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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25화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4)

그렇게 올곧은 리더의 버팀목이 되어준 어머니는 과연 어떤 분이실까 항상 궁금했는데, 내가 마음속으로 그려보던 이미지와 같아서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구, 얼굴도 훤칠하게 생겼네. 언제부터 하린이랑 알고 지냈어요?”
“네? 아, 아뇨. 알고 지낸 건 아니고요…….”
“엄마, 저 사람도 스토커라니까!”
소파에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리더가 새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가, 가슴이 아프다. 존경하는 리더에게 자꾸 스토커란 소릴 들으니, 충격이 가시지 않는구나.
“에이, 소심하게 꽃바구니 넣어놓고 다닐 것처럼은 생기지 않았는걸?”
“그건 그렇군. 아까 내 팔을 휘어잡던 걸 보면, 나름 한 성격하게 생겼던데?”
“진짜, 정말로,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이젠 자동적으로 머리가 땅에 박혔다.
이거, 습관 되겠는걸?
“아빠까지! 아, 답답해. 꽃바구니 스토커는 아니지만, 저 사람도 못지않게 이상하다니까. 나한테 리더라고 부르질 않나, 전에 카페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어머님이 고개를 꺾으며 묻자, 갑자기 리더가 말을 멈추고 얼굴을 붉혔다. 덩달아 내 얼굴도 붉어졌다.
“아, 아무튼! 스토커야, 스토커가 틀림없어!”
리더, 저 진짜 아파요. 마물들에게 잡아먹힐 때보다도 더 찢어지게 가슴이 아파요…….
“얘는 아직 사정도 듣지 못했는데 다짜고짜 스토커라니. 됐고, 손님께 커피나 내와.”
“손님은 무슨 손님. 엄마는 내 말 믿지도 않고… 아, 알았어. 내오면 되잖아!”
어머님이 보내는 무언의 눈빛에 리더는 결국 떨떠름하게 일어났다.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리더의 모습은 처음 본다. 각성자가 되기 전엔 이런 성격이었구나. 아니, 어쩌면 지금이 진정한 본모습일지도.
“자, 방해꾼은 사라졌으니, 속 편하게 얘기해 봐요. 그래서, 하린이는 언제부터 아셨나요?”
지, 집요하다. 현주 못지않은 기세가 느껴진다.
“저, 그런 게 아니라… 과거에 제가 알던 사람과 얼굴이 닮아서요. 그런데 스토커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게 걱정돼서…….”
“어머, 어머, 닮았다는 분은 애인?”
“아뇨!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제가 존경하는… 네, 그런 분이셨어요.”
부끄러움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말했다.
아, 미치겠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리저리 어머님의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움을 감추던 중, 문득 트로피와 메달이 비치된 유리 장식대를 발견했다. 무척 특이해 빤히 그곳을 바라보자, 어머님이 눈치챘는지 손뼉을 쳤다.
“아, 저거요? 하린이가 어릴 때 기계체조를 했거든요. 저건 그때 받은 상들.”
“기계체조요?”
“어, 엄마! 왜 그런 얘기를 해.”
부끄러운 듯 부엌에 있던 리더가 꽥! 소리 질렀다.
아, 그렇구나. 지금 리더가 요가 강사를 하고 있는 것도, 과거에 보여준 민첩한 움직임도 전부 어릴 적에 하던 기계체조 덕분이던 거구나. 금메달도 보이는 것을 보면, 실력도 꽤 출중했던 거 같다.
그저 천재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A랭크의 속검사는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어.
“엄마는 못하는 말이 없어. 그보다, 커피 없잖아.”
“없으면 사 오면 되지, 뭐가 어렵다고.”
“내가 왜 저 사람을 위해 그래야 하는데?”
리더가 한마디 할 때마다 나는 고통 속에 허우적거렸다.
네, 전 쥐똥만큼도 못한 사람입니다…….
“박하린.”
“아, 정말! 알았어!”
리더는 몹시 내키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차례 노려보다 겉옷을 걸쳐 입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퍼뜩 정신 차리고 일어났다.
“아,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네? 당신이 왜 저랑 같이 가요?”
“밤길은 위험하잖아요.”
“어머, 어머, 자상하기도 해라.”
“자상하긴 뭐가 자상해? 저기요, 저한텐 당신이 제일 위험하거든요? 그러니까 저~얼대로 따라오지 마세요!”
리더는 내게 엄포를 놓더니, 홱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이거 곤란하네. 하아, 어쩔 수 없지. 불안하지만 탐색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여기서 마트는 그렇게 멀지 않으니 고리 다섯 개 정도만 사용해서 텔레파시를 전파의 형태로 퍼트렸다.
좋아, 리더의 기척이 감지된다.
“듣고 있어요?”
“네?”
딴짓을 하느라 어머님의 말을 듣지 못했다.
나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무슨 얘기였죠?”
“우리 하린이를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어요.”
“아, 그렇… 네, 네에?”
경망스럽게 다시 되묻고 말았다.
왜 그런 질문을… 아니, 그 이전에 뭔가 분위기가 상견례 같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 사람이, 스토커한테 그런 걸 왜 물어봐?”
“스토커도 스토커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거 아니에요.”
저기, 일단 저 스토커 아닌데요.
“당신은 조용히 하고, 들어나 보자고요. 그래서 어떤가요?”
떼를 써서라도 리더를 따라가야 했다. 절대로 따라갔어야 했어…….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내가 리더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상스러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좀 더 높은, 공경하는 스승과도 같은, 높은 언덕의 꽃을 보는 심정으로 존경을 담아 바라보는 분이라고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남몰래 꽃바구니를?”
“죄송하지만, 저는 꽃바구니 스토커가 아닌데요…….”
“괜찮아요. 부끄러워 감추려는 거 다 이해하니까.”
왜 이 가족은 하나같이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걸까? 유전인가? 그래, 유전이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어.
“그래도 말 들으니 성실해 보이네.”
“성실하긴. 싹수가 노래 보이는구만.”
아까부터 한마디씩 툭 내던지시는 아버님의 바늘도 따갑다…….
“당신, 자꾸 토 달 거면 담배나 피우고 와요.”
“왜 내가… 어흠, 미리 말해두지만, 자네가 스토커든 아니든, 내 딸 내줄 생각 없으니, 그리 알게.”
아버님은 딱 부러지게 한마디하고는 베란다로 나가셨다.
누가 들으면 정말 결혼 허락이라도 받으러 온 줄 알겠습니다…….
“하여간,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 봐. 어머, 미안해요. 어린아이가 따로 없죠?”
“아,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그쪽이 마음에 든 거예요. 저이가 낯선 사람을 선뜻 집에 데려온 건 처음 봤거든. 아, 전에 길거리에서 우리 하린이랑 만났죠? 그때, 하린이도 그쪽 말 많이 했어요.”
“제 말을요? 아, 스토커라고…….”
“아뇨. 헌팅인 줄 알고 두근거렸다고.”
순간, 내 눈이 커졌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는지 어머님은 빙글빙글 웃었다.
“누굴 닮았는지 남자한테 통 관심이 없던 앤데, 정말 놀랐다니까?”
그것만큼은 오해입니다. 단순히 저한테 화나서 그런 걸 겁니다.
“안 믿는 모양이네? 노파심에 하는 말이니까, 나이 먹은 사람의 헛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귀담아들어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꽃바구니를 보낸 게 기특해 보이기도 해서 하는 말이야.”
순간, 내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무슨 의미로 하신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살짝 걱정스러운 어조로 조심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그런 거, 기특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조금 억양이 강했는지, 어머님이 다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괜한 말을 한 걸까 싶어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이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망설임을 버렸다.
“상대의 의향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분명히 잘못된 겁니다. 그렇게 스토커를 딱하다고, 기특하다고 봐주시면 안 됩니다. 사고를 당한 후엔 이미 늦으니까요.”
“어…….”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습니다.”
깊숙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저분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 생각할 수 도 있다. 단순히 나는 앞으로의 미래를 알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그 순간, 나는 튕기듯 일어났다. 갑작스런 행동에 어머님과 베란다에서 남몰래 나를 바라보던 아버님이 깜짝 놀라셨다.
누군가가 리더와 접촉했다. 그리고 함께 간다. 마트 방향이 아니다. 인적이 드문 공사장. 이건… 끌려가는 거다!
“이봐요!”
“자네!”
설명할 경황이 없어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리는 멀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다. 달려선 늦어. 그렇다면!
탐색으로 미리 펼쳐 둔 다섯 개의 고리를 넘어 여섯 번째 마력 고리를 활성화시켰다. 고작 한 개 더 늘린 것뿐인데도 세차게 휘도는 마력 폭풍에 전신이 찌르르 하고 전율했다.
나는 상쾌한 해방감을 느끼며 염마력으로 공기를 압축, 폭발시키듯 발밑으로 내쏘았다.
쾅!
콘크리트 바닥을 부서뜨리며 공기를 뚫고 날아올랐다. 동시에 자세를 잡으며 제트기 형태로 염마력 이미지를 구축, 그리고 다시 한 번 발밑에 공기를 압축시켜 폭발시켰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리더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공사장에는 고작 10초도 안 돼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데려간 그 남자는 누구야! 내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어!”
“사, 살려주세요.”
“시끄러! 확 그어버리기 전에! 하여튼, 너같이 얼굴만 예쁘장한 걸레 년들이 꼭 바람을 피우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이제 와서 빌어도 소용없어! 그래, 벌이 필요해. 앞으로 바람피우지 못하도록, 다시는 얼굴 못 들게 만들어줄게. 걱정 마, 나는 못생긴 너라도 사랑해. 사랑할 수 있어. 앞으로 영원히 우린 함께야.”
“미, 미쳤어. 싫어! 누가, 누가 좀… 꺅!”
“반항하지 마! 실수로 목을 그어버릴지도 모르니까! 후흐히히히, 후헤헤헤헤… 에?”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공사장에 쌓여 있던 모래 더미와 먼지가 비산했다.
“뭐, 뭐야? 콜록, 콜록!”
갑작스레 들이닥친 모래 폭풍에 얼굴을 가린 채 괴로워하는 괴한. 나는 다짜고짜 그 남자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컥!”
너 같은 놈이, 너 같은 놈이!
내 격양된 기분에 응하듯 마력이 거칠게 날뛰었다. 무의식적으로 발동된 염마력이 시멘트 포대, 철골, 각목 등을 띄워 올렸다.
“콜록, 콜록… 다, 당신은…….”
뒤늦게 나를 발견한 리더가 한 번 놀라고, 주변에 물건들이 떠올라 있는 걸 보고 두 번 놀랐다.
나는 바동거리는 괴한을 놓지 않은 채 리더에게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요?”
“아, 어… 네.”
“그러게 혼자 다니지 말라고 말했잖아요!”
격한 말투에 놀란 걸까? 움찔하고 어깨를 좁히는가 싶더니, 이내 후두둑 눈물을 쏟기 시작하는 리더. 제길, 제길! 이런 개새끼 때문에…….
“켁, 사, 살려… 억!”
손에 힘이 들어가자 눈알이 튀어나올 것같이 얼굴이 붉어지는 놈. 바동거리며 들고 있던 나이프로 내 팔이나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 댔지만, 몇 십 겹으로 압축한 염마력 갑옷을 걸친 내게 통할 성싶은가.
챙강!
결국 칼날이 부러지자, 녀석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그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아 녀석을 벽 쪽으로 집어 던졌다.
투박스런 소리와 더불어 꼴사납게 나동그라지는 놈.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것도 보기 싫어 염마력으로 신체를 장악해 바로 일으켜 세웠다.
“히, 히익, 히이익!”
보이지 않는 힘에 붙들려 옴짝달싹할 수 없으니, 녀석은 연신 눈알을 굴리며 흥분한 숨소리를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