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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13화

쳐부순다(1)

“여기냐?”
난 어느 상업 건물 앞에 멈춰 섰다. 1층은 카페고, 2층은 별다른 간판 없이 유리벽에 ‘호기물산’이라고만 쓰여 있는데, 아무래도 2층이 근거지인 듯 보였다.
“그래, 새끼야. 이제 어쩌려고?”
“어쩌긴. 다 쳐부수고 진실을 밝혀내야지.”
“이거, 진짜 또라이 새끼네. 안에 몇 명이 있을 줄 알고 하는 말이냐? 우리 둘이서 돌진해도 씨알이나 먹힐 거 같아?”
“둘이라니? 도와줄 생각이었어?”
“미, 미쳤냐! 내가 왜 너를 도와줘?”
그런데 왜 당황하는 거냐, 너. 자식, 순진하긴.
“너는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금방 처리하고 오마.”
“기, 기다려! 어디서 무술 좀 배워서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은데, 너 이러다 진짜 죽어. 당장 오늘은 넘어가더라도 언젠가 보복 살해당한다고, 조직을 물로 보지 말란 말이야!”
“그런 걱정은 마라.”
“걱정 안 하게 생겼냐, 시발 새끼야!”
호성이가 갑자기 내 팔을 잡고 자신에게로 확 끌어당겼다.
“나는 너에게 빚이 있다고.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호성이의 눈에 걱정과 애처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자식…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정 그러면 너도 따라오든가.”
난 녀석의 손을 뿌리치고 거침없이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호성이는 그런 나를 보고 몇 번이나 망설이는 듯하더니, 기어코 욕설과 함께 뒤쫓아왔다.
쾅!
“어? 누구야!”
문을 발로 걷어차자 안에 있던, 사나운 인상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수는 대충 여덟. 이 정도라면 뭐, 간단하려나.
인사 대신 염동력으로 건물 전체를 장악해 버렸다. 내 불온한 태도에 일제히 연장을 꺼내려던 그들은 갑자기 몸이 움직여지지 않자 당황해했다.
“우왁?”
“뭐, 뭐야? 몸이 안 움직…여!”
꼼짝도 할 수 없겠지. 눈엔 보이지 않지만, 염동력으로 온몸을 옥죄고 있으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목을 졸라 죽여 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살인자가 된다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이들을 실험 대상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으니까.
“이게 무…슨! 이호성! 너, 대체 뭐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당황하던 보스는 뒤늦게 따라 들어온 호성이를 보고 소리 질렀다. 호성이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혼이 빠져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어쩔 수 없군, 내가 나서는 수밖에.
“당신이 이 조직의 우두머리인가?”
“너, 누, 누구야?”
“지나가던 염동력자.”
가볍게 나를 소개하며 몸을 장악한 한 조직원의 호주머니 안에서 염동력으로 접이식 나이프를 꺼내 보스의 목으로 가져갔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는 나이프가 마치 살아 있다는 듯이 저 혼자 움직이자, 기겁했는지 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말도 안 돼. 염동력이 실제로… 하~”
등 뒤에서 호성이의 기가 찬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부정하고 싶겠지.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딱히 호성이가 이해하도록 설명해 주는 대신 보스가 앉아 있는 책상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음, 하긴, 중요한 계약서는 이런 곳에 두지 않으려나.
“금고 비밀번호 뭐야?”
“뭐?”
“저기 구석에 있는 금고, 비밀번호 뭐냐고.”
목에서 피가 흘러나올 만큼 나이프를 바짝 들이대자, 보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답했다.
“1985다. 그래. 거기 있는 돈 다 줄 테니까, 가져가.”
단순히 돈 때문에 온 것으로 생각했나? 별로 오해를 풀어줄 생각은 없어 어깨를 으쓱이곤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금덩이부터 시작해 오만 원권 돈뭉치, 그리고 중요해 보이는 서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는 꺼내기 방해되는 돈뭉치와 금덩이들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서류 더미를 전부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찾았다. 야, 이호성. 이거 같다.”
염동력으로 어느 한 서류를 날려 호성이에게 보냈다. 호성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두둥실 날아오는 서류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집었다.
“이건……!”
“강남 클럽 경영권 계약서. 이미 다른 사람으로 사인돼 있는데, 누군지 아냐?”
“큰형님, 어째서 필두 녀석에게! 이번 일만 해결되면 경영권은 저에게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그건… 야, 이 새끼야! 회장님의 지시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알잖아, 필두 녀석이 회장님 일 무마시켜 준 거. 그래서 경영권은 그 녀석에게 넘기고, 너는 다른 좋은 몫 알아봐 주려고 했…….”
“개소리 지껄이지 마!”
호성이는 서류를 바닥에 패대기치며 소리 질렀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부터 당신 밑에서 개처럼 일했어. 월세 단칸방에서 찌들어 살아도 불만 하나 없이 시키는 일 다 해왔다고! 그런 나한테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야, 이호성. 이, 일단 진정하고…….”
“내가 진정하게 생겼냐, 이 새끼야!”
돌연 호성이가 뒷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고 보스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나는 어쩔 수 없이 호성이를 염동력으로 장악해 버렸다.
“윽! 이익… 강민혁, 막지 마! 저 새끼,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진정해. 죽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뭐?”
“여기서 저 녀석들을 죽이면 돌이킬 수 없잖아. 그러니까 세뇌할 거야.”
내 발언에 호성이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동공이 커졌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자가 하는 말이니 농담으로 들리지 않겠지.
“너… 그런 것도 가능하냐?”
“몰라, 나도 직접 해본 적이 없어서. 들어본 바로는 이게 매우 섬세한 거라 자칫 잘못하면 폐인이 된다더라고. 아, 걱정하지 마라. 그래서 저기 실험 대상들을 일부러 죽이지 않고 놔둔 거니까.”
내가 슥― 조직원들을 둘러보며 말하자, 그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세뇌는 텔레파시의 응용으로 할 수 있다. 상대에게 직접 전파를 전달하는 텔레파시로 뇌에 간섭해 최면 상태에 빠트려 암시를 걸어버리는 것이다.
말로는 간단하나 까닥 잘못하면 상대의 정신을 망가뜨려 버릴 수도 있고, 훗날엔 역으로 정신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방어하는 방법도 널리 알려져 세뇌가 잘 통하지도 않기에, 초기에는 온갖 음모에 사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사장된 기술이었다.
하나 마력의 존재도 모르는 지금이라면 이만큼 편한 능력이 또 있을까.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욱!”
한 조직원의 머리에 손을 대자,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물론 염동력으로 장악한 상태니 그저 몸을 부르르 떠는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자, 우선 첫 번째 실험. 텔레파시로 정신을 장악.
내가 마력을 뿜어내 강하게 정신을 동조시키니, 그는 눈을 뒤집으며 기절해 버렸다. 마치 최면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생각보다 간단한데?
“잘됐나 모르겠네. 당신은 지금부터 원숭이다. 머리 위에 맛있는 바나나가 매달려 있다. 어찌할 텐가?”
“끽!”
내가 염동력을 풀어주며 말하기 무섭게 그는 원숭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정말 머리 위에 바나나가 있다는 듯 점프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위를 네발로 뛰어다니며 발로 몸을 긁는 등 무척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줬다.
“어라, 단박에 성공해 버렸네? 몇 번은 실패할 줄 알았는데.”
“시, 싫어……. 저렇게 되는 건 싫다고! 살려줘, 살려주십시오! 제발,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바아알!”
단박에 성공한 실험에 내가 안타까워하자 집단 공황이 일어났다. 원숭이로 변한 동료의 모습을 보고 현 상황을 깨달은 거겠지. 그래도 체면으로 먹고산다는 사람들인데, 겨우 이 정도로 정신이 무너지다니… 나약한 사람들이네.
너무 시끄러운지라 나는 한꺼번에 전부 뇌를 장악해 최면 상태에 빠트려 버렸다.
“이제 좀 조용하네. 이제 이들을 어찌 세뇌해 볼까? 야, 호성아. 그냥 전부 원숭이로 만들어 버릴까?”
“미친…놈.”
호성이의 목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돌아보니 그는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농담이니까 무슨 괴물 보는 듯한 표정은 그만둬라.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당신들은 오늘 벌어진 일은 전부 잊는다. 그리고 지금 당장 조직을 이탈해 뿔뿔이 흩어진다. 그 이유는 조직 생활에 몸담기 싫어져서. 알았으면 답하라.”
“…네.”
“알겠습니다.”
“저는 조직을 이탈합니다.”
멍한 눈을 한 채 답하는 조직원들. 내가 염동력을 풀어주자 무언가에 홀린 듯 어기적거리며 차례차례 사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지고 둘만 남게 되자 호성이는 지친 듯 머리를 감싸 쥐며 근처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전부 무슨 일인지…….”
“무슨 일이긴, 보는 대로지.”
“너… 강민혁 맞냐?”
“그럼 다른 사람으로 보이냐? 외계인이나 뭐, 이런 거?”
“차라리 그편이 믿기 쉽겠다.”
호성이는 그리 말하며 늘어지듯 소파에 등을 묻고 담배를 빼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말했잖아, 함께하자고.”
“하, 웃기고 앉았네. 고작 나를 데려가기 위해 조직을 와해시켰다고? 그 대단한 초능력까지 보여주며? 내가 어느 연구 기관에 널 팔아넘기면 어쩌려고?”
“그럴 거냐?”
“거기서 왜 의문형이냐…….”
호성이는 진짜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듯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예전부터 알아봤지만, 진짜 또라이네. 상또라이. 미친 새끼야, 내가 그런 짓 하면 나도 원숭이가 될 거 아냐. 너 같음 하겠냐?”
“딱히 그럴 생각 없다. 그저 오늘의 기억을 지울 뿐이지.”
“그 말, 안 믿으니까 됐어. 하아, 내가 어쩌다 저런 또라이 새끼를 알게 된 건지……. 그래서, 계약금이 1억이라고 했냐?”
“아, 그거! 금고 안에 생각보다 돈 많더라. 어차피 검은돈일 테니, 저것들 전부 챙겨 가자. 대충 1억은 될 거 같다.”
“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나는 답해주는 대신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빌어먹을 새끼, 무식한 건지, 똑똑한 건지…….”
호성이는 진이 빠진 것인지 늘어지는 한숨과 함께 몸을 젖혀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누웠다. 그런 상태로 담배 한 개비를 전부 태울 때쯤, 다시 내게 말을 붙였다.
“나는 사실… 니가 싫었다.”
내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돌아보자, 호성이는 담배를 바닥에 퉤, 뱉으며 말했다.
“고아인 나와 달리 집도 잘살고, 어느 잘나가는 기업의 예쁘장한 딸과 약혼까지 하질 않나… 앞으로 탄탄대로일 네 녀석이 부러웠거든. 너희 아버지가 암 걸려서 투병 중이라는 소식 들었을 땐, 솔직히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언짢아하자 호성이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냥 면상 한 방 갈겨줄까 하고 고민할 때쯤,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는 그런 몹쓸 새끼를 구해주더라. ‘나는 아무것도 없는 병신인데, 앞으로 인생 창창한 네가 어째서’라는 의문이 들었지.”
한창 바이크 타던 시절에 큰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술에 취해 폭주하고 있었는데, 신난 호성이가 중앙선까지 넘어 역주행하다가 차에 치일 뻔한 걸 내가 밀쳐서 구해주었다.
덕분에 나도 거의 죽을 뻔했는데, 자신도 바이크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 겨우 살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입원해 있는 사이, 암 투병 중이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사지가 골절된 나로선 장례식장조차 찾아갈 수 없었다는 점이랄까.
그 이후부터 다시는 바이크를 타지 않겠다 다짐했고, 그 다짐의 증거로 당시 사고의 흔적이 남아 있는 헬멧을 여태껏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훗날 내가 물었지. 그때, 왜 나를 구해줬느냐고. 당시에 네가 뭐라 말했는지 알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던가?
호성이는 그런 내 반응이 한심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휘저었다.
“됐다, 인마. 관두자.”
“뭐라고 말했는데? 궁금하잖아.”
“됐다니까! 썩을.”
아무래도 조금도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