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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24화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3)

“그, 그럼 그렇다고 말씀을 하셨어야죠!”
“말했습니다만…….”
“또, 똑바로 말해야 알아들을 거 아니에요!”
억지 부리듯 버럭 소리 지른 리더가 난처하다는 듯 이리저리 내 시선을 피하다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살짝 떨리는 어깨, 그 상태로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미, 안, 해요…….”
놀랍게도 사과해 왔다.
너무도 놀라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바라보고 있자, 리더는 부끄러움에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힘겹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스토커인 줄로만 알고…….”
세상에… 리더가 이렇게 부끄럼을 탈 때도 다 있구나.
“아, 아무튼,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저기요, 잠시만요!”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고 도망가려는 리더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에서 전달되는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지만,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뒤늦게 당혹한 리더가 나를 돌아보았다.
“뭐, 뭐예요?”
“조심하시라고요.”
“네?”
살짝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적당히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밤길 조심하시라고요. 스토킹당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위험하게 혼자 다니세요?”
“아니, 제가 실수한 건 맞지만, 그건 당신과 전혀 상관없는 문제 아닌가요?”
“걱정되니까 그러죠.”
“그러니까, 당신이 뭔데 절 걱정하느냐고요.”
“그야 당연히 소중한 분이니까 그러죠!”
나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
리더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위, 위험하다. 진짜 위험하다.
“아니, 저, 그런 뜻이 아니라…….”
변명하려고 살며시 손을 놓았더니, 변태에게 벗어나고자 하는 나약한 여인처럼 과하게 몸을 뒤로 쭉 빼는 리더.
어,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충격받은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리더는 견제하듯 내게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조심히 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저기, 경찰이죠? 여기 스토커가…….”
“오늘은 반가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잠깐, 어딜 도망가!”
도저히 오해를 풀 방법이 없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도망쳤다.
다행히 리더는 나를 뒤쫓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골목 어귀에 숨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된 나는 뒤늦게 자학하듯 머리를 쿵쿵, 쥐어박았다.
이 바보, 멍청이, 진짜 멍청이!
한동안 미친 듯이 자책하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카페를 몰래 살펴보았다.
마침 리더는 카페에서 나오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니, 아마 나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잠시 뒤, 결국 포기했는지 반대 방향으로 전화를 걸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께 보고 전화를 하는 것이려나.
“리더…….”
대뜸 스토커로 오해받아 정신이 없었지만, 뒤늦게 그리움이 샘솟았다.

“나를 선택…해.”
“여동생을 살려. 네 가족이야. 나는… 괜찮으니까.”

빌어먹을 마족에게 농락당하고 있을 당시, 누구 하나 선택할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던 내게 리더가 한 말이 가슴에 맺힌 납덩이처럼 짓누르며 떠올랐다.
그때, 리더는 내 부담과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끝까지 미소를 지어주었다. 자신도 괴로운 주제에, 다가올 죽음이 무서울 게 빤한데도.
그래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었다.
그런 리더가 살아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얼굴에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사실 얼굴의 상처는 정말 오래전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는데, 만약 오늘 우연히 리더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끔찍하다. 변태 스토커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평생 후회할 것이란 생각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기쁨과 슬픔, 감동과 격한 분노가 뒤엉켜 도무지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대로 리더의 뒤를 밟았다. 이번엔 얼굴에 상처가 나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날 이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리더를 미행하며 호위했다. 당장 해야 할 모든 일들은 뒤로 미뤄두고, 오로지 그 일에만 최선을 다했다.
집에는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고 말해두었다. 물론 어머니가 걱정하시고, 현주는 나이 다 먹고 자아 찾기냐며 타박을 줬지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앞으로 리더가 살아갈 미래가 달린 일이었기에.
그러면서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은, 리더는 현재 2층짜리 저택에서 거주한다는 것, 모녀가 함께 지내며 외동딸이라는 것, 직업은 요가 강사라는 것.
타이트한 레깅스를 입고 요가를 가르치는 모습은 너무도 낯설었다. 설마 헌터가 되기 이전에 리더가 이렇게 여성스런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그동안 나는 리더가 직장과 집을 오가는 걸 호위하고, 가끔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거나 지인을 만나러 가는 것도 빠짐없이 호위했다.
내가 안심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리더가 잠을 청할 때뿐이었다. 그래봐야 여관이나 찜질방에서 쪽잠을 자는 정도였지만.
실상 처음엔 꽃바구니를 우편함에 넣어놓는다고 했으니 집 앞에서 며칠 잠복하면 쉽게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꼬리가 잡히지 않아 이 고생이다.
어찌 됐든, 덕분에 이 패턴이 일과가 되었다. 고독하고 지루한 일정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몇 달이 걸릴지도…….
그렇기에 나강철 선생님은 미련하다며… 그냥 사람을 쓰면 되는 일 아니냐고 나무랐지만, 이 일을 어찌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그래도 생각 없이 리더 주위만 배회하던 건 아니었다. 리더와 관련된 사람들의 자료 조사를 호성이에게 부탁해 둔 상태였고, 그의 부하들에게도 혹시 근처에 수상한 자가 없는지 수색시켰으니까.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억척스럽게 며칠을 더 보낸 후, 드디어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너냐?”
“무, 무슨?”
뒤에서 어느 한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오늘도 여지없이 호위하던 중, 리더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캡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남자가 따라붙기에 조심스레 뒤로 다가가 붙잡은 것이었다.
그렇게 잡아 돌려 세워보니, 생각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대충 봐도 4, 50대는 되어 보인다고 할까.
애 하나둘은 딸려 있을 듯한 아버지뻘 같은데, 젊은 여성의 뒤나 따라다니는 변태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인간이네.
“자, 자네, 누군가!”
“대답이나 해. 너냐고, 꽃바구니 넣어놓는 놈.”
“무슨 소린가! 아야야! 이, 일단 이거 놓게!”
뿌리치려 하기에 더 억세게 잡아당겼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반항해 봤자 소용없어.”
“자네,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아닐세.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한참 전부터 리더를 미행하는 거 다 봤는데.”
“리더?”
“아니지. 어, 그러니까… 하린 씨 말이야.”
“우리 하린이가 뭐 어쨌단 말인가.”
“우리 하린이라니… 아주 중증이네, 이거.”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스토커들은 상대를 망상 속에서 이미 연인 취급한다더니, 진짜 미친놈이네.
“거기, 누구 있어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는지, 리더가 긴장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난 자랑스레 스토커를 잡아끌며 리더에게 다가갔다.
“어? 당신은? 전에 그 스토커!”
대뜸 나를 스토커라 지칭하는 그 모습에 가슴이 아팠지만, 의연한 척 넘겼다.
“스토커는 이자예요. 야, 똑바로 서.”
잡힌 손목이 아픈지 엉거주춤 괴로워하고 있기에, 난 중년남을 잡아당겨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보세요, 이자가 그 꽃바구니 스토커예요.”
“아, 아빠?”
“아까 전부터 리더를 미행하기에 잡았… 네?”
“저희 아빠를 왜…….”
“…….”
“…….”
망했다.

“아야야야야, 이거… 멍들겠구먼.”
“죄송합니다…….”
손목을 돌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리더의 아버님. 나는 뭐 달리할 게 있겠는가. 머리를 땅에 박고 사죄할 수밖에.
지금 현재 나는 사정을 설명한다는 취지하에 얼떨결에 리더가 사는 집에 초대된 상태였다.
세상에, 과거에 리더가 살던 집을 구경할 수 있다니……. 평범하게 초대되었다면 더없이 기뻐했을 일이지만, 솔직히 지금으로선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스토커라니…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또다시 머리를 땅에 박고 사죄했다.
그냥 이대로 머리를 들지 말자. 응, 그게 좋겠어.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잡은 분은 리더의 아버님이었다.
리더의 아버님께선 출장 때문에 몇 달간 집을 비우다 최근 돌아왔는데, 저분도 나처럼 딸이 걱정돼 스토커를 잡기 위해 몰래 미행하던 것이라고 했다.
어쩐지 그동안 영 보이지 않더라니, 그런 사정도 모르고 오해해 버렸다. 하아, 조금만 냉정히 생각했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을. 이놈의 성급한 성격.
“여보, 그만 좀 해요. 사람이 오해할 수도 있지.”
사글사글한 눈매가 매우 인상적인 리더의 어머님께서 중재해 주셨다.
살짝 덩치는 좀 있으시지만, 매우 자상하게 생기신 분. 몸집이 풍성한 만큼 인심도 넉넉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하린이를 위해 스토커를 잡아주려 했으니, 얼마나 기특해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저를 위해 애써주시는 분은 어머님밖에 없습니다. 역시 리더가 존경할 만한 분이십니다. 하도 얘길 많이 들어서 어머님의 존안이 어떤지 궁금했는데, 앞으론 저도 존경하겠습니다.
아, 얘길 들었다는 말은 과거에… 그러니까, 회귀 전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도 나중에 어머니가 되면 롤 모델 삼아 자식을 똑같이 키울 거라든가, 어머니의 마음가짐을 손주에게까지 전할 거라든가… 정말이지, 리더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뭐, 이해는 한다. 리더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삶을 이어 나가는 힘이었다고 하니까.

“나… 실은 얼굴이 이렇게 되었을 때, 버티기 힘들어서 수면제를 뭉텅이로 먹은 적이 있어.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라. 내가 쓰러진 걸 보고 엄마가 맨발로 뛰쳐나가 주위에 도움을 청했대. 그때는 정말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에게 화냈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렸냐고. 그래, 바보지. 부모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했으니까. 그때, 어머니가 내게 뭐라 말했는지 알아?”

한때 리더는 도저히 이 얼굴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리더의 어머님이 조기에 발견해 구할 수 있었는데, 리더는 이를 타박했다고 한다.
그런 리더에게 어머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살아줘. 자신을 위해 살기 힘들다면, 엄마를 위해 살아줘. 너 없으면 엄마도 죽을 거 같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힘들어도 제발 살아줘’라고…….
그때, 리더가 한 말은 아직도 내 가슴에 뭉클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리더는 사는 걸 선택했다고 한다. 다시 딛고 일어서는 건 무척 힘들었지만, 깜짝 놀라며 질색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도 매번 고통스러웠지만, 사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노라고.
그러다 세계가 격변했다고 했다. 마물 침공으로 가족도 죽고, 정말 혼자가 되었다고 했다.
이제 가족도 없는데 살 가치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때 와서는 자살할 수가 없겠더란다. 그래서 리더는 헌터가 되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를 자랑하는 리더가 항상 마지막에 하던 말이 있다. 아무리 바퀴벌레라 비웃음당할지라도, 타지도 않는 쓰레기라 불리더라도 살아남으라고. 내 몸은 올곧이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까.
그제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