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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5화)
2장 세상으로 나가다 (1)


“장주님! 진화입니다!”
족히 이백 근은 넘어갈 것 같은 몸뚱이를 뒤룩거리며 장부를 살피던 초진도가 문밖에서 들려온 진화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너라.”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선 진화가 즉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왜 이리 늦은 게냐?”
다소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초진도가 물었다.
일이 일인 만큼 한 치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실은…….”
잠시 망설이던 진화가 말을 이었다.
“도중에 문제가 좀 생겨서…….”
진화가 고개를 조아리며 초진도의 눈치를 살폈다.
초진도의 길게 찢어진 눈에 노기가 어렸다.
“지금 네놈이 나랑 장난이라도 치겠다는 것이냐? 문제라니! 내가 그토록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그 병신 같은 대가리에는 대체 뭐가 들은 게야!”
호통을 치는 초진도의 부풀어 오른 볼이 노화(怒火)로 부들부들 떨렸다.
“고, 고정하십시오. 문제가 있긴 했으나, 이미 다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화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쾅!
“헛소리 말고, 어떻게 된 건지 당장 말해 보거라!”
노기를 풀지 않은 초진도가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 그것이…… 하오문 분타주의 딸년이 우리를 미행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병신 같은 놈들, 젓 비린내 나는 년이 쫓아오는 것도 몰랐단 말이냐?!”
진화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벼루가 날아왔다.
진화는 감히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오는 벼루를 이마에 맞았다.
퍽!
이마가 터져 나가며 피가 튀었지만 진화는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소, 송구합니다! 그 계집년의 은신술이 상당해서…….”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초진도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진화를 벌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당장에 중요한 것은 수습이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그 계집이 시체가 실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다행히 그 계집이 몰래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장 뒤쫓았습니다. 한데, 멍청하게도 계집년이 스스로 혈귀곡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혈귀곡이라고? 확실하냐?”
초진도가 조금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계집이 혈귀곡 다리를 건너 안개에 휩싸이는 것을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초진도의 입가에 조소가 일었다.
혈귀곡에 들어갔다면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후후, 멍청한 년. 그나마 다행이군…….”
“헤헤, 그렇습니다.”
진화가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초진도의 눈치를 살폈다.
“흥! 그렇다고 네놈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웃음을 멈춘 초진도가 매서운 눈초리로 진화를 바라봤다.
“당장 네놈의 목을 쳐야 마땅하지만, 그나마 계집이 처리되었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만일 또다시 실수가 있다면 네놈의 목은 그 더러운 몸뚱어리와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장주.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린 진화가 혹시라도 초진도의 마음이 바뀔 새라 얼른 방을 나섰다.
“흥! 병신 같은 놈…….”
도망치듯 허겁지겁 방을 나서는 진화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초진도가 한 차례 욕지기를 토해 내곤 다시 장부로 눈을 돌렸다.

* * *

“흥! 결국엔 따라올 거면서, 괜한 자존심은……. 여기서 나가게 되면 다 내 덕인 줄 알라구요!”
소은설이 힐끔 뒤를 돌아보곤 코웃음을 쳤다.
위험하다느니, 천령안이라느니 하면서 갑자기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던 진운룡이 결국 자신의 뒤를 쫓아왔던 것이다.
소은설의 핀잔에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처음 생각대로 어느 정도 허세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흥!”
다시 한 번 콧방귀를 뀐 소은설이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혈귀곡에서 나가 초가장에 대한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가만!”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소은설이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이거 내가 너무 손해 보는 장사 아닌가요?”
소은설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만일 이대로 당신에 날 따라와서 혈귀곡을 빠져나가게 된다면, 내가 당신을 구해 주는 샘이나 마찬가지인데…….”
소은설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럼 뭔가 보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설마, 그냥 날로 먹을 생각은 아니겠죠?”
진운룡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착각하는군. 어차피 니가 아니더라도 난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거든?”
“아~! 그러세요? 그래서 그동안 모옥에서 꼼짝 않고 계셨어요?”
소은설이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그럼 여기서부터 앞장서시지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네가 정말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거든.”
진운룡은 소은설이 정말 천령안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소은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운룡을 쏘아봤다.
허세만 있는 줄 알았더니 능글맞기까지 했다.
“흥! 말은 참 잘하셔. 어쨌든 나를 따라오려면 절대 공짜로는 안 돼요!”
진운룡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좋아. 그것도 나름 재미있겠는데? 그래 어떤 보상을 원하지?”
소은설의 눈동자가 빛났다.
가끔 사람 속을 살살 긁기는 해도 진운룡이 상당한 고수임에는 틀림없었다. 그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아버지 소진태를 찾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찾는 것을 도와주세요.”
소은설이 진운룡의 눈치를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 혼자서 초가장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공 실력이 떨어지는 하오문 문도들 역시 큰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수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물론, 무림맹 조사단에 알리는 수가 있었으나, 문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 주느냐였다.
게다가 현재 무림맹 조사단이 머물고 있는 곳은 바로 초가장이었다. 조사 역시 초가장의 물적, 인적 지원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무림맹 조사단 역시 믿을 수 없었다.
“흐음……. 아버지를 찾는 것을 도와달라?”
무표정하게 잠시 소은설을 바라보던 진운룡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소은설의 의도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좋아, 약속하지. 단, 니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진운룡은 모른 척 소은설의 제안을 승낙했다.
“정말 약속하는 거죠?”
소은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의 의도대로 진운룡을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진운룡 한 명의 도움만으로는 여전히 초가장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전보다 희망이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따라오세요!”
소은설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피식 웃은 진운룡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가 소은설의 뒤를 따르며 본 것들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분명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 속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마치 숲이 스스로 비켜나듯 소은설의 앞쪽으로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진운룡의 눈에는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곳도 소은설이 가까이 다가서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동굴로 변했다.
나무나 바위들도 살아 있는 것처럼 그녀를 피해 스스로 물러나거나 비켜섰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몇 번이고 비명을 질러 댔을 기괴한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소은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아무런 생각도 없이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라? 길이 여기서 뒤쪽으로 꺾이네.”
“왼쪽이네, 왼쪽!”
소은설은 연신 입을 쉬지 않았다.
물론, 그때마다 여지없이 공간이 생겨났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인 지 반 시진 정도 되었을 때였다.
스스스스!
갑자기 사방에서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엇! 이 안개는?”
소은설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처음 혈귀곡에 들어왔을 때 그녀를 덮쳤던 바로 그 기묘한 안개였기 때문이다.
“안개를 들이마시면 안 돼요!”
소은설이 다급히 소리치며 입과 코를 막았다.
진운룡이 너무도 무방비한 상태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바보! 이럴 때도 허세를 부리다니!’
안개가 점점 짙어지며 두 사람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이었다.
후우우웅!
진운룡의 몸으로부터 예의 그 기파가 퍼져 나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안개가 무언가 벽에라도 막힌 듯 두 사람 주변을 둥글게 둘러싼 채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와! 대단해요!”
소은설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혼몽연(昏夢煙)이라……. 정말 출구에 도착한 모양이군.”
진운룡이 흥미로운 눈으로 소은설을 바라봤다.
천령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 된 것이다.
‘대체 그녀와 무슨 관계일까? 혹시 후손?’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토록 똑같다니…….’
담천은 복잡한 눈으로 소은설을 바라봤다.
그녀는 안개가 접근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신기한 현상을 보며 연신 탄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하기야 태어나서 제녕 땅을 벗어나 본 적 없는 그녀가 기막(氣膜)을 만들어 내는 고수를 접해 봤을 리가 없었다.
“흠!”
진운룡이 헛기침을 했다.
“여기서 날을 샐 생각은 아니겠지?”
그제야 소은설이 호들갑을 멈췄다.
“아! 무, 물론 움직여야죠.”
소은설이 조금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
막 걸음을 옮기던 소은설이 갑자기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출구예요! 와! 우리가 정말 혈귀곡을 빠져나왔어요!”
소은설이 가리키는 곳에는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둡고 칙칙한 주변의 풍경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소은설이 한 걸음 앞으로 움직이자 어둠이 좌우로 물러나며 빛이 더 밝아졌다.
화아아악!
그리고 바깥 쪽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온 적이 없다는 혈귀곡을 기적처럼 벗어난 것이다.
“하하하하! 내가 해내다니! 이건 분명 하늘이 도운 거야!”
소은설이 환호성을 지르며 빠른 걸음으로 혈귀곡을 빠져나갔다.
이미 출구에 도착했음을 알고 있던 진운룡은 담담한 표정으로 소은설을 따랐다.
그의 시선은 소은설의 뒷모습을 담고 있었다.
‘여령……. 어떻게 된 거요? 당신의 장난이오?’
혈귀곡 밖에 첫 발을 내딛은 진운룡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잠시 머물다 빠르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