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 거침없이
12화

내 앞을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3)

체육관을 나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쭉 기지개를 켰다.
자, 이제 창경궁과 종묘의 마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내…….
순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만나면 안 될 사람을 발견해 다급히 골목 사이로 숨었다.
뭐야? 저 애들이 여기는 왜…….
“요즘 그 인간, 정말 이상해졌어. 일도 쉰다면서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만날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질 않나, 언제가는 며칠간 방 안에 처박혀 있기에 뭐 하나 했더니, 학을 접고 있더라니까? 완전 정신병잔 줄.”
“그거, 너 선물해 줬담서? 이냔이 은근슬쩍 오빠 자랑하고 앉았네.”
“그게 아냐! 진짜 이상하다니까. 며칠 전에는 어떤 산적 같은 사람이 집에 찾아와서 당장 오빠는 복싱 선수가 되어야 한다느니, 천재라느니 난리였어.”
“에이, 헛소리가 좀 과하다?”
“아, 답답해. 정말이래도 그러네! 그래서 확인하려고 여기 온 거 아냐. 만약 이곳에 그 인간 있으면 아이스크림 콜? 싸구려 500원짜리 말고, 진지하게 전문 매장 거다?”
“그래, 좋아. 콜!”
난 몰래 둘의 얘기를 엿듣다 이마를 짚었다.
아, 저 고집불통. 그렇게 내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건만, 무슨 호기심이 저리도 많은지…….
이걸 어찌해야 하나. 지금에라도 말려야 하나? 막아서 뭐라고 하지? 전부 설명해?
…응, 귀찮다. 그냥 모른 척하자. 난 오늘 여기 없었어. 그래, 그게 좋겠어.
체육관 문 너머에서 안쪽을 기웃거리는 현주와 친구를 내버려 둔 채 몰래 골목을 빠져나왔다. 녀석들은 한동안 나를 찾아다니다 제풀에 지쳐 돌아가겠지.
그렇게 둘을 외면한 나는 창경궁으로 향했다.
이젠 이곳도 눈에 띄게 마력 요소가 줄어들어 오늘이나 내일쯤에는 전부 흡수할 수 있을 만큼의 양밖에 남지 않았기에, 좀 무리해서라도 오늘 다 끝내 버릴 요량으로 산책로를 달리며 집중적으로 마력을 흡수해 나갔다.

“이것으로 끝인가.”
날이 어둑해질 무렵, 마지막 마력 덩어리를 흡수한 나는 지친 숨을 토해내며 땀을 닦았다.
이것으로 두 번째 마력 스폿도 클리어다. 예상한 대로 보름 만에 마력을 전부 흡수해 낼 수 있었다.
그것만 놓고 보자면 두 팔 벌려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를 만도 하지만,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우려하던 문제인 체내의 마력 용량이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게임처럼 명확한 수치로 표시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마력을 흡수하면 완전히 가득 차 더는 흡수할 수 없게 될 거라는 걸.
이를 무시하고 억지로 마력을 삼키면 몸에 무리가 가거나, 심하면 내부에 머물 곳 없는 마력이 폭주해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하아, 앞으론 이 한계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는 게 일이겠네.”
평균 축에도 들지 못할 만큼 저주스런 내 몸이 한탄스럽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과거에 비한다면 이만큼 마력을 쌓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무슨 수로 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애초에 마력이란 게 뭘까?
슬쩍 손바닥에 염동력을 일으키며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염동력과 마력의 관계성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겠는가. 이런 건 차라리 전문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 것이다.
그래, 전문가에게.
“슬슬 때가 되긴 했어.”
이젠 급히 마력을 흡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체력을 기르는 것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으니, 이대로 나빠지지만 않게끔 유지하는 것으로도 문제는 없으리라.
그러니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인재를 포섭할 단계로.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천호동에 있는 어느 주택가를 찾았다.
그중에서도 영세민이 살 법한 허름한 반지하 앞에 멈춰 섰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여기일 것이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환하게 불이 켜져 있기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 보고 적당히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기에 몇 번 더 두드렸는데, 그 행동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누군가가 욕설을 퍼부으며 나왔다.
“이 시간에 누구야!”
보는 것만으로 주눅들 만큼 덩치 크고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나왔다. 깍두기 머리에 날카롭게 째진 눈, 흰 나시 티 사이로 보이는 현란한 문신까지… 전형적인 건달의 이목구비였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 호성이 있나요?”
“뭐? 당신 누군데 형님을…….”
“어? 그 목소리는…… 혹시 강민혁이냐?”
당황한 덩치의 어깨 너머로 내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형님, 아시는 분입니까?”
“내 생명의 은인이야, 새끼야. 잠깐 비켜봐. 이야, 진짜 강민혁이네?”
드디어 내가 아는 얼굴이 나왔다.
살짝 치켜올라 간 눈, 야생의 늑대가 연상될 만큼 수북한 옆머리와 살짝 돌출된 송곳니.
조금 살이 빠지고 눈매가 사나워졌지만, 내가 아는 호성이가 맞았다.
이호성. 그는 고등학교 때 함께 어울려 지내던 친구다.
“오랜만이다.”
“너, 이 새끼. 여긴 어쩐 일이야? 들어와, 들어와. 야야, 방 좀 깔끔하게 치워봐!”
“예!”
문 앞에 있는 덩치 말고도 안쪽에 두 명 더 덩치가 있었는데, 그들은 빈 술병과 컵라면 등으로 어질러진 방 안을 수선스럽게 치우기 시작했다.
“좀 누추하지만 편히 앉아라. 야, 인사들 해라. 고등학교 친구다.”
“안녕하십니까!”
듬직한 덩치 셋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90도로 인사해 왔다. 내가 부담스러워하며 손을 휘젓자, 호성이는 송곳니가 보일 만큼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돌보는 애들이다. 야야,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너희도 좀 앉아라. 부담스러워하잖냐.”
“예. 그런데 형님, 아까 생명의 은인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그럴 일이 있었어. 아무튼 내 단짝이니까 말조심들 해라.”
“정말입니까? 어… 평범해 보이는 분 같은데요?”
“아냐. 이 새끼, 완전 또라이야. 내가 고등학교 때 바이크 끌었다고 말했지? 그때, 불광동 휘발유 놈들과 시비 붙은 적이 있는데, 그땐 뭐, 건달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어깨에 문신한 것 보고 다 쫄아서 바이크 타고 튀었지. 그런데 이 새끼가 뜬금없이 슈퍼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되돌아가서 날계란을 던지더라니까? 완전 미친놈 아니냐?”
“그러는 넌 그거 보고 밀가루 뿌렸잖아.”
“맞다, 맞다! 그랬지. 하하하하!”
호성이는 당시의 일이 기억나는지 무릎을 쳐가며 웃었다.
“그런데 이 새끼, 회사원 되더니 말끔해졌네? 잘살고 있었냐?”
“회사 그만뒀어.”
“어? 왜?”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너는 여전해 보이네. 건달 돼서 돈 많이 벌겠다더니, 꼴이 이게 뭐냐?”
그 말이 귀에 거슬린 걸까? 나와 호성이 주위를 감싸듯 자리에 앉아 있던 덩치들의 인상이 다소 험악해졌다.
호성이는 웃는 얼굴로 옆에 있던 덩치의 싸대기를 짝, 갈겼다.
“분위기 조성하지 말고 인상 풀어, 새끼들아.”
“죄송합니다.”
“미안하다, 야. 애들이 빡대가리라 저런다. 그런데 여긴 갑자기 어쩐 일이냐?”
“응, 볼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
“사람 좀 찾아줬으면 해.”
그 말에 덩치 중 한 명이 바닥을 주먹으로 꽝, 내려치며 으르렁거렸다.
“듣자듣자 하니까! 우리가 흥신소 떨거진 줄 알아!”
“닥쳐.”
“하지만 형님!”
“닥치라고, 새끼야!”
호성이가 바닥에 있던 유리 재떨이를 덩치에게 던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덩치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황한 다른 덩치들이 수건을 가져와 지혈하는 사이, 호성이는 다시 웃는 얼굴로 되돌아와 나에게 물었다.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냐?”
“아냐. 나강철이란 사람이다. 직업은… 연구원, 아니면 교수일 거다. 찾아줬으면 해.”
“그래? 뭐, 우리 같은 놈들이야 흥신소 관련된 일도 잡고 있으니까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 그런데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이건 맨입으로 안 되는 거 알지?”
“물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건달 짓 그만하고 나랑 함께하자.”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줄곧 미소를 유지하던 호성이조차 얼굴이 굳을 정도였다.
“하, 하하하하! 이 새끼 봐라? 농담이 많이 늘었네. 그런데 이 새끼야, 적당히 기어올라. 죽고 싶어?”
완전히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덩치들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응, 이제 좀 살겠네. 역시 이런 방식이 편하지.
“1억 줄게.”
“뭐?”
“아, 당장은 힘들어. 하지만 올해 안에 지급해 줄 수 있을 거다.”
“와, 시발. 이 새끼가 장난하나! 내가 호구로 보이…….”
“너,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일…… 실패한다.”
가로막듯 뱉은 말에 호성이와 덩치들이 전부 눈을 크게 떴다. 역시나 한창 준비 중이었나 보네.
“아는 척 떠볼 생각인가 본데, 내가 골 빈 놈인 줄 알…….”
“조만간 강남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리싸움하려는 거 안다.”
이번엔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주 기겁을 했다.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던 건을 생판 관련 없는 놈이 말하고 있으니 어련하겠느냐마는.
세계가 격변하기 전, 강남 지역을 두고 조직폭력배 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그 다툼에서 발생한 사상자만 다섯 명, 중상자가 서른이 넘는데, 호성이가 살인죄를 전부 뒤집어써 사형수로서 수용됐다.
당시에 나는 뒤늦게 알게 되어 접견 요청으로 한 번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그때, 호성이는 천애고아라 찾아올 가족도 없고, 꼬리 자르기로 조직에서도 버림받아 이제 접견 올 사람은 나 정도밖에 없다며 기뻐했다.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다 끝내 호성이는 엉엉 울며 내게 말했다.
왜 이제야 찾아왔느냐고, 왜 나를 말리지 않았느냐고…….
억지인 거 안다고, 전부 멍청한 내 잘못이라고, 하지만 누구를 탓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만큼 모든 것이 후회스럽고,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한 번만 다시 기회를 달라고…….
그렇게 애처롭게 울었다.
바보 같은 놈. 그때의 너를 내가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도록 놔둘까 보냐.
“네 보스가 그 일만 성공하면 이번에 오픈하는 강남의 클럽 경영권을 너에게 준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그거 알아? 부양하는 가족도 없고, 언제 죽어도 알아줄 지인도 없는 너희가 꼬리 자르기로는 안성맞춤이라는 거. 그 인간은 너에게 거기 경영권을 줄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어. 그냥 버림 패라고, 새끼야.”
“너, 너… 뭐 하는 새끼야? 어디 끄나풀이야!”
호성이는 인상을 우지직 구기며 사납게 으르렁댔다.
“이호성.”
“어느 조직이냐고 묻잖아!”
더는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아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나와라.”
“뭐?”
“직접 알게 해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으니까, 나오라고.”
“개새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야, 저 새끼 잡아!”
내가 도망갈 거라 생각했는지, 호성이는 덩치들에게 명령했다.
덩치들은 곧바로 나를 잡아채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되레 반대로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해 버렸다. 간단히 카운터로 턱을 툭툭, 치는 방법으로.
어째서 그게 가능하였느냐고? 말할 것도 없이 미래 예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계까지 마력을 흡수하고 정신력을 단련한 이후로 모든 방면에서 능력이 올라갔는데, 그중에 미래 예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젠 1초 전이 아니라 3초 전까지 미래 예지가 가능했다. 그러니 덩치들의 움직임 정도는 한숨이 나올 만큼 느리다고 할까.
그만큼 여유롭다 보니 무심코 너무 일찍 회피 동작을 취하는 바람에 되레 미래가 바뀌어 한 방 크게 맞을 뻔한 적도 있었다는 건 부끄러우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무, 무슨…….”
믿음직한 동생들이 너무도 쉽게 제압당해 버리니 말까지 더듬는 이호성.
나는 쓰러진 덩치들을 밟고 넘어가 호성이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얼빵하게 있지 말고 말해. 너희 보스 있는 곳 어디야?”
“그,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뭐 하긴, 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할 거 아냐.”
“미친놈! 그분에게 진실을 알려주십쇼, 하면 알려줄 것 같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신경 끄고, 어딘지나 말하라고.”
재차 묻자 호성이는 고민하듯 몇 번이나 나와 바닥을 번갈아 보더니, 기어코 내 손을 툭, 쳐내며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