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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14화

쳐부순다(2)

“형님, 여기 계십니까!”
뒤늦게 덩치 셋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까 내가 기절시킨 그 덩치들이다. 아무래도 이제 깨어나 곧바로 여기까지 달려온 듯싶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까 적당히 진정하고, 저기 바닥에 널브러진 돈이나 챙겨라. 저기 또라이 고용주님께서 우리 계약금이라신다.”
“예?”
“그게 무슨…….”
“큰형님도 이미 은퇴하고 내빼셨다. 우리만 남아봐야 별수 없으니, 이쯤에서 조직과 연 끊고 앞으로 여기 고용주님의 호위로서 빌붙어 살아가야 할 성싶다. 그래도 대우는 좋아 보이니, 찌들어 살진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렇지, 고용주님?”
과장된 표현에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너희 하는 것 봐서.”
“으아, 벌써 부려 먹을 생각이 가득해 보이시네. 아그들아, 들었지? 손발이 닳도록 뛰어야 쓰겄다. 뭐 해, 어서 돈 챙기지 않고.”
“예… 옙, 형님!”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덩치들이 허겁지겁 돈을 줍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호성이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 아까 왜 나 따라온 거냐? 까닥하면 배신자로 낙인찍힐지도 모르는데.”
“왜긴. 친구니까 당연하지, 병신아.”
그 대답에 난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호성이가 대뜸 내 등을 팡, 치며 말했다.
“이제 기억났냐?”
“그래, 이 새끼야.”
나도 마찬가지로 호성이의 등을 팡, 하고 내려쳤다.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올 땐 시간이 꽤 지난 상태였다. 하도 늦은 시간이라 어머니가 걱정하고 있을 게 빤해 서둘러 돌아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아저씨, 뭐예요!”
“길 가다 부딪쳤으며언 사과를 해야지이~ 어디서어 싸가지 없는 년이 무시하고 가아?”
“부딪쳐 온 건 아저씨잖아요! 걸음이나 똑바로 걸어요.”
“어린년이 버르장머어리 없이, 부모가 그리 가르치디이?”
주황색으로 염색한 웨이브 머리의 여성과 그 옆에는 토실토실하니 귀여워 보이는 단발머리 여성, 맞은편에는 머리가 거의 다 벗어진 술 취한 중년이 그녀들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쟤들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혀, 현주야, 그냥 가자. 저 아저씨 취했어.”
“아씨,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딜 그냥 가아!”
“꺅!”
“현주야!”
그냥 지나가려 하자 취객은 현주의 머리채를 잡았다. 순간, 균형이 무너져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친구가 붙잡아줘 다치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파! 이거 안 놔?”
“어린년이 새빨갛게 염색이나 하고 말이야아. 하여간 요즘 것들으은. 그러니 이런 시간에 싸돌아다니기나 하지이. 너, 오피 년이지이? 하여간 몸이나 팔아서 돈 버는 것들으은.”
“아파! 이거 놓으라고!”
겁먹은 현주가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더는 지켜볼 수 없어 난 문자로 현 위치를 적어 누군가에게 보낸 후,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중심에 나섰다.
“실례합니다.”
“오, 오빠?”
“민혁 오빠?”
깜짝 놀란 둘이 나를 불렀지만, 나는 답하는 대신 보호하듯 그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러자 취객은 엉겁결에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넌 뭐야아?”
구수하게 혀 꼬인 목소리 너머로 찌든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으아, 이거 완전 만취네.
“이 애들 오빠입니다.”
“뭐? 오빠아? 아아, 그렇구마안. 오빠가 되어가지고 니 동생들 예의를 잘 가르쳤어야지이. 부딪쳤는데 사과도 안 하고 가려 하잖아아. 어른한테 꼬박꼬박 말대답이나 하고 말이야아.”
“그런가요? 제 동생들이 폐를 끼쳤나 보네요. 대신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이. 너희들, 오빠를 잘 본받으란 말이야아! 알았어어?”
“오빠, 아냐. 저 아저씨가 먼저……!”
난 슬쩍 현주를 돌아보며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다 댔다. 그제야 뜻을 알아챈 현주는 불만스럽게 나를 바라봤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동생들은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그럼 이만.”
“잠까안! 기다려어, 어딜 그냥 가아! 정중하게 말이야아… 사과를 해야지이. 네가 아니라아 거기 버르장머리 없는 년들이이! 무릎 꿇어어, 무릎 꿇으라고오!”
더러운 건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그냥 좋게 끝내려 했는데, 생각보다 더 진상이다. 쉽게 보내줄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같네.
“겨우 부딪친 걸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말했다시피 동생 교육은 잘할 테니, 좋게 끝내고 넘어가죠. 자, 가자.”
“기다리라고 했잖아아!”
“악!”
내가 현주와 친구의 등을 떠밀며 돌아선 순간, 취객이 또다시 현주의 머리채를 잡고 늘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이번엔 나와 현주 친구도 미처 반응하지 못해 현주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 안 돼. 오빠, 하지 마.”
지금 내 얼굴이 그렇게 험악하게 변했을까?
현주는 머리채를 잡히며 넘어진 주제에 자신의 몸을 돌볼 생각도 않고 해쓱해진 얼굴로 연신 고개를 붕붕 저어 댔다. 아무래도 내가 사고 칠 것처럼 보였나 보다.
뭐, 실제로 그럴 것 같지만.
“놓으세요.”
“뭐어?”
“놓으라고.”
“이 새끼가아, 말이 짧다아?”
“놔.”
기어코 인내심이 폭발해 염동력으로 우리를 비추는 주변 CCTV를 파괴했다. 갑작스럽게 펑펑 터져 나가는 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려보며언 어쩔 건데에? 한 대 치려고오? 쳐봐아, 쳐보라고, 새끼야아!”
“안 돼, 오빠. 제발… 참아. 그러지 마.”
현주가 울먹거리며 나를 말렸다. 현주 친구는 잔뜩 겁먹은 채로 덜덜 떨고, 내가 그런 둘을 무시하고 취객에게 한 발짝 다가가려는 순간…….
“형님, 부르셨습니까?”
호성이와 그가 돌보는 덩치 셋이 등장했다.
온몸에 거창하게 문신을 새긴 덩치들과 얼굴에 무언가 베인 상처까지 나 있어 사람 몇은 죽였을 것 같은 인상의 호성이가 등장하자, 꽥꽥대며 난동 부리던 취객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동생과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고, 그저 나만 반가움에 활짝 웃을 뿐이었다.
“부탁하신 일 잘 마무리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형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호성이가 슬쩍 취객을 돌아보며 말했다. 덩치들은 진즉에 험악한 인상으로 주위를 둘러막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아아, 그런 방식으로 하자는 거지?
난 그 연극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새끼들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대뜸 호성이에게 싸대기를 갈겨 버렸다. 물론 연기니 아프지 않게 시늉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호성이는 리얼하게 고개를 휙 옆으로 틀더니, 곧바로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사과해 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덩치들도 따라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행동에 어디선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누군지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저, 저기, 저는 그럼…….”
“기다리시죠?”
내 부름에 급히 뒤돌아 달아나려던 취객이 흠칫 어깨를 떨며 멈춰 섰다. 난 그윽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까 제 여동생의 머리를 잡아주시던데, 그냥 보내면 제가 섭하죠. 안 그래요, 아저씨?”
“아, 아니, 저는 그냥 실수로…….”
혀 꼬인 말투는 어디 가고,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돌아온 취객.
설마 취한 거 전부 연기였냐, 아니면 술이 깬 거냐? 기가 막힐 노릇이네.
“이 사람이 감히 형님 여동생분께 손찌검했습니까? 이런 쳐 죽일 새끼를 봤나! 확 담가 버릴까요?”
슬쩍 허리춤에서 연장을 꺼내 보이며 말하는 호성.
야야, 연기가 좀 과한데. 이러다 경찰 오겠다, 야.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는지, 취객은 오줌이라도 지릴 것처럼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취객의 어깨를 살짝 툭툭, 쳐주며 말… 어이어이, 그냥 토닥이는 것뿐인데, 왜 건들 때마다 흠칫흠칫 떠는 거냐? 아무튼, 그 상태로 말했다.
“그럴 것까지 있나. 그냥 취한 것뿐인데.”
“네, 네. 제가 좀 취해서 실수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해야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 업계에선 당한 건 똑같이 갚아줘야 한다는 원칙이 있거든? 그렇지, 얘들아?”
“예, 형님!”
뒷짐 진 채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덩치들. 저들도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씰룩거리는 입을 간신히 버티며 철저하게 어울려 주었다. 밤이라 다행이지, 낮이었으면 시뻘게진 얼굴이 다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저씨도 똑같이 머리를 잡아줄게. 그러다 머리가 몇 가닥 뽑힐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렇지, 아저씨?”
“네, 네? 저기, 저는…….”
“끌고 가. 철저하게 한 올, 한 올 전부 뽑아버려.”
그 명령에 취객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그게 그렇게 잔인한 명령이었나? 등 뒤에서 ‘현주야… 이제 네가 한 말 알겠어… 저 오빠 진짜 상또라이야’라고 조심스러운 중얼거림까지 들려왔다. 응, 못 들은 걸로 하자.
“예, 형님! 아저씨, 우리와 어디 좀 갈까?”
“힉! 사, 살려주세요!”
“안 죽여. 형님께서 말씀하셨잖아. 똑같이 머리만 잡아준다니까? 에이, 솔직히 머리카락도 몇 가닥 없구만, 괜히 엄살은.”
“제, 제발 머, 머리만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확, 마! 안 따라와? 그래, 똑바로 잘 걷는구만. 아그들아, 확실히 잘 처리해라! 곧 뒤따라가마. 자, 그럼 현주야, 오빠 기억나냐? 호성이 오빠다.”
그동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어버버거리고만 있던 현주가 퍼뜩 정신 차리며 말했다.
“어, 어어? 이호성… 오빠?”
“그래, 네 오빠 친구 이호성이야. 우리 현주, 많이 예뻐졌네? 그런데 가시나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뭐 하고 있는 거냐? 그렇게 껄렁한 머리 한 채로 싸돌아다니니 저런 취객한테 붙잡히는 거 아냐. 나 안 왔으면 저 또라이 새끼가 취객 죽일 뻔했다.”
“나, 나도 알아! 그것 때문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그런데 뭐야? 그럼 지금 전부 연기였어?”
“글쎄다, 그건 어떨지.”
호성이가 곁눈질로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난 모른 척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크흠, 어쨌든 오늘은 고마웠다.”
“고용된 몸으로서 당연한 걸 뭘. 야, 난 아그들이 그 대머리 죽일 것 같으니까 보러 가야겠다. 그럼 가볼게. 현주도 다음에 보자.”
“그래, 어서 가라.”
“어… 네, 오빠. 고맙습니다. 다음에 봐요.”
어색하게 꾸벅 고개 숙여 배웅한 현주. 그렇게 호성이가 사라지기 무섭게 현주는 내 소매를 확 잡아당기며 물었다.
“고용?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하는 말이야. 그보다 너 말이야, 미쳤어?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호통에 현주와 친구가 어깨를 좁혔다.
“어, 나는 그저 오빠를 찾으려고…….”
“죄송해요… 금방 들어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뭐? 설마 낮부터 지금까지 나를 찾아다니던 거야?”
“어… 응? 어어, 잠깐. 우리가 낮부터 찾아다녔다는 건 어찌 알아?”
아차.
내가 급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둘의 싸늘한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설마… 우리가 찾고 있는 거 알면서도 모른 척 도망갔어?”
“무, 무슨 소리일까나?”
으아, 둘의 눈빛이 더 험악해졌다.
“아, 맞다. 너희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했지? 오빠가 저기 맛있는 데 알…….”
“헐, 체육관에서부터였어.”
“세상에, 그럼 처음부터 아냐!”
아, 오늘은 정말 망했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가는 내내 누구 때문에 이 시간까지 다리 아프도록 찾아다녔는지부터, 아까 얼마나 무서웠는지까지… 한탄 섞인 잔소리를 들어줘야만 했다.
그렇게 찾아다닐 거면 그냥 전화를 할 것이지,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괜히 한 소리 더 했다가 배로 돌아올 것 같았기에…….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야, 강현주. 너 머리…….”
“어때? 좀 잘라봤는데.”
“아니, 너 갑자기 머리는 왜 잘랐어?”
“그냥 좀. 왜? 이상…해?”
이상할 턱이 있나. 항상 봐온 그 머리인데.
“전에 오빠가 한 말도 있고, 자꾸 머리 때문에 오해받는 것도 짜증 나고, 이참에 잘라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래서 어떠냐고. 괜찮아? 안 흉해?”
“응.”
“응, 뭐?”
“귀엽다고. 응, 정말 귀여워.”
마음에 와닿은 대로 대답한 것뿐인데, 현주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이 인간이 정말, 말 좀 가려서 하라니까!”
그러고는 걷어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