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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22화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1)

나는 빈정대듯 말을 이었다.
“어찌 된 건지 모르겠지? 알 턱이 있나, 감방에 처 들어가 마음을 닫고 있는데. 이 돈, 전부 네 누나가 직접 두 발로 걸으며 호소해서 얻은 돈이야. 그러니까, 네 보석금으로 쓰려고 암 덩이 붙인 채 고개 숙여 부탁해 마련한 돈이라고.”
순간, 영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그거 아냐? 후원한 사람 중에는 네가 다니던 유리 공장 직원들도 있다는 거. 그중에서도 널 감방에 처넣은 그 사장이 가장 많이 기부했더라. 사정을 알았더라면 그냥 고소를 취하했을 거라고 후회한다던데? 웃긴 일이지 않냐? 어찌 된 영문인지, 유리 공장 사람들 모두 네 사정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게. 가난한 게 그렇게 부끄러웠어? 네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정도 말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모든 걸 감추고 의연한 척 살아가니, 자신이 멋있어 보이기라도 하디?”
“어…쩌라고요! 당신은 몰라요. 놀림당해 봤어요? 고아라고, 가난하다고, 거지새끼라고! 그런 소리 들으며… 살아봤냐고요!”
“그래, 몰라. 그래서 어쩌라고?”
“당신 같은 이기적인 놈들 때문에… 감추며 사는 거 아냐!”
영현은 탁자를 쾅, 내려치며 외쳤다. 몹시 흥분한 모습에 밖에서 지켜보던 교도관이 말려야 하나 살짝 고민하는 표정이어서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전부 누나의 몫으로 남겨준 거냐?”
“으… 큭!”
영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서 최후의 방법이 절도였어? 암 투병으로 고생하는 누나만 남기고 이런 곳에 기어 들어가 썩는 게 최선이었냐고, 새끼야.”
“나는!”
“어리광 부리지 마, 세상에 너만 불행한 거 아니니까. 어려우면 도와달라고 부탁해. 너희 남매를 거둬준 교회라든가, 다른 복지 단체라든가, 정 힘들면 이렇게 되기 전에 방송에 호소할 수도 있었잖아. 도와달라고, 우리 남매를 조금만 도와달라고. 왜 의지하지를 못하냐고, 병신 새끼야.”
영현은 말없이 탁자 위에 떨어진 통장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울먹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와선 무의미해. 전부, 전부… 그래봤자 이제 누나는, 누나는…….”
“아직도 못 알아먹었냐? 너희 누나, 아직 안 죽었어!”
답답하다는 듯 외치자, 영현은 퍼뜩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눈물로 젖어 있었다.
“살려…주세요. 저희 누나, 부탁드립…니다. 저희 누나… 제발…….”
눈물, 콧물 다 쏟으며 힘겹게 말하는 영현. 말이 갈라지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이 떨리고… 그런데도 내게 고개 숙이며 그는 연신 부탁했다.
정말이지, 저놈의 고집은.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똑같이 사람 고생하게 만드네.
난 꺼이꺼이 울고 있는 영현을 바라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민혁 오빠세요?]
“그래. 지금 네 동생 만나는 중이다.”
[어때요? 저희 동생, 고집 강하죠?]
“아무렴.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너희 둘이 어찌 그렇게 똑같냐?”
[제, 제가 언제 고집을 부렸다고…….]
“퍽이나 아니라고 해라. 그렇게 수술 안 받겠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그, 그건 죄송하니까… 우우.]
전화기에서 매우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엉엉 울고 있던 영현의 얼굴이 석상이라고 할 만큼 완전히 굳어버렸다.
난 그 모습을 고소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됐고, 네 동생 놀라서 기절할 기세니까 바꾼다. 이참에 서로 얼굴도 좀 봐라. 화상 통화로 전환할게.”
[네? 자, 잠깐, 저 지금 얼굴이 엉망인데!]
깔끔하게 무시하고 영상 통화로 전환한 뒤, 유리창 너머로 액정 화면을 내밀었다.
“누나…야?”
[야, 야호?]
오랜만에 마주했는데 첫인사가 야호가 뭐냐, 야호가. 굳이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이 눈에 훤히 보이는구나.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아직도 제정신을 찾지 못했는지, 영현은 나와 액정 화면을 번갈아 보며 멍청하게 되물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제삼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알아서 설명해 줄 사람이 내 손에 있으니까.
[영현아, 있잖아… 누나는 수술 잘 받았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다행히도 전이 위험성은 크게 없대. 그러니까 괜찮아. 누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우는 거 금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끼어들자, 핸드폰 너머로 힉! 하고 짤막하게 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으… 너무해요. 응, 실은 저기 있는 민혁 오빠가 많이 도와주셨어. 수술 비용도, 앞으로 살아갈 자금 마련도 전부. 그러니까 이제 누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것 봐, 살도 많이 쪘어. 지금은 항생제 주사 때문에 이 모양이지만, 곧 머리카락도 다시 자랄 거래.]
억지로 밝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동생을 생각하는 누나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제정신을 못 차린 영현은 돌연 나를 돌아보더니,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말했잖아,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고.”
사실 네 능력이 탐나서이긴 하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영현이 다시 울먹거렸다. 핸드폰 너머로도 히끅거리는 현아의 목소리 또한 들려왔다.
이것들이, 우는 거 금지라니까.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네? 잠깐만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접견 시간 거의 끝났어.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반가움은 다음으로 기약해.”
[그래도…….]
“뭐가 그렇게 아쉬워? 어차피 네 동생 나올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자, 그럼 끊는다.”
[어, 저기, 잠깐…….]
난 봐줄 것 없이 끊어버렸다.
그때까지도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영현은 내가 휙 돌아보자 흠칫하고 어깨를 떨었다.
“그럼 나는 간다. 앞으로의 일은 걱정하지 말고, 수감 생활 잘 마치고 나와라.”
“저기… 잠시만요.”
뒤돌아 나가려는 나를 영현이 불러 세웠다. 의아해 돌아보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갑자기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해 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로,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게 느껴져 나는 피식 웃곤 손을 흔들며 접견실을 빠져나왔다.
영현은 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감사하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만사는 참 알 수 없다니까.”
서부 교도소를 나온 나는 근처 택시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단지 혹시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사람을 마구 부려 먹는다며 투덜거리는 말도 감수하며 호성이에게 신원 조사를 부탁한 거지만, 참으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현아는 살리지 못했을 테니까.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과거의 영현은 아마도 누나를 잃었을 것이다. 그 죄책감과 실망감에 그는 고독한 독불장군이 되었고, 죽을 자리를 찾듯 던전을 드나들던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악운이 강해 끝까지 살아남았고, 단기간에 코어를 흡수해 상위권 랭크에 올라서게 되지만… 팀에도, 클랜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한 그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겠는가.
그랬기에 마지막엔 자취를 감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마물에게 잡아먹혔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은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이번엔 내가 있다. 내가 만든 팀이 있고, 클랜이 있다.
그러니 절대로 과거처럼 혼자 놔두지 않으리라.
“손님, 오른쪽으로 갈까요?”
“아뇨. 그냥 직진으로 쭉 가주…….”
한참 그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무심코 차창을 보며 대꾸하다 순간, 호흡을 잊고 말았다.
도로 너머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저, 저기요! 세워주세요.”
“네?”
“어서요!”
거의 화를 내다시피 억지로 차를 세운 나는 허겁지겁 내렸다.
“손님, 거스름돈!”
“됐어요.”
던지듯 만 원짜리를 건네고는 조금 전, 있을 수 없는 사람을 목격한 장소로 뛰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눈빛과 분위기만큼은 사무치도록 닮았…….
“헉, 헉… 제길.”
그 장소로 돌아와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건가? 하지만 그 옆모습은 분명히… 아냐, 그럴 리가… 아니야, 어쩌면…….
횡설수설, 연신 고개를 휘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제대로 보지 못했다. 차로 지나가면서 슬쩍 옆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이런 경우, 대개 잘못 보았을 확률이 높겠지. 괜히 찾느라 시간 낭비가 될 게 분명해.
하지만 그래도, 만약 그 사람이라면…….
뭐 하는 거냐, 강민혁. 주저할 게 없잖아.
텔레파시를 전파의 형태로 퍼트렸다.
서포터였던 김철종 대원의 주특기인 탐색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처음 시도한 것이라 제대로 감지가 되지 않았다.
제길, 기술이 안 된다면, 까짓것 출력으로!
머릿속 마력 고리를 우악스럽게 회전시켰다.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까지 회전시키며 무식하게 텔레파시를 전 방향으로 퍼트렸다.
그러자 드디어 무언가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전파의 진행을 방해하는 건물들이 느껴졌다.
아냐. 움직이는 생명체를 보자. 저건 쥐, 그 옆은 고양이… 좀 더 큰 것. 그래, 저게 사람의 움직임이다.
수많은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김철종 대원처럼 생김새를 판별하기는커녕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좀 더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그 이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인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긴 번화가가 아닌지라 근처 1㎞ 근방에 사람은 100명 내외였다는 것. 이 중에서 그 사람이 지나갔을 거리 반대 방향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거르고, 당장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과 작은 개체, 아마 아이들이라 예상되는 자들도 거르면 열 명 내외로 좁힐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뛰어서 하나하나 전부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결정했으면 나머진 직접 확인하는 것뿐.
“꺅, 뭐예요?”
“이 사람, 왜 이래?”
한 명, 한 명 전부 어깨를 잡고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아니야, 다음. 이 사람도 아니야, 다음!
무식하게 사람들을 돌려 세우며 확인하기를 일곱 번째 이르러 결국 나는 찾고 말았다.
“뭐, 뭔가요?”
갑자기 돌려 세워진 터라 많이 놀랐는지, 동그랗게 변한 눈동자.
그 사람은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당혹해하는 얼굴조차도 아름답다고 여겨질 만큼 커다란 눈동자, 일자로 다물어진 도톰한 입술, 오뚝하게 선 콧날, 그리고 날카롭게 벼려진 턱선까지… 전부 예뻤다.
그렇기에 나는 당황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인상에서 지워지지 않는 강한 눈매만큼은 분명 그 사람이 맞다. 맞긴 한데…….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이 흉측해야 했다. 거미줄처럼 기워진 흔적이 있고, 실리콘으로 대체된 어색한 코가 있으며, 반 정도 잘려 혈색 없는 입술이 있어야 했다.
그게 내가 아는 리더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