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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19화

내 능력을 길러 나가(1)

세계가 격변한 이후, 헌터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전 세계적으로 국제 헌터 연맹인 UH(United Huntsman)가 설립되었으며, 대한민국엔 정부의 정책과 입법을 대비하기 위해 한국 헌터 협회, KHA(Korea Huntsman Association)가 설립되었다.
KHA는 기업의 연합으로 만들어졌기에 협회 산하 기업들이 사업 전략 혹은 마케팅을 목적으로 마치 야구단이 있는 것처럼 클랜을 창단하여 이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일련의 변화는 헌터에겐 계약해서 번 돈으로 더 비싼 장비와 코어를 구해 강해질 수 있기에 좋고, 국가는 헌터의 양과 질이 상승하기에 좋으며, 기업은 광고 효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어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그 뒤부턴 여타 스포츠와 비슷했다. 각 클랜에서 유망한 헌터를 차출하기 위해 스카우터가 활발히 움직였고, 교섭과 연봉 협상을 대행해 줄 에이전트도 존재했으며, 개인적인 헌터나 팀에 스폰서를 지원해 방어구 한 자리에 어떻게든 로고를 붙이고 싶어 하는 중소기업들도 생겨났다.
그래, 여기까진 좋다. 문제는 E등급 이하의 헌터들에겐 꿈같은 이야기여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헌터만 된다면 최상위 3대클랜은 어렵더라도 하위 클랜에 들어가는 건 쉬웠다. 애초에 각성자 자체가 희귀하니까.
하나 야구에서 1군, 2군 나뉘어 있듯이 헌터에게도 SSS부터 F까지 등급이 매겨져 연봉 자체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F등급 팀이던 우리는 거의 클랜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연봉?
사실 나쁘진 않았다. 아무리 최약이라 하더라도 각성자 자체가 희귀하기도 하거니와, 기본적으로 목숨을 거는 일이 대다수라 생명 수당과 국가에서 자체 지원해 주는 것도 많았으니까. 하나 그렇다 할지라도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울 만큼 가난했다.
마물의 가죽이나 비늘로 만든 방어구 자체가 아무리 싼 것도 천 단위는 기본으로 넘기에 유지 보수만 해도 일주일에 몇 백 이상은 들었으며, 어쩌다 무구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새로 구매하는 게 싸기에 천 단위는 그냥 날아가 버렸으니까.
사정이 그러다 보니 최하위 등급의 헌터들에게 최신형 무구를 구매하거나 코어를 사 흡수하는 건 그야말로 꿈이었다.
실제로 우리 팀은 무구를 보수하고 강화하기 위해 F등급 마물이 주로 나오는 던전에 들어가 사냥을 하며 자급자족할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에겐 A등급인 리더가 있기에 그런 선택이라도 할 수 있었지, 다른 F등급 팀은 더 처절했다.
어떻게든 스폰서가 되어줄 중소기업을 찾으려고 바삐 뛰어다니거나, 개중에는 B등급 이상 헌터에게 하인처럼 빌붙는 자도 있었으며, 최악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물 던전에 들어가는 자나 아예 헌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귀향하는 자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내가 이런 지루하고 애달픈 얘기를 하고 있느냐.
그건 바로 이런 F등급 팀인 우리에게 스폰서가 되어준, 고마운 업체가 있었다는 걸 구구절절하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여긴가?”
몇 번이나 핸드폰 지도를 확인해 보며 걸은 지 30분. 물레 돌리는 여인의 그림 로고와 함께 모이라이(Moirai)라 적혀진 간판이 눈에 보였다.
여기는 수제로 구두를 만드는 업체인데, 과거에 재정을 유지하기 어렵던 우리 팀의 전속 스폰서가 되어 웬만한 방어구는 대부분 무료로 보수해 주었다.
“저 로고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네.”
좋게 말하면 세련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너무 화려해 조금 부끄러운 로고여서 한때는 망토로 로고를 가리고 다니기도 했다. 사장님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보게 되니, 전부 추억의 한 편으로 남아 괜스레 즐거워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장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요, 계시나요?”
공장 입구를 지나쳐 지하로 내려가자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은 공간이 자리해 있고, 벽 가에는 구두를 만들 때 쓰는 갑피와 밑창, 그밖에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부속품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공장 중앙엔 직원이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과 재봉틀, 프레스 기계 같은 것들이 마련되어 있는데, 지금은 전혀 운용되고 있지 않은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나 망치 두드리는 소리는커녕 사람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문은 개방되어 있어 누가 있겠거니 하고 다시 한 번 외치자, 사장실이라 추정되는 방에서 한 중년 남성이 의아한 얼굴을 한 채 밖으로 나왔다.
“누구쇼?”
투박한 손과 눈썹, 온몸 이곳저곳에 근육이 붙은 덩치까지… 한마디로 풍채가 당당해 보이는 이미지의 중년인.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수척한 얼굴이 그 강한 인상을 전부 가리고 있지만, 내가 아는 한이수 사장님이 확실했다.
“한이수 사장님 되시죠?”
이름까지 불리자 놀랐는지 투박한 눈썹이 한껏 좁혀졌다. 아무래도 초면이다 보니 의심쩍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이 오해를 어찌 풀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눈치 보며 질질 시간 끄는 건 적성에 맞지 않기에 여느 때와 같이 대뜸 본론으로 넘어가 버렸다.
“저는 강민혁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지만, 사장님께 투자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투자…요?”
너무 뜬금없었을까, 사장님의 부리부리한 눈이 더없이 커졌다.
“대관절 무슨 말인지…….”
“자세한 얘기는 앉아서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어, 그럼 이쪽으로…….”
내가 현재의 난처한 상황을 언급하자, 사장님도 무안했는지 잠시 부석거리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사장실로 나를 안내했다.
방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책상 위에 영수증이나 재정 관련된 서류가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는지 대충 한 편에 밀어 넣듯 치우고선 나를 맞은편 자리로 안내했다.
“대접할 게 마땅히 없어서 이거라도…….”
사장님은 작은 냉장고에서 언제 들어 있었는지 모를 비타민 음료를 꺼내 내 앞에 내놓았다.
나는 감사히 받아 호쾌하게 한입에 다 마셔 버리곤 투자할 금액을 턱하니 책상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2억입니다.”
검은 007가방의 비밀번호를 풀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오만 원짜리 지폐 다발을 슬쩍 보여줬다.
돈다발을 본 사장님은 더없이 커진 눈동자로 나와 돈 가방을 수차례 번갈아 보기에,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진정하길 차분히 기다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사장님은 굳어진 표정을 풀려는 듯 얼굴을 마구 주무르더니 떨리는 음색으로 물어왔다.
“워, 원하는 게 뭐요?”
당황과 의심이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낯선 이가 대뜸 투자라며 거액의 돈을 들고 왔으니, 어느 누가 미심쩍어 하지 않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투자예요.”
“그러니까 무엇을 위한 투자란 말이오?”
이젠 말투가 다소 삭막해졌기에 나는 잠시 심호흡한 뒤, 몸을 앞으로 당기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 투자 금액으로 설비를 증설하고, 제품을 다시 생산해 주세요.”
그렇게 놀랄 발언이었을까? 사장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완전히 사고가 정지해 버린 모양이었다.
“뭐, 뭐요?”
“그러니까, 이 투자 금액으로 공장을 유지…….”
“아니, 내 말은… 어째서 그래야 하냐는 말이오. 대체!”
사장님은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 질렀다. 짜증과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지만, 그 안에는 자책과 회의적인 감정도 살짝 엿보였다.
“이보시오, 뭘 알고 여기 온 건진 모르겠지만, 밖에 보았다시피 공장이 운영되지 않을 정도로 주문이 없는 상태요. 덕분에 재정이 어려워 접을지 말지 고민하는 마당에 대뜸 찾아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냔 말이오!”
“알고 있어요.”
“알긴 뭘! 그래, 아는 사람이 설비를 늘리고 구두를 다시 생산하라고? 팔리지도 않는 제품을 생산해 재고만 늘려 얻다 써먹게! 만든 구두 전부 당신이 신을 거요? 그런데 설비까지 늘리라니, 그렇게 돈을 버릴 바엔 태워서 고구마 하나 구워 먹는 게 낫겠구려!”
비아냥거림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사실 저것도 많이 참고 있는 거다. 만약 지금, 초면이 아니었다면 정신도 못 차릴 만큼 욕 한 바가지 먹었겠지.
사장님은 그런 분이시니까.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한이수 사장님은 입에 욕을 붙들고 살아 겉보기엔 무섭고 매정해 보이지만, 실상 자신의 이득보다 남을 더 배려할 만큼 정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자기 코가 석 자인 마당에 이 돈이 헛되이 쓰이는 게 안타까워 질타한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되지 않겠는가. 저런 성격이니 이득 하나 되지 않는, 오히려 회사 이미지에 손상만 주는 우리 팀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스폰해 준 거겠지.
“내 말이 그렇게 웃기쇼?”
잔뜩 언짢아하는 사장님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차, 아무래도 사장님은 내 미소를 비웃는 걸로 착각한 모양이다.
“흠흠, 죄송해요. 하지만 구두는 팔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그러니까 뭔 자신감으로…….”
“팔립니다, 분명히.”
역정을 자르듯 재차 말하자 사장님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나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사장님, 이 구두 공장 처음 시작하셨을 때, 대통령께 기부하신 구두 있으시죠? 기억하시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지, 사장님은 고개를 여러 번 옆으로 꺾다 무릎을 탁, 쳤다.
“아아, 그 구두. 아마 15년 전쯤이었나… 대통령님께서 한창 의원 활동하실 때 기부한 구두가 한 켤레 있긴 한데… 그런데 그걸 어찌?”
“이번 겨울이 올 때쯤 그 기부가 큰 은혜로 다가올 거예요.”
과거, 사장님이 우리에게 항상 하던 말이 있다.
자신이 구두 공장을 접은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초창기 때 기부한 구두를 대통령이 15년 동안 신고 다녔다는 게 언론에 터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구두의 출처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만약 그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공장을 유지했더라면 분명 크게 유행을 타 성공했을 거라며 매번 아쉬움을 토로하셨다.
이번엔 후회가 없도록 내가 지원을 해줘 그 사건이 터질 때까지 공장을 유지시키려는 것이었다.
“큰 은혜로 다가올 거라니, 도통 무슨 말인지…….”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당시 기부한 디자인의 구두를 되도록 많이 생산해 두세요. 만약 만들어둔 구두가 팔리지 않는다면… 네, 제가 전부 신죠.”
“그게 무슨…….”
“그러니까 딱히 이 투자가 헛수고가 되어도 별말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대담한 발언에 사장님의 투박한 눈이 한없이 흔들렸다.
“우선 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에요. 다음 이야기는 그 뒤에 하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사장님은 아직 납득하기 어려운지 난처하다는 듯 나를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 보쇼. 내가 이 돈을 들고 튀면 어쩌려고 그냥 가려는 거요?”
“사장님은 그러지 않을 거 잘 알아요.”
“아니, 이 양반이 대체 뭘 믿고 이렇게……. 허참, 당최 알 수 없는 작자로구먼. 하아, 알았소. 이번 겨울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진 맡아보리다.”
사장님은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추후에 또…….”
나는 정중히 인사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려다… 급히 멈춰 섰다.
“아, 맞다. 잠깐 핸드폰 좀요.”
“음, 그건 어째서…….”
“어서요.”
내가 재촉하자 사장님은 의아해하면서도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주었다.
나는 슬쩍 액정을 들여다보고는 곧바로 다시 돌려주었다.
응, 이번엔 실수 없이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