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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11화

내 앞을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2)

서포터 중엔 이 눈의 기능을 강화해 투시, 사이코메트리, 미래 예지 같은 걸 특화한 헌터도 많았다.
그런 헌터들은 대부분 정찰병이나 추적자로서 활약하곤 했는데, 그중에는 예언자에 버금갈 정도로 먼 미래를 보는 자도 있어서 국가 중추에서 활약하는 헌터도 있었다.
누구였더라… 이사리엘이라고 불린 거 같은데, 일주일 뒤의 미래까지도 엿볼 수 있다고 했던가.
본 적은 없지만, 항상 검은 고양이를 데리고 다녀서 천리안의 마녀라 불리던 소녀였다. 공격 능력이 없음에도 예외적으로 S등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나라 얘기다 보니 그 이상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내가 시도하고 있는 미래 예지는 그 정도로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딱 1초 후의 미래를 보는 것.
사실 이건 조금 전, 잠시 말장난할 때 처음 시도해 본 것이었다. 될지, 안 될지도 몰라 조마조마하며 마력을 눈에 집중했더니… 먼 미래까지 보는 재능은 없지만, 근거리 예지는 가능한지 1초 뒤의 미래를 엿볼 수 있던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리 재빠른 주먹이라 할지라도 1초를 미리 알 수 있다면 피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어택커로서 활약할 땐 인간의 움직임을 벗어난 마물의 공격도 피해본 적 있는 나다. 아무리 신체 능력을 강화할 수 없어 평범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1초 후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내가 평범한 사람의 공격을 피해내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어째서, 어째서!”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는 필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나는 전부 피해냈다.
마치 환영처럼 늘어난 두 사람이 어긋나게 똑같이 움직이는 느낌이라 살짝 멀미가 났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니 파이팅 자세를 취할 필요도 없겠다 싶어 두 팔을 내려 버렸다.
그 무모한 행동에 관장님이 미쳤다며 꽥, 소리 질렀지만… 듣지 않았다. 무시당한 만큼 나 역시 무시해 줄 마음이 가득했음으로.
“왜, 왜에에에!”
절규하는 목소리가 처절하게 들렸다. 점점 스윙이 커져 충분히 카운터를 노려볼 만도 하지만, 나는 그저 차갑게 노려만 봤다. 이대로 지칠 때까지, 그리고 절망의 빛이 눈동자에 번질 때까지 철저히 마음을 박살 낼 생각이었기에…….
하나 말해두자면, 나는 결코 성인군자가 아니다. 박살 낼 땐 철저히 박살 낸다. 사람이든 마물이든 나에게 해가 된다면 죽이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복수는 복수로, 피는 피로.
악을 처단하기 위해 내가 악이 되어야 한다면, 두 팔 벌려 악의 길로 들어서리라.
“으… 아, 아냐. 있을 수 없어. 이딴 일이 있을까 보… 끅!”
이쯤이면 된 것 같아 날아오는 주먹에 맞춰 카운터로 정확히 코에 한 방 먹였다. 짓뭉개진 코에선 피가 흘러나왔고, 볼썽사납게 변한 모습이 참으로 유쾌했다.
휘청대는 상대의 관자놀이에 다시 한 방. 다음은 보디, 보디… 역으로 날아오는 어퍼를 슬쩍 피하며 위에서 아래로 주먹을 꽂았다.
정확히 턱에 맞춰 가볍게 눕혀 버리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하지 않았다.
왜 그래야 하는데? 쓸데없잖아.
헤드기어를 쓰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할 만큼 얼굴을 짓뭉개고, 또 짓뭉갰다. 나를 얕본 만큼, 관원들을 무시한 만큼, 관장님을 조롱한 만큼, 앞으로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얼굴도, 마음도 부숴 버렸다.
“그, 그만! 그만해, 강민혁! 그만하라고!”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며 패던 나를 보다 못한 관장님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쉽다. 조금만 더 했으면 완전히 죽여 버릴 수 있었는데…….
“커흑…….”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변한 그는 내가 멈추기 무섭게 바닥에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근성이 없다. 겨우 이 정도냐? 일어나 덤벼. 아직 1회전 안 끝났어.
“…….”
“…….”
어쩐지 주위가 조용해졌다. 슬쩍 돌아보니 모두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살기가 관원들에게까지 뻗은 모양이다.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차며 글러브를 벗어 그의 면상에 던져 버렸다. 잔뜩 겁먹었는지 가볍게 던진 글러브에도 화들짝 놀라며 엉거주춤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참으로 역겨웠다. 겨우 그 정도로 남을 얕보고 비웃은 거냐?
“관장님, 그만 가볼게요.”
“어, 어…….”
완전히 당황해 말까지 더듬는 관장님을 뒤로한 채 나는 초연히 체육관을 나섰다.

그렇게 체육관을 떠나 오늘도 어김없이 창경궁에 도착한 나는 한동안 산책로를 걸어 다니며 진지하게 조금 전의 일을 고민했다.
물론 죄책감을 느낀다든가, 과하게 대처한 게 아닐까 하는, 시답잖은 걸 고민한 게 아니다. 지금 내 신체 능력으로 미래를 대처하는 게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지.
방금 전에는 운 좋게도 미래 예지가 있어 프로 선수를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마물에게도 통용될까? E등급 이하의 마물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D등급 이상부턴 사람의 속도를 월등히 뛰어넘는다.
어떤 건 민첩 중심으로 특화해 그야말로 총알 같은 속도를 내는 마물도 있다. 그런 마물에겐 1초 뒤의 미래를 볼 수 있다 한들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이 서포터로서의 극명한 단점. 만약 신체 능력을 높일 수 있다면 육체를 강화해 총알도 막아낼 수 있고, 민첩성을 강화해 아예 피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서포터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점이 매우 아쉬웠다.
“어서 이걸 해내지 않으면 안 되겠어.”
어깨 위로 콩알만 하게 압축한 염동력을 슬쩍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까 스파링하는 도중에도 단 한 번 터트리지 않은 채 끝까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아아,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련했는가. 가족에겐 변비 앓느냐는 소리를 듣지 않나, 관원들에겐 방귀 좀 그만 뀌라는 소리를 듣지 않나, 자다가 자꾸 의식이 풀려 터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며 깨길 수차례였고, 만성 불면증에 걸려 눈 밑이 시꺼메진 채로 다니길 며칠이었다.
그래도 이만큼 노력한 덕에 거의 의식하지 않아도 압축한 염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슬쩍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전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염동력을 생성해 압축했다.
갑옷 두 개 분량의 마력이 담긴 염동력을 압축하려니 역시나 커다란 반발력이 일어났지만, 전처럼 신음이 나올 만큼 힘들진 않았다.
응. 이거라면 가능하겠어. 좋아, 이제 이것을 갑옷의 형태로…….
“끄응!”
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거의 굳어버린 찰흙을 억지로 주물러 형태를 바꾸는 느낌이라서 속도가 매우 더디고 힘들었다.
정신력 소모가 큰지, 금세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젠장, 생각보다 더 힘들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어도 여기서 손을 놔버리면 대폭발이 일어날 것 같아 억지로 더 밀어붙였다.
끙, 움직여…라! 그래, 조금만 더어!
“하아, 하아… 해냈…어. 하하, 하하하하!”
십여 분간의 고투 끝에 압축해 밀도를 높인 염동력 갑옷을 만들어내는 데 비로소 성공했다.

* * *

“후우, 감사합니다.”
“그래, 수고했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최근에 나는 자주 관장님의 미트를 받게 됐는데, 역시 능력이 좋으신 관장님은 지금 내가 부족한 부분이 뭔지 바로 알아내 집중적으로 단련시켜 주셨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실력 좋은 사람이 왜 이런 좁은 체육관을 운영하는 걸까, 또 충분히 헌터 양성소의 교관도 가능할 것 같은 능력자인데 어째서 과거엔 한 번도 볼 수 없었을까, 같은.
물론 지금은 너무 달려드셔서 곤란하지만…….
프로 선수를 때려눕힌 그다음 날부터, 관장님은 대뜸 나보고 프로 데뷔를 하자느니, 재능의 낭비라느니, 며칠간 우리 집에 찾아올 정도로 애걸복걸하고 난리였다.
그래도 내가 완곡히 거절하자 이제야 겨우 평소처럼 돌아오셨다. 프로에 전혀 관심 없다는 걸 알고 드디어 단념해 준 것 같았다.
“저기, 강민혁.”
“네?”
“…아니다.”
미트를 벗으며 답답한 듯 나를 바라보시던 관장님은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을 주워 담으셨다.
정정해야겠다. 아직 미련을 버리시지 못하신 것 같다.
“힘드셨죠? 여기 물이요.”
내려와 링에 걸터앉아 있던 나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물병을 건네는 안성태 선배. 그날 이후부터 어쩐지 좀 더 싹싹해졌다고 할까, 다른 관원들이 그냥 강민혁 씨 트레이너를 자처하라며 선배를 놀리기까지 했으니, 단순히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어제 그 호로새끼 트레이너하고 관장이 찾아온 거 아세요?”
건네받은 물을 마시던 내가 의문을 담아 돌아보자, 선배는 관장님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내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 새끼, 프로 은퇴했데요. 덕분에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 체육관 관장 새끼가 찾아와 난리가 났다니까요?”
“그래서 어찌 됐나요?”
“에이, 말 놓으라니까요. 제가 한창 어리대도 그러시네.”
“어, 어… 응.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던데요? 입관한 지 두 달도 안 된 초짜한테 개처럼 얻어맞고 나갔을 뿐이라고. 그 얘기를 들은 그쪽 체육관 트레이너하고 관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어 하던지, 그때 표정을 봤어야 하는 건데.”
선배는 통쾌하다는 듯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내게 무참하게 박살 난 후, 사과도 하지 않고 도망가듯 떠나갔다는 말에 살짝 언짢았는데, 은퇴라… 확실히 제대로 마음을 박살 냈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사실은요, 그 새끼 이 체육관 나간 거… 저 때문이었어요. 가난한 놈이 실력도 없으면서 빌붙고 다닌다고 무시해서 확 빡 돌아 저도 모르게 면상을… 아, 말 안 했구나. 우리 집 가난하거든요. 관장님이 형편 봐주시지 않았다면 저 여기 다닐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
난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이 새삼스러웠을까, 겸연쩍게 콧잔등을 만지던 선배는 부끄러움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 일로 경찰서까지 갔는데, 관장님이 어찌어찌 무마시켜 주셨어요. 그 새끼, 분명 그거 마음에 두고 있다가 프로 데뷔하고 나서 뒤통수 때린 걸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 저 때문이죠.”
“잘 처 나갔지, 뭐. 복싱 좀 한다고 매번 사람 깔보던 싸이코 새끼 좋아하던 관원 하나도 없었어.”
“그딴 트러블 메이커 처 나갔을 땐 나도 얼마나 후련하던지.”
“그놈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나간 관원이 한둘이 아냐. 이 체육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잘된 일이지.”
아닌 척하며 전부 듣고 있던 걸까, 단련하던 관원들이 대뜸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 건넸다.
모두가 위로해 준다는 걸 안 것인지, 선배의 눈시울이 조금이지만 붉어진 걸 볼 수 있었다.
“뭐, 그래서 이번엔 아무것도 못하고 뛰쳐나간 건데, 대신 복수해 주셨다는 말 듣곤 얼마나 고맙던지…….”
“선배 때문이 아니야.”
“네?”
“선배 때문이 아니라고. 바퀴벌레란 말이 듣기 싫어서… 그냥 그래서 팬 거야.”
그 말이 그렇게 우스웠던 걸까, 농담으로 알아들었는지 듣고 있던 관원들이 폭소했다. 난 진지하게 말한 건데…….
그런데 분위기와 다르게 선배는 웃지도 않고 내 눈치만 살폈다. 의아해 돌아보니, 선배는 몇 번이나 허리를 들썩들썩 안절부절못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고마워요, 형…….”
부끄러움과 감사함, 그리고 미안함이 뒤섞인 듯한 목소리였다. 얼핏 살펴보니 눈시울이 상당히 빨개져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왜소해 보이는 선배의 어깨를 한 번 툭, 친 뒤…….
“잘 마셨어.”
물통을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