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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17화

도움이 되는 인재는 얻는다(2)

만약 베르디가 알려준 방법이 전부 잘못된 것이라면?
의도적으로 강해지지 못하도록 제재한 것이었다면?
“그럴 리가… 인류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 직접 각성법을 전수해 준 그녀가 뭐하러…….”
살아남길 바란다면서 각성자의 시대를 열어준 그녀가 의도적으로 인류가 강해지길 원치 않아 잘못된 이론을 설파했다니, 너무도 모순되지 않는가.
하지만 한 번 믿음이 사라지니, 천족이 직접 도와주지 않고 우리들만의 힘으로 마족을 막아야 했던 것부터, 좀 더 여유 있게 시간을 두고 알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고작 1년이란 시간밖에 주어지지 못하도록 늦게 알려준 것까지 전부 의심스러워졌다.
“아냐, 아직 속단하긴 일러.”
어찌 됐든 선생님의 이론대로 나는 밤새 연습해 그동안 유니크 능력이라고만 생각해 온 발화 능력을 일깨울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이라면 물도, 바람도, 흙도 다룰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진정한 적은 마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을 머릿속 한 편에 남겨두고 나는 우선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흐암, 여보세요?]
“선생님, 접니다, 강민혁.”
[네? 아아, 강민혁 군? 네에,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다. 미안하게도 단잠을 깨운 모양이네.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다름 아니라 저번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론이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 줄곧 발화 연습을 했어요. 그랬더니…….”
[잠시, 잠시만요.]
갑자기 선생님이 내 말을 막고 어디론가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목울대 넘어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무래도 물을 마시는 모양이었다.
[네, 정신 차렸습니다. 그래서 어찌 됐나요? 제 이론대로 성공했나요? 아니면 실패?]
수화기 너머로 흥분한 목소리가 절절히 들려왔다. 어째서 연구 괴짜라 불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진정하세요, 지금 말씀드릴 테니. 그러니까 선생님의 이론, 그 말대로였어요. 소질은 없는지 겨우 라이터 불빛 정도밖에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어요.”
나는 다시 손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답변을 들은 선생님은 곰곰이 생각하는지 흠, 하는 콧소리가 들리더니…….
[그렇다면 이걸로 한 가지 명확히 알았습니다. 강민혁 군이 염동력이라 부르던 것은 아마도 염동력이 아닐 겁니다.]
뒤이어 의미심장한 말이 들려왔다.
“네? 염동력이 아니라고요? 그럼…….”
[아마도 그건 마력,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처음부터 염동력이란 능력 자체가 이론과 너무 동떨어져서 조금 회의적으로 들렸습니다. 이론적으로 염동력은 5차원에서 끌어들인… 아, 혹시 차원에 대한 이론은 알고 있나요? 예를 들어 종이 위의 2차원에선 3차원을 볼 수 없고, 3차원에선 4차원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런 거요.]
“어느 정도는… 하지만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간단히 말씀드리죠. 종이 위에 도장을 찍으면 도장의 단면은 보이지만, 도장 자체의 크기나 생김새는 알아볼 수 없죠? 그와 마찬가지로 4차원의 우리는 종이 위에 그려진 단면일 뿐이고, 5차원에선 좀 더 다른 무언가의 존재일지도 모르는데, 그 5차원의 무언가를 끌어다 쓰는 힘을 염동력이라고 쭉 생각해 왔습니다만, 강민혁 군이 보여준 염동력은 그와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미래의 저는 그 염동력을 직접 다뤘다고 했죠? 혹시 그때 저는 염동력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았나요? 예를 들어 마력의 힘이라든가, 아니면…….]
“염마력…….”
[네, 그거 괜찮네요, 염마력. 그런 명칭으로 불렀을 수도…….]
“서포터의 염마력법이란 제목의 책을 집필하셨어요. 선생님이 직접!”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선생님은 흥분한 내 말을 듣고 납득했다는 듯 작게 탄식했다.
[아아, 역시나 그랬군요. 쭉 의문이었거든요. 과거의 내가 이 정도의 사실도 알아내지 못했을까 하고요. 지금 강민혁 군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명확해졌군요. ‘염동력은 마력의 성질을 변환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력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성질이 있다’고 말이죠.]
“마력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성질이 있다…….”
되뇌듯 선생님이 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님, 혹시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만약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제 몸 안에 쌓아놓은 마력도 변환할 수 있을까요?”
[몸 안의 마력이라…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봅니다만, 굉장히 위험합니다. 강민혁 군은 머리에 마력을 축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뇌에 영향이…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강민혁 군? 여보세요? 여보…….]
선생님에게는 죄송하지만, 도저히 냉정하게 통화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전화를 끊었다.
현재 나는 이미 한계치까지 마력을 흡수해 더는 능력을 키울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이론대로 염동력은 마력이며, 그 마력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계치로 저장된 내 몸 안의 마력도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런 거다. 압축. 저번에 염동력 갑옷을 강화하기 위해 압축해 밀도를 높였듯 머릿속에 있는 한계치의 마력도 압축해 부피를 줄인다는 것이다. 그럼 그만큼 머릿속에 여유 공간이 생길 테니, 더더욱 마력을 끌어모을 수 있지 않겠는가.
유치할 만큼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지금껏 마력은 마력일 뿐이라고만 생각했기에 전혀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내가 염동력을 발화 능력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이상 선생님의 이론은 거의 정답에 가까울 테니, 실험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지금 현주는 어제 친구네에서 자고 바로 학교에 간다며 없는 상태고, 어머니도 오랜만에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신 터라 집엔 나 혼자였다.
적어도 방해받을 걱정은 없다는 뜻. 방금 생각난 것을 실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었다.
일단 방문을 잠가 혹시 모를 일을 원천 차단한 뒤, 과거 몸을 각성시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 자세를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젠 익숙해진 일이라 금세 내 몸 안에 있는 마력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방대하다. 머릿속엔 금방이라도 터질 듯 꽉 들어찬 마력이 넘실거렸다. 과연 이 마력의 부피를 줄일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한다면?
저번에 염동력을 압축하려다 실패했을 때처럼 압력을 억누르지 못해 머리가 폭발하는 일을 상상해 보았다. 덕분에 등골이 오싹할 만큼 무서워졌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앞섰기에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우.”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마력 덩어리를 반으로 접는다는 느낌으로 압축을 시도해 보았다. 정신이 이끄는 대로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살짝 움직이는 듯했지만, 곧 실패했다.
이런 단순한 이미지로는 안 된다는 건가?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염동력을 다룰 때처럼 강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와라, 중심을 향해 모여!
한 점을 중심으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정렬하듯 차곡차곡 모여드는 마력들. 그렇게 눈덩이 뭉치듯 밀도를 높였다.
성공이다. 뭉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길, 의식을 풀면 바로 원상복귀냐?”
환희에 벅차 기뻐하기도 잠시. 언제 뭉쳤느냐는 듯이 금세 원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마력.
어째서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 마력은 기본적으로 한곳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성질이 있지. 그래서 억지로 머리에 안착시키는 것도 꽤 힘든 작업이었는데,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뭉쳐 버리니 금세 허물어져 버리는 거야.
그래도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니다. 적어도 마력을 뭉쳐 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건 알아냈으니까.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자. 단순히 압축한 상태로는 움직이지 못해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거라면, 압축하되 그 상태로도 움직일 수 있게 만들면 돼.
그러니까… 지구처럼 회전하는 구? 아니면 가로세로 마음껏 돌릴 수 있는 주사위 형 큐브?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완전한 하나의 형태여서 새로 유입되는 마력과 쉽게 결합될 것 같지 않아.
그렇다면… 톱니바퀴의 형태는 어떨까?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만든다면 새로 유입되는 마나도 쉽게 결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형태가 복잡해서 이미지하기에 부담돼. 잘못해 충돌하거나 어긋나기라도 하면 형태가 풀려 버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마력이 폭주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보다 좀 더 단순한 고리… 이거다!
최대한도로 압축한 마력을 구멍이 뚫린 원반… 그러니까 고대 인도에서 쓰던 투척 무기인 ‘차크람’처럼 생긴 원형 고리의 형태로 만들어보았다.
“흐아, 첫 번째 고리는 50원짜리 정도로 작게 만들고 싶었는데… 글렀네.”
이게 생각보다 어려워 한 시간쯤 지났을까, 겨우 500원 동전 크기의 고리를 하나 만들어낸 나는 진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고리를 어째서 이렇게 작게 만들었느냐면, 앞으로 뒤이어 만들 고리들은 그 위를 감싸듯 덮는 형태로 만들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 만들면 고리 간의 충돌도 없을 테고, 움직임도 좌우, 그 어떠한 방향으로도 회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방식이기에 첫 번째 고리를 최대한 작게 만들어야 되도록 많은 고리를 머리에 담아둘 수 있는데… 뭐,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자. 자, 다음.
나는 진땀을 닦고 나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고리를 덮어씌우는 형태로 만들어 자유스럽게 휘돌도록 해보았다.
“해, 해냈어! 하하, 하하하하!”
두 개의 고리가 서로 충돌 없이 완벽히 결합해 휘돌았다. 의식을 풀어도 이미 안정됐는지 원상태로 복귀되는 일도 없었다.
염동력으로 종이학을 접던 연습 덕에 세밀한 조절이 가능했고, 염동력을 항시 압축한 상태로 다니는 연습 덕에 강한 정신력으로 고리의 형태가 벗어나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앞서의 연습들이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필시 실패했겠지.
“그동안의 연습이 의미 없지 않은 거야.”
무언가 그동안의 노력이 보답받았다는 느낌에 절로 주먹이 곽 쥐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자기만족에 취해 있던 나는 슬쩍 시간을 살펴보았다.
“많이 늦었네. 일단 여기까지 할까.”
잠시 한숨 돌리기로 했다.
나머진 지금처럼 남아 있는 모든 마력도 고리로 만들어 결합하면 그만이라, 시간만 있으면 해결되는 일이기에 여유 있는 새벽에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나는 체내에 있는 모든 마력을 사용해 총 다섯 개의 고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