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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15화

쳐부순다(3)

오늘은 아침 일찍 체육관을 끝마치고, 오후에 서울대학교 물리학 교수실을 찾았다.
드디어 어제 호성이에게 그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정보가 맞다면, 그자는 서울대학교 물리학 교수로서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리라.
“계시나요?”
노크하자 안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머지않아 반응하는 목소리가 들려, 나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물리학 관련된 서적과 몇 가지 실습 물품이 가득 차 좁은 방. 정면에는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학과 관련 자료들이 난잡하게 어지럽혀 있는데, 그 자료에 파묻혀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리학 교수답게 흰 가운과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데, 머리를 시원하게 뒤로 넘긴 상태라 훤칠한 외모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이런 자리가 아니라면 어느 유명한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잘생긴 외모였다. 하긴, 실제로 이 사람은 각성자가 된 후, 단골로 TV에 출현했으니, 연예인이라 불려도 틀린 말은 아니려나.
저 사내는 과거 한국에서 유일하게 서포터로 A등급까지 올라간, 서포터의 희망이라 불린 나강철이다.
누구보다도 염동력을 잘 이해하고, ‘서포터의 염마력법’이란 책을 저술할 만큼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천재였으나, 2차 침공 때 드래곤이 내뿜은 브레스에 어이없이 불타 죽은, 불우한 남자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언론에서 ‘그가 타계함으로써 한국의 서포터 발전은 10년이나 뒤처진 셈’이라며 그의 죽음을 한탄하고, 죽게 내버려 둔 한국 헌터 협회를 질타했을까.
이번엔 그리 허무하게 죽는 걸 막기 위해 처음부터 포섭 대상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물론 제일 처음 찾아온 건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흐암, 무슨 일? 과제 제출이 있었던가?”
그는 훤칠한 외모가 반감되게 금방이라도 졸 것처럼 나른한 눈으로 귀찮다는 듯 물어왔다.
혹시 나를 이 대학교 학생이라고 생각한 걸까?
나는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가볍게 꾸벅 인사해 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나강철 교수님 되시나요?”
그제야 내가 학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안경 너머로 반쯤 감겨 있던 그의 눈꺼풀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누구시죠?”
귀찮음이 툭툭 묻어나던 어투도 살짝 정중하게 변했다. 좋은 변화라 생각해 나는 좀 더 그에게 다가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강민혁이라고 합니다. 긴히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상담이요? 취재인가요? 저기요, 잘 모르겠지만, 예약도 없이 대뜸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는 건 무척 곤란합니다만?”
“그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교수님도 관심 가질 만한 내용이에요.”
“내가 관심 가질 만한 내용이라니…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저는 어중간한 걸 매우 싫어합니다. 명확하게 목적을 밝혀주시죠.”
여전히 졸린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말투엔 살짝 짜증이 담겼다. 아무래도 저 지루해 보이는 눈을 번쩍 뜨이게 해줘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
“교수님, 초능력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나요?”
역시나, 언제 지루해했느냐는 듯 커진 눈.
그는 각성자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초능력에 대해 쭉 연구해 왔다고 언론에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하기에 누구보다도 초능력에 관심이 많을 테니, 분명히 이 말에 반응을…….
“안 삽니다. 나가세요.”
…응?
“저 종교 안 믿습니다. 관심도 없고요. 물건도 살 생각 없으니, 어서 나가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
그는 매우 불쾌하다는 듯 나를 흘겨보았다.
어, 어라? 이게 아닌데…….
“교수님은 초능력에 관심 있지 않으셨나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물리학적인 해석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믿는 건 아닙니다. 아니, 바보입니까? 명확하지도 않은 초능력을 진짜 믿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구나. 아직 초능력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니 관심만 있을 뿐, 믿고 있진 않은 거야.
잠시 당황한 나는 곧 사악한 마음을 품고 한쪽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그렇다면야 더 쉽지.
“그게 실제로 존재한다면요?”
“명확하게 당신은 정신이상자군요. 뭐 하세요, 안 나가고. 이 사람, 정말 안 되겠네. 거기 가만히 있어요. 바로 경찰을 부를…….”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경찰서에 연락하려던 그의 손이 딱 멈췄다.
주위에 CCTV가 없는 걸 확인한 뒤, 가볍게 책상에 놓여 있던 펜 하나를 공중에 띄워 이면지에 ‘그게 실제로 존재합니다만’이란 글자를 쓰기 시작했기에.
툭.
어찌나 놀랐으면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액정이 깨졌을지 모르는데도 그의 눈은 이제 토끼를 그리고 있는 펜에 여전히 붙잡혀 있었다.
음… 이거, 은근히 재미있네. 서비스로 곰도 한 마리 그려줄까?
“이, 있을 수 없어. 분명 무슨 트릭이…….”
그는 혹시 실이 달린 게 아닐까 펜 주위로 손을 휘저어보거나, 자석이 있지 않을까 책상 바닥이나 이면지 아래, 서랍 속 등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엔 답답한지 책상을 와장창 뒤엎어보기까지 했는데… 무언가 나올 리가 없지. 진짜 초능력이니까.
“그럼 이런 건 어떤가요?”
엎어진 책상이 저 혼자 스스로 움직여 다시 세워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와 책, 그밖에 잡다한 물품들 역시 제자리를 찾아 책상 위로 돌아왔다. 마지막엔 반쯤 재미로 이면지를 허공에 띄워 가볍게 종이접기를 시작했다.
오랜만이구나, 염동력으로 학 접는 거. 이젠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터라 순식간에 학을 접어 교수실 안에 뱅글뱅글 날려 보이자, 그는 움직이는 물체를 따라 머리를 움직이는 고양이처럼 멍청하게 종이학을 쫓아다녔다.
“핫, 하핫!”
얼마나 뚫어지게 종이학을 바라보았을까, 얼빠진 목소리로 헛웃음을 짓더니 수전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떠는 손으로 겨우겨우 담배를 꺼내 무는 그.
하나 라이터에 불까진 붙이지 못하고 그것마저 핸드폰처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차마 바라보기 안타까워 염동력으로 라이터를 주워 직접 불을 붙여주었는데, 그게 그렇게나 놀랄 일이었나?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 질겁한 얼굴로 물고 있던 담배마저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그만. 충분하니까… 그만하세요…….”
심장에 안 좋으니 제발 멈춰 달라는 식으로 간절히 부탁하기에 난 염동력을 거둬들였다. 그렇게 평온을 되찾자, 그는 차츰 안정되는지 의자에 등을 깊숙이 파묻은 채로 몇 번이나 크게 심호흡했다.
“염동력이야, 한 치 의심도 없는… 명확하게 진짜, 염동력… 염동력이라니. 염동력, 염동력…….”
주술이라도 외듯 몇 번이나 염동력이란 말을 되뇌는 그는 얼핏 보니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완전히 충격에 빠진 모습이다.
“교수님.”
혹시 놀랄까 싶어 조심스럽게 불렀는데도 경기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는 그.
“이제 앉아도 될까요?”
가볍게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미소로 응수하자, 그는 튕겨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요! 편하신 데 앉으세요. 아, 커피, 커피면 될까요? 제가 당장… 윽!”
급히 움직이려다 책상에 발끝을 부딪쳤는지 심히 괴로워하는 그. 조금 전까지 나른하고 여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덤벙거리기까지 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선했다.
“여기, 커피요. 그런데 방금 그거 정말 명확하게 염동력 맞습니까? 무슨 방법으로 힘이 작용한 거죠? 아까 종이를 접어 이 주위를 날렸는데, 물체를 조종하는 거리의 한계는 없는 건가요? 알려주세요. 분명하고, 명확하게!”
완전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속사포처럼 물어오는 질문 세례에 나는 질려서 그만 목을 뒤로 빼고 말았다.
설마 이 정도로 염동력에 관심이 많을 줄이야. 다른 일엔 열의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염동력 얘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는 괴짜라더니, 진짜인가 보네.
하긴, 뛰어난 어택커가 될 수 있었음에도 염동력이 좋아 서포터를 선택했을 정도니, 어련하겠느냐마는.
그런데 아까부터 내심 생각했지만, 이 사람은 아무래도 ‘명확’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면 습관이든가.
“흠흠, 말하기에 앞서 약속받아야 할 것이 하나 있어요.”
“약속… 뭔가요?”
그가 타 준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진중하게 약속이란 단어를 언급하자, 갑자기 불안해졌는지 그는 목을 움츠린 채 조심스럽게 내 말을 기다렸다.
나는 양손을 깍지 껴 얌전히 무릎 위에 둔 채로 차분히 말했다.
“오늘 일어난 일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비밀을 지켜주세요.”
“모든 일이라면… 당신이 초능력자란 사실부터…인가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듯 가운 주머니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다시 입에 물며 말했다.
“만약 발설하면 어찌할 셈이죠?”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을 전부 지울 겁니다.”
단호한 어투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사람의 뇌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네. 텔레파시 능력을 응용해 상대의 뇌를 장악하면 세뇌하는 것도 가능하죠. 말했다시피 당장 오늘 기억을 지우는 건 물론, 정신을 망가뜨려 백치로 만드는 것도 가능해요.”
조금은 겁줄 생각으로 백치라는 단어를 언급했지만, 사실 이런 협박을 부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와는 비록 헌터 양성소에서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이긴 하지만, 당시 소문과 내가 느낀 그의 이미지는 지극히 염동력을 사랑하는 괴짜였으니까.
그때, 내가 느낀 게 맞다면 그는 초능력 연구에 도움이 될 나를 절대로 놓치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 무조건이라 할 만큼 거절하지 않을 것이리라.
“그 말은! 염동력 말고도 또 다른 초능력을 다룰 수 있다는 겁니까? 매우 흥미롭군요!”
거 봐.
내 협박에도 불구하고 무서워하거나 겁먹기는커녕 다른 초능력에 더욱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이 정도로 연구열에 미친 괴짜라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비밀 엄수란 말이죠? 평생 입이 근질거리겠지만… 되도록 참아야겠군요.”
“평생 참으실 것 없어요. 딱 1년이면 됩니다.”
“1년? 어째서 1년이죠?”
“그건 비밀을 약속해 주시면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그리 말한 뒤, 어찌할 테냐는 식으로 바라보자, 그는 지금까지 보여주던 침착한 모습과는 달리 몇 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비밀 엄수, 명확하게 약속드리죠.”
“네. 그럼 왜 1년이라고 말했는지부터 설명을…….”
“아뇨,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생각이고, 당신이란 실험체… 같은 조력자를 잃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요. 그보다 이것부터 확실히 하고 넘어가죠. 무슨 목적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저기요, 듣기 조금 거북한 단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가셨습니다만. 뭐, 못 들은 척 넘어가자. 역시 천재라 불린 사람답게 단숨에 핵심적인 부분을 파고들어 왔으니까.
나는 정말 여기 잘 찾아왔다는 생각을 하며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제가 강해질 수 있게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