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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3화)
1장 혈귀곡 (3)


소은설은 사내의 모습을 살폈다.
허리에 검을 찬 것을 보면 무인임이 분명했다.
사내의 태도를 볼 때 강호에서 제법 유명한 인물인 듯했다.
게다가 특별히 위압감이나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사내의 행동 하나하나에서는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도도함이 묻어났다.
‘미친 용이라…….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서 별호가 왜 그따위야…….’
소은설은 최대한 머리를 굴려 광룡이란 존재에 대해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무림에서 광룡이라는 별호를 가진 유명인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오문 소속인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무인이라면 은거 기인이든지, 그다지 별 볼 일 없는 이라는 이야기였다.
은거 기인이면 당연히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별다른 별호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내가 하는 모양새와는 달리 그다지 별 볼 일 없는 무인이라는 이야기다.
‘아 맞다! 그 성질 더러운 용팔이파 두목 녀석 별명이 광룡이었는데…….’
물론 놈은 동네 건달에 불과했다.
하기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여기저기서 광룡이네, 흑룡이네, 혈룡이네 하며 설치는 인간들이 제법 되긴 했다.
‘외모는 그럴싸해 보이는데, 허세가 있나 보네.’
소은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사내를 바라봤다.
“허…….”
무언가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반박을 하려던 사내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뭐, 강호 경험이 없는 애송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지……. 가만!”
그때, 사내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 난 듯 탄성을 토해 냈다.
“지금 어느 시대인가? 황제가 누구지?”
소은설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사내를 바라봤다.
‘하기야 이 곳에서 오래 갇혀 있었으면 세상에 대해 알 수가 없겠지.’
사내의 사정을 이해한 소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가정 십사 년이에요. 황제는 세종 주후총이에요.”
소은설은 황제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일반 백성들에게나 황제가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 무림인들에게는 그저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자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럼 건문제 주윤문과는 어떻게 되나?”
“건문제라면 백 년도 넘었는데, 대체 무슨 소리예요?”
건문제라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백삼십칠 년 전에 왕위에 오른 명나라 제이대 황제 혜종을 말했다.
소은설이 그런 것을 정확히 따질 만큼 역사를 공부하지는 않았기에 대충 백 년 정도 되었다 알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엉뚱하게 백 년 전 황제 이야기는 왜 꺼낸단 말인가.
“그랬던 거군!”
사내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백 년이 지났단 말이지…….”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소은설은 사내의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진짜, 심장 떨리게 잘생겼네…….’
날이 반듯하게 선 오뚝한 코, 조금 차가워 보이긴 하지만 깊고 맑은 눈동자, 희다 못해 조금은 창백하게 느껴지는 피부, 과연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의 외모였다.
그때, 사내가 소은설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화들짝 놀란 소은설이 얼른 딴청을 부렸다.
“그, 그쪽이나 나나 어차피 같은 신세인 것 같은데, 토, 통성명이나 하죠.”
당황한 소은설이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소은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진운룡. 그러는 그대는 누구신가?”
“아……. 저는 소은설이라고……. 가, 가만!”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소은설의 두 눈이 치켜 올라갔다.
“그런데, 당신 왜 아까부터 계속 반말이죠? 엉? 보아하니 나이도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진운룡의 나이는 기껏해야 스물 안팎으로 보였다.
소은설이 올해로 열아홉이니 많이 차이가 나야 한두 살 정도밖에 안 날 것이 분명했다.
“쯧쯧, 내가 잠들었던 시간만 해도 네가 한 번은 더 태어났다 죽었을 시간이야. 본래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법이라는 거 어른들이 안 가르쳐 주던가? 정 못마땅하면 너도 반말하든가.”
진운룡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 해도 이백 년을 훌쩍 넘긴 자신에게 나이를 따지는 소은설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어처구니없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재밌기도 했다.
그렇다고 지금 그녀에게 자신의 실제 나이를 이야기해 봐야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미심쩍은 얼굴로 진운룡을 흘겨보던 소은설이 뭔가 납득을 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황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을 보면 여기 꽤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긴 하겠네요. 좋아요. 뭐 그건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하죠.”
진운룡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소은설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쪽은 어쩌다 이곳에 갇히게 된 거죠?”
순간 진운룡의 얼굴에 잠깐 동안 쓸쓸한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갇혔다라……. 하기야 갇혔다는 게 맞겠군…….”
마치 오래된 기억이라도 끄집어내는 듯 진운룡의 두 눈이 먼 곳을 향했다.
그의 모습에서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깊은 슬픔과 허무가 느껴졌다.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이네…….’
소은설은 그 사정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진운룡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쨌든 혈귀는 아니란 거네!’
진운룡의 행동이나 말을 종합해 볼 때 그도 소은설처럼 혈귀곡에 갇힌 사람들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진운룡이 혈귀가 아니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지자 소은설도 경계를 풀게 되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은 없나요?”
문득 생각난 듯 소은설이 물었다.
진운룡과 자신이 살아 있다면 다른 실종자들 역시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있을 리가 없지.”
당연하다는 듯 진운룡이 말했다.
“혈귀곡에서 실종된 사람 수가 수백 명이 넘는데, 그중 당신하고 나만 살아남았단 말인가요?”
소은설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수백 명? 스스로 무덤을 향해 걸어 들어오다니 어리석은 자들이군…….”
진운룡이 조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곳에는 너와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은 없어.”
단정 짓듯 말하는 진운룡을 보며 소은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생존자는 진운룡과 자신 둘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만으로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소은설은 일단 혈귀곡을 살펴보기 위해 문을 열고 모옥 밖으로 나왔다.
모옥 주변은 반경 이십 장 정도의 공터가 펼쳐져 있었고, 그 주위를 숲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어?”
소은설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저 무덤은 뭐죠?”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막 벌초를 한 듯한 작은 무덤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심장을 묻은 곳…….”
갑자기 자신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은설이 깜짝 놀라 돌아봤다.
그곳에는 어느새 진운룡이 서 있었다.
‘뭐, 뭐야 인기척도 없이……. 이런 움직임이라면 완전히 허풍꾼 같지는 않은데…….’
움직이는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은 진운룡이 최소한 소은설보다 몇 단계 이상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란 이야기였다.
소은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운룡을 살폈다.
무덤을 바라보는 진운룡의 두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가족? 친구? 아니면 정인이라도 묻힌 건가?’
진운룡의 반응으로 보아 무척 가까운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아까부터 계속 말하던 여인의 무덤일지도 모르겠네…….’
몇 차례 자신과 그녀를 비교하던 진운룡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 그건 그렇고. 소 낭자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거지?”
무덤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담담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진운룡이 물었다.
몸의 상처나 낭패한 몰골을 보아 그녀에게 만만치 않은 사연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소은설은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여기까지 따라오지는 못하겠지!’
놈들이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감히 혈귀곡 안으로 들어올 엄두는 못 낼 것이다.
“빌어먹을 놈들!”
소은설이 초가장 무사들을 떠올리며 욕지기를 토해 냈다.
정황상 놈들이 아버지의 실종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의 아버지 소진태는 하오문 제녕 분타장이다.
무림에서 가장 비천한 이들이 모여 만든 하오문이었으나, 하오문도임에도 소진태는 곧고 정의로운 성품을 지닌 이였다.
그런 이유로 제녕과 연주를 비롯해 근방의 강호 명숙들 중 상당수가 소진태와 친분을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산동의선(山東醫仙)이라 불리는 황포의원의 주인 채복과는 서로의 고민을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털어놓을 정도로 막역한 관계였다.
한데 보름 전 채복이 운영하던 황포의원에 화재가 일어나 그곳에서 치료를 받던 백 명이 넘는 환자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채복 역시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제녕 땅을 발칵 뒤집어 놨다.
화재의 원인이 방화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화재가 발생하자마자 의원 전체가 폭발하듯 화염에 휩싸였다는 점이 그 첫 번째 근거였고, 더욱 놀라운 일은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나, 의생들이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시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었으나, 밖으로 빠져나온 이는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체 이들이 하늘로 솟았다는 말인가 땅으로 꺼졌단 말인가. 그야말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주민들 사이에서는 귀신이 저지른 짓이라느니, 아니면 악마를 섬기는 사악한 자들이 저지른 짓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
황포의원은 독지가들의 후원을 받아 주로 빈민들을 상대로 헐값에 의술을 베풀던 곳으로, 제녕뿐 아니라 연주, 곡부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그 이름이 높았다.
그만큼 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채복과 그가 운영하던 의원에 생긴 흉사는 민심을 갈수록 더 흉흉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관부는 물론, 무림맹에서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대를 보내게 되었다.
당연히 소은설의 아버지이자 하오문 제녕 분타장이었던 소진태 역시 실종된 친우(親友) 채복을 찾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하오문은 개방과 더불어 강호의 양대 정보 단체 중 하나.
소진태는 분타의 인력을 모두 동원해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무림맹 조사대를 도왔다.
그러던 소진태가 실종된 것이 바로 닷새 전이다.
아버지의 실종에 의문을 품고 그가 남긴 자료들을 살피던 소은설은 소진태가 실종되기 전 초가장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소진태는 초가장이 이번 사건에 연관이 되어 있다고 의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초가장은 제녕 제일의 갑부인 초진도가 버티고 있는 곳. 그는 막대한 재물을 이용해 제녕 관부와 무림을 자신의 손아귀 안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