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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4화)
1장 혈귀곡 (4)


제녕에서 만큼은 황제와 같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초진도를 상대로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진태는 완벽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 딸인 소은설은 물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신중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실종되었으니, 소은설로서는 당연히 초가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소은설은 지난 며칠 동안 초가장 주변을 감시해 왔다.
그러던 중 어젯밤 드디어 초가장 무사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밤늦게 초가장의 무사들이 다섯 대의 짐수레를 끌고 초가장을 나서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초가장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어찌 보면 평범한 물류의 운반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며칠간 관찰해 왔던 움직임과 비교해 볼 때 규모에 비해 수레를 끄는 인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수레를 끌고 있는 이들이 모두 무인이라는 것도 수상했다.
보통 물품들의 운반은 짐꾼들이나 하인들이 맡아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소은설은 급히 뒤를 따랐다.
그녀는 비록 무공 실력은 변변치 않았지만, 제녕 제일의 도둑으로 꼽히는 아버지 소진태의 영향으로 은신과 신법에 있어서는 제법 뛰어난 편이었기에, 초가장 무사들의 이목을 피해 그들을 미행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들이 향한 곳은 창고나 부두가 아닌 남양호(南陽湖)였다.
만일 일반 화물을 운반하는 것이었다면 창고나 운하로 향했을 것이다. 한데 인적이 드문 호수가로 짐수레를 끌고 간 것이다.
호수가에는 어느새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소은설이 이상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초가장 무사들이 수레에서 배로 옮기려던 것이 바로 시체들이었던 것이다.
족히 백 구는 넘는 시신들이 짐짝처럼 옮겨지는 경악스러운 모습에 소은설은 은신이 깨지고 말았다.
결국, 무사들에게 발각된 그녀는 혈귀곡까지 쫓기게 되었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모든 정황을 볼 때 황포의원의 화재는 물론, 아버지의 실종도 초가장의 짓임이 분명했다.
“아버지…….”
소은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반드시 혈귀곡을 빠져나가 실종된 아버지를 찾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아버지라…….”
진운룡은 소은설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 더는 사정을 묻지 않았다.
“당신은 혹시 이곳을 빠져나가려 시도해 본 적은 있나요?”
그때 소은설이 기대에 찬 얼굴로 진운룡에게 물었다.
진운룡의 말을 들어 보면 그는 이곳에 상당기간 갇혀 있었던 듯싶었다. 그렇다면 혈귀곡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수많은 탈출 시도를 했을 것이니, 이곳의 지형이나 특징에 대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
“없는데?”
진운룡이 왜 빠져나가야 하느냐는 듯 뚱한 얼굴로 말했다.
소은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대답이었다.
소은설은 잠시 어이없는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빠져나갈 생각을 안 했단 말이에요?”
진운룡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
소은설로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어째서죠?”
“별로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필요하면 빠져나갈 수는 있고요?”
소은설이 비꼬듯 말했다.
“훗, 당연하지. 세상 누구도 나를 가둘 수는 없거든.”
진운룡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허풍을 떠는 진운룡의 모습에 소은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역시 사람은 생긴 것만 가지고 판단하면 안 돼.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허세가 몸에 배였네 배였어.’
그랬다면 왜 아직까지 이곳에 갇혀 있다는 말인가.
소은설은 아마도 진운룡이 탈출을 시도하다 잘못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곳에 그냥 남기로 결정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진운룡만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곧 혈귀곡을 빠져나가려 하면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곳에 얌전히 눌러앉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황포의원 화재의 범인이 초가장임을 밝히고, 아버지를 구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해도 나는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그녀는 몸을 돌려 모옥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제 들어온 길만 찾을 수 있다면…….”
소은설은 공터를 세세히 살피며 어젯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의 흔적을 찾았다. 안개 때문에 의식이 몽롱한 상황이었으니 자신이 본 하얀 자갈 길이나 소나무들은 환영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 자신이 모옥까지 오면서 남긴 발자국이나 핏자국은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진운룡은 소은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봤다.
보면 볼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여인과는 너무도 달랐다.
경박스럽고, 멍청하고, 성격은 제멋대로고, 그야말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마치 토끼처럼 커다란 눈망울, 앙증맞은 입술, 한쪽 볼에만 생겨나는 보조개까지 그녀와 너무도 똑같은 소은설의 외모가 그의 마음을 자꾸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소은설이 고개를 숙이며 목 뒷부분이 살짝 드러났다.
‘응?’
진운룡이 놀란 시선이 그녀의 목에 고정되었다.
살짝 드러난 그녀의 목에 자리한 세 개의 삼각형을 이루는 점.
그리고 그는 똑같은 자리의 점을 가지고 있는 여인을 알고 있었다.
‘여령…….’
진운룡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닮았다 해도 어찌 목 뒤의 점까지 똑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
진운룡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 여인은 이미 죽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땅에 묻었다.
하면 자신의 앞에 있는 저 여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때, 소은설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모옥이 있는 공터 오른쪽 숲으로 향했다.
“그곳은 위험해!”
진운룡이 다급히 소은설을 말렸다.
이 공터를 벗어나면 혼원구궁마라진에 휩쓸리게 된다.
갑작스런 진운룡의 외침에 소은설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쪽에는 진이 펼쳐져 있어서 함부로 들어갔다간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어.”
진운룡이 다시 한 번 소은설에게 경고했다.
“에이, 사내가 무슨 겁이 그리 많아요? 여기 이렇게 길이 빤히 있는데.”
진운룡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길이라고?”
“여기 분명 길이 있잖아요! 한 사람 정도 지날 수 있는 길이!”
순간, 진운룡의 신형이 유령처럼 소은설의 옆에 나타났다.
“헉!”
소은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야? 이 사람…….’
벌써 두 번째였다.
산둥 제일의 도둑이라 불리던 자신의 아버지도 이 정도로 기척 없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분명 평범한 자는 아니야.’
소은설의 무공 수준이 낮다 보니 제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 뛰어난 고수임이 분명했다.
‘혹시 이 사람이라면 아버지를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힘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간다 해도 초가장을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었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진운룡이 그의 광오한 말의 반이라도 되는 고수라면 충분히 희망을 걸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은설은 곧바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오늘 처음 본 진운룡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게다가 소은설이 부탁한다 해도 진운룡이 허락을 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우우우우우웅!
순간,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의 파동에 소은설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기의 파동은 진운룡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위압감 보다는 산들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기운이었다.
소은설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기운을 유형화해 발출할 수 있다는 것은 진운룡이 최소한 절정의 경지 이른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역시 허풍만은 아니었어!’
이렇게 되고 보니 어떻게 해서든 진운룡을 끌어들여 아버지를 찾는 데 도움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일었다.
스스스스스!
진운룡의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자 숲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뭐가 있다는 거지?”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운을 퍼뜨려 사방을 훑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은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요! 안 보여요?”
진운룡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은설의 손가락 끝에 시선을 집중했다.
“대체 뭐가 있다는……. 혹시!”
순간 진운룡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천령안(闡靈眼)?!”
상기된 목소리로 진운룡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천령안은 사물의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
기의 흐름은 물론 사물 속에 숨겨진 본색까지 드러나게 하는 특별한 눈이었다.
천령안을 가진 사람은 진법이나 미로의 생문과 사문을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있다.
비급이나 수련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하기에, 천령안을 가진 사람은 백 년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했다.
진운룡이 굳은 얼굴로 소은설을 바라봤다.
만일 소은설이 천령안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정황이 설명된다.
그녀가 혼원구궁마라진(混元九宮魔羅陳)을 뚫고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자신의 기감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길을 찾아낸 것, 두 가지 모두 천령안을 대입해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다.
“너, 대체 누구냐?”
진운룡이 소은설의 어깨를 틀어쥔 채 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진을 설치한 여인 역시 천령안을 가지고 있었다.
똑같은 얼굴, 목 뒤의 점, 거기다 천령안까지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진운룡의 행동에 놀란 소은설이 당황해 소리쳤다.
“무, 무슨 소리예요? 여기 분명히 길이 있는데, 그렇게 겁이 나면 당신은 그냥 여기서 천년만년 살라구요! 나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여기를 빠져나갈 테니!”
소은설은 진운룡이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몸을 휙 돌려 숲으로 들어서는 소은설을 진운룡은 복잡한 얼굴로 바라봤다.
백삼십 년 전 그녀와 너무도 똑같은 여인. 게다가 범인은 가질 수 없는 천령안까지…… 마치 그녀가 환생이라도 한 것 같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들과 자꾸만 그의 마음을 흔드는 묘한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천령안 외에도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 열쇠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여령…….’
고민하던 진운룡의 시선이 모옥 옆 무덤으로 향했다.
“미안……. 더는 그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 하겠군…….”
잠깐 동안 무덤을 바라보던 진운룡이 결심한 듯 소은설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