 떤다면 소진혁과 소은설의 말이 신빙성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운룡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사람들에 맞춰 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괜한 문제는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 여긴 것이다.
결국, 소진혁과 소은설은 다음 날 일찍 초가장에 쳐들어가서 무림맹 조사단을 만나 모든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소은설은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