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 거침없이
21화

내 능력을 길러 나가(3)

“설마?”
“아마 그 소식이겠죠. 잠시 실례. 네, 한이수 사장니…….”
[흐하, 하하하! 당신 말대로였어. 지금 주문이 폭주하고 있어, 주문이 폭주하고 있단 말이오! 으하, 우하하하하하하!]
전화를 받기 무섭게 희열에 찬 웃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사장님, 진정하세요.”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나! 아니, 생겼습니까! 민혁 씨, 아니지, 우리 민혁 님. 거, 당신이 한 말대로 어제 우연히 다 해진 대통령님의 구두가 영상에 잡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분이 직접 발이 편해 15년 동안 애용했다고 말하면서 우리 제품이 언론을 탔어요, 언론을 탔다고요! 우하, 우하하하하!]
“저기, 사장님한테 님 소리 들으니 어색하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리고 일단 진정 좀 하시고요.”
[그런가? 그럼 내 편하게 민혁 군으로 부름세. 민혁 군, 고맙네, 고마워.]
단지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지만, 진심으로 감사해한다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민혁 군, 이거 어쩌면 좋겠나. 민혁 군이 투자한 돈으로 그동안 만들어둔 재고가 오늘 다 떨어질 기세로 주문이 들어오고 있어.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라고!]
“어쩌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사장님, 당분간 이 기세가 계속될 겁니다. 당장 주문량에 맞춰 직원을 더 고용하고, 협력 업체를 끌어들이세요. 그리고 사장님, 구두뿐만 아니라 의류 쪽에도 일가견 있으시죠? 이참에 통합 가공 업체로 사업을 확장하시죠.”
[아니, 내가 의류도 공부한 건 어찌 아는가?]
왜 모르겠는가. 구두 사업이 실패해 사업을 접은 뒤, 세계가 격변하는 와중에 마물 방어구 회사를 새로 설립해 운영한 걸 알고 있는데.
하지만 나는 그 부분을 설명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사장님, 이건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의류뿐만 아니라 식품, 공업, 물류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해 하나의 대기업으로서 성장하셔야 해요.”
[대기업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순간, 기겁한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저번에 전화로 알려 드렸죠? 곧 세계가 바뀔 거라고, 지금은 그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고요. 전 처음부터 사장님의 회사를 대기업으로 성장시킬 생각이었습니다.”
[무슨 그런 꿈같은 얘길…….]
“꿈이 아니에요. 가능합니다.”
얼마 뒤, 세계가 격변하면 각성자의 시대가 열린다. 그리되면 모든 주류는 각성자에게로 초점이 맞춰지는데, 그중에서도 상위 랭크를 다투는 헌터들이 전부 모이라이 회사를 지지하고 지원한다면 분명 가능하다. 아니, 내가 기필코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후에 한국 헌터 협회(KHA)가 만들어질 때, 모이라이 회사는 그 협회 산하 기업에 들어가 발언권을 얻고, 최종적으로 협회장이 되어 모든 헌터를 하나로 통합해야 하니까.
그 정도도 이루지 못하면 클랜을 만들 의미도 없고, 운영도 되지 않는다. 더더욱 마족과 맞서 싸우긴 불가능하겠지. 그러니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대기업이라니…….]
사장님은 여전히 꿈처럼 들리는지, 대기업이란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리다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내 한 가지만 물음세. 그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뭔가?]
그 말에 난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과거에 똑같이 질문을 던진 내 자신이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었다.
바퀴벌레 팀이라 비웃음당하던 시절, 우리 팀의 스폰서였던 마물 방어구 회사 한이수 사장님은 우리 때문에 최약팀에나 어울리는 쓰레기 방어구만 만든다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보다 못한 내가 스폰서 끊기를 요청했으나 단호히 거절당해 그렇게까지 우리를 도와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 질문에 사장님은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바퀴벌레처럼 악착같이 살아가는 동포로서 내버려 둘 수 없었을 뿐이에요.”

나는 당시 사장님이 한 말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잠시 과거의 추억 속에서 여운을 즐기던 나에게 선생님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래서 일은 잘 풀렸나요?”
“네, 덕분이에요. 선생님의 투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잘 풀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거 그냥 준 거 아닙니다? 저번에 준 수술비용까지 전부 다 받아낼 거니까요. 아,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그 소녀의 암 수술은 잘 해결된 겁니까?”
“네. 적절한 시기에 수술해서 전이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현아 양이 선생님께 매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고마워할 거 있나요, 전부 민혁 군이 추진해서 한 일인데. 그런데 그 허약한 소녀가 인재인가요?”
“아뇨. 엄밀히 말하면, 인재는 현아 양이 아니라 그 동생 쪽입니다.”
“호오, 그런 거였군요. 그럼 동생은 지금 어디에?”
“서부 교도소요.”
내 답변에 선생님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 * *

서부 교도소를 찾아 접견을 요청한 지 한 시간.
머지않아 접수실에서 수감자가 접견을 승낙했다는 말과 함께 난 좁은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지금 내가 기다리는 자의 이름은 석영현. 과거, 단기간에 AAA등급까지 올라선, 정식 한국 랭크는 무려 3위이자 ‘쉐도우’라 불리던 남자다.
그림자를 다루는 유니크한 능력에, 성장까지 매우 빨라 윤혁의 뒤를 이어 두 번째 S등급 영웅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며 헌터 협회의 관심이 높은 남자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죽었는지 아닌지로 언론에서 토론까지 벌어질 만큼 유명인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딱 한 번 E등급 던전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칠흑의 그림자를 몸에 두른 채, 마찬가지로 그림자로 만든 도끼를 휘두르며 몬스터를 휩쓰는 모습은 그야말로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한편으론 어쩐지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주위에는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이 많았는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 홀로 전부 처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기도 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얼마나 남을 믿지 못하면 저럴까 싶기도 했다.
리더는 분명 크게 될 인물이라고 칭찬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리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마치 떠돌이 늑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자는 그야말로 고독한 늑대였다. 아무도 믿지 않으며, 아무에게도 도움받지 않는, 고고하면서도 상처 입은 늑대.
그렇게 잠시 접견실에 앉아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려니, 곧 맞은편 유리창 너머로 한 수감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다크 서클이 짙게 드리워진 눈, 그 눈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깔린 앞머리, 그리고 왜소하게 움츠러든 어깨.
과거, 내가 알던 모습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지만, ‘어둡다’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늘진 분위기만큼은 그때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반가워요, 석영현 군.”
내가 그를 부르자 영현은 내리깔린 머리칼 너머로 슬쩍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본 나는 조금 식겁해 인상을 찌푸렸다. 퀭한 눈동자엔 그 어떠한 빛깔도 담겨 있지 않았기에.
아무런 마음도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어두운 눈빛을 마주하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완전히 마음을 닫은 느낌이다. 그런 감상이 틀리지는 않은지, 그는 나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무슨 볼일이냐고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표명하듯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하긴, 당연히 그럴 만도 한가.
호성이가 조사해 준 영현의 신상명세서를 읽어본 바로는, 어머니는 영현을 낳다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술과 도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심장마비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 그때가 누나는 여섯 살, 영현은 네 살이었다.
두 남매는 마땅히 거둬줄 친척이나 돈도 없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교회에서 이 두 사람을 거뒀다고 적혀 있었다.
어릴 적 생활에 대해선 거기까지만 쓰여 있어 그밖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을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두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힘들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누나는 의류 공장에서 재봉틀 수선을, 동생은 유리 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교회를 떠나 독립해 사는 환경까지 이루어냈지만, 하늘도 무심하게 건강검진에서 누나가 대장암 양성반응이 나온 것이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 되었다.
암이 발견되면 전이가 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데, 바보같이 반년이 넘도록 동생에게 감추었다고 한다.
어떠한 심정으로 그 사실을 감추었을지는 절절히 느껴졌다. 동생에게만큼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거였겠지.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그리 행동한다. 나라도 같은 입장이었다면 분명 똑같이 처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감출 순 없는 법.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바람에 모든 진상을 알게 된 동생은 크게 절망했고, 터무니없이 큰 수술 비용에 좌절한 그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 유리 공장 문을 따고 들어가 사장실에 있는 금고에 손을 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CCTV에 덜미가 잡혔다.
사실 CCTV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유리 공장의 열쇠를 소지한 자들을 불러 알리바이를 조사하면 쉽게 밝혀질 일이었으니까.
그야말로 언젠간 필시 붙잡히게 될 멍청한 짓거리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이곳에 수용되었다. 여기까지가 그의 현 상황이다.
그러니 과연 그가 살아갈 희망이 있기나 하겠는가.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지만…….
“넌 멍청한 녀석이야.”
절로 짜증이 우러나온 목소리에 영현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역시 입은 꾹 다물려진 채였다.
난 가슴을 쥐어짜며 답답한 심정을 다시금 내뱉었다.
“절도하기 전에 좀 더 다른 사람들을 의지해도 좋았잖아. 아무리 이런 삭막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너희를 안타깝게 여겼을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그런 거… 없어요.”
“있어.”
바로 반박하자 시선을 내리깔던 그는 다시 무료한 얼굴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없다고만 생각해? 노력해 보기는 했어? 정작 너는 남을 믿어보기나 했냐고.”
“누가 있겠어요. 그런 수술 비용을 선뜻 내줄 사람 같은 건…….”
영현은 부정적으로 고개를 휙휙 젓더니, 전부 포기한 듯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됐어요. 가봐도 되나요?”
용건이 다 끝났으면 돌아가겠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영현.
나는 더 참지 못해 안주머니에 넣어둔 통장을 꺼내 유리창을 때리듯 갖다 붙여 안쪽 내역란을 보여주었다.
통장 명세에는 적게는 천 원부터 시작해 많게는 백만 원이 넘는 거액의 입금 내용이 줄줄이 표시되어 있었다.
영현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냐고? 네가 그렇게나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너희 남매를 위해 후원해 준 돈이다, 새끼야.”
영현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