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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10화

내 앞을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1)

“하여간 좆도 없는 새끼가 어디서 까불어?”
“이시형, 됐으니까 그만 가.”
“말 안 해도 갈 겁니다. 저도 이런 시궁창 냄새나는 곳에 1분도 더 있기 싫다고요. 하여간 관장님은 그때와 전혀 변함없네요. 저런 거지새끼 품어서 어디 써먹겠다고. 그러니 아직도 곰팡이 낀 지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체육관입니까? 거지 소굴이지.”
그의 거침없는 말이 이어질수록 지켜보던 관원들의 주먹이 더 강하게 부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관장님이 나서지 못하니 다들 참고만 있는 듯싶었다.
“이시형!”
“네네, 알았다고요. 전 위약금 제대로 냈으니까, 계약서나 파기해 주시죠. 저도 이제 여기 볼일 없습니다. 퉤.”
그는 동산처럼 쌓인 동전 더미에 거하게 가래침을 뱉으며 나에게로, 정확하게는 문 입구로 걸어왔다.
“뭐야? 비켜.”
내가 가만히 선 채로 바라만 보고 있자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뭘 꼬나봐? 너도 주제 파악 못하는 새끼냐? 안 비켜?”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살짝 숙이고 옆으로 자리를 비켰다. 그런 내 모습이 그렇게 우스웠을까, 그는 작게 실소하며 지나쳐 가더니 내 등 뒤로 ‘병신새끼’라고 중얼거렸다.
“아참! 관장님, 제대로 위약금 냈으니까, 이번엔 이적 동의서 사인해 주셔야 합니다? 그거 때문에 지금까지 대회 출전도 못하고 개고생한 거 아닙니까. 이야, 그나저나 그 거지새끼 안고도 아직 끈질기게 운영하는 것만큼은 대단하네요. 바퀴벌레가 따로 없네. 그럼 잘들 있으십…….”
“하죠.”
막 떠나려는 그의 어깨를 툭, 잡았다.
“뭐?”
“스파링하자고요, 저랑.”
덤덤히 말해서 이해가 더딘 걸까? 그는 눈을 끔뻑이며 잠깐 말을 더듬었다.
“뭐, 뭐? 하, 이 새끼 보게? 지금 너랑 나랑 한판 붙자고?”
“네. 상대해 드릴게요, 제가.”
장내가 조용해졌다. 이시형이란 자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내 어깨너머로 관장님을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말을 내리깔며 도발하듯 재차 말했다.
“아니면… 못하겠냐, 나랑은?”
“강민혁!”
그제야 관장님이 경악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덩달아 우려하는 관원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 미친 새끼. 여기에 주제 파악 못하는 새끼가 한 마리 더 있네? 좋다, 새끼야. 붙자, 그래.”
“이시형, 쟨 신입이야. 입관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애송이라고!”
“뭐요? 두 달?”
두 달이란 말이 여간 놀랄 일인지,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너, 돌았냐? 두 달 깔짝 샌드백 쳐봤더니 복싱이 만만해 보여?”
“딱히 그렇진 않은데, 너는 만만해 보이네.”
“뭐? 이 새끼가!”
당장에라도 한 대 칠 듯한 기세로 주먹을 올린 그는 가까스로 자제하는가 싶더니, 웃통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래. 한판 붙어, 새끼야. 관장님, 글러브 좀 빌려주쇼!”
“이시형!”
“저 새끼가 먼저 시비를 털잖아! 이대론 못 간다고!”
이젠 아예 링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본 관장님은 도저히 말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곤란한 듯 이마를 짚으셨다.
“강민혁, 미쳤어?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란 거 알잖아.”
“어차피 이번 주에 스파링시켜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기왕이면 저 사람이랑 붙고 싶어서요.”
“너… 하아, 성실한 놈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완전히 또라이 새끼였네. 썩을… 그래, 나도 모르겠다. 이제 얻어터지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의 인사를 표했을 뿐인데 무엇 때문인지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리시던 관장님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너, 이 자식… 하아, 위험하면 바로 정지시킬 테니까!”
“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 관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나는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링 위로 올라섰다.
그때까지도 이시형이란 자는 헤드기어도 쓰지 않고 로프에 두 팔을 걸친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음, 아니다. 비웃는다고 보는 게 정확할지도.
“썩을 새끼, 이젠 울어도 소용없어. 무릎 꿇고 빌게 만들어주마.”
“지면 얼마든지 해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사과해라. 바퀴벌레라고 말한 거.”
“뭐, 인마?”
“네 혓바닥으로 내뱉은 말… 하라고, 사과.”
“하,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냐?”
난 별다른 말 없이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그런 내 행동이 가소로웠는지, 그는 몇 번이나 기찬 웃음을 터트렸다.
“관장님, 공 울리쇼!”
“초보자가 상대니, 1라운드 원 녹다운제로 간다. 그리고 넌 헤드기어나 써!”
“그런 거 필요 없슴다. 룰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어서 공이나 울리라고요!”
상대는 일부러 보란 듯이 껄렁거렸다. 헤드기어를 쓰지 않은 것도, 여유 있는 비웃음도, 파이팅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몸을 풀고 있는 동작까지… 전부 나를 도발하기 위한 행동이겠지.
뭐, 충분히 이해는 간다. 나는 고작 두 달 된 초보자니까. 프로 선수가 진지하게 임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리라.
반대로 나 역시 가소롭게 생각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왜 웃어? 실성했냐?”
‘네가 같잖아서’라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로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을 상대란 걸 알기에.
“애새끼들이 꼭 복싱을 합법적인 싸움판인 줄 알아. 이 새끼들아, 복싱은 스포츠야! 하여간 어린놈의 새끼들은. 그럼 시작한다. 파이트!”
직접 심판으로 나선 관장님이 나와 그를 링 중앙에 대치시킨 후, 파이트란 말과 함께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보통은 여기서 서로 글러브를 맞댄 후 시작하겠지만… 어련할까, 그는 매너도 없이 대뜸 주먹부터 휘둘렀다.
“읏!”
간신히 뒤로 물러나 코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냈다.
“어쭈? 피했어?”
그는 제법 다시 봤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겁이나 줄 생각으로 가볍게 날아온 주먹이라 피할 수 있었지, 진심으로 자세를 잡고 잽을 날렸더라면 보지도 못하고 얻어맞았을 것이다. 그만큼 상대의 주먹은 상상을 초월하게 빨랐다.
프로는 거저 얻은 게 아니라는 건가.
“그래도 반사 신경은 어느 정도 된다, 이거냐? 좋아, 이것도 피하나 보자.”
그는 통통, 가볍게 풋워크를 시작했다. 무척 가벼워 보이는 몸놀림이다. 아무래도 스피드를 중시하는 타입인 듯싶었다. 관장님이 그걸 뭐라고 했는데… 그래, 아웃복서 타입.
“뭘 장승처럼 굳어 있어? 가르쳐 준 거 전부 잊었냐! 다리를 써!”
골몰히 생각하고 있는데, 관장님은 내가 상대의 기량에 겁먹은 줄 아셨는지 크게 호통치셨다.
나는 우선 가르침받은 대로 기본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까 몸은 옆으로 비스듬히, 턱은 당기고… 대충 이런 식이던가.
“어쭈? 그래도 초짜치곤 자세는 그럴듯한데?”
그는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니, 이것도 분명 비웃는 거겠지.
“그래, 가드 올려라. 형님 나가신다!”
순간, 상대가 내 앞에서 사라졌다. 일순간 옆으로 턴해 시선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가드 너머로 묵직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정통으로 맞진 않았지만, 역시 하반신 단련이 좋지 못해 그 한 방만으로도 몸이 휘청거리고 말았다.
“고작 그 한 방으로 나가떨어지지 마라, 애송…….”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는 연거푸 주먹을 휘두르려다 갑자기 멈추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어?”
“응?”
의아스런 행동에 심판을 보던 관장님도, 구경하던 관원들도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어? 왜 내가…….”
본인 역시 당황한 것인지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프로네. 가볍게 내뿜었을 뿐인데 그 살기를 포착하고 피하다니. 본능적인 감이 좋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겠지만, 만약 각성자라면 꽤 잘나가는 헌터였을지도.
“뭐, 뭐야? 어째서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글러브가 나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뭐,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반응이 당연한 거려나.
“설마 내가 저 초짜한테… 쫄았다고?”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눈치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무심히 어깨를 풀며 말했다.
“너, 살인자랑 마주한 적 없지?”
“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발로 밟아 뇌수를 터트리고, 눈알을 뽑고, 칼로 목을 찌르는 걸 가볍게 해내는, 그런 사람 본 적 있냐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어지간히 당황스러운지 목소리에 잔뜩 떨림이 담겨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말이야, 하도 피를 뒤집어써서인지 눈빛이 다르다고 하더라. 피 냄새가 박혀 있는 듯한 눈이라나? 그래서인지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겁먹고 말더라고. 아무래도 생리적으로 거부반응이 있는 걸까? 그래서 너에겐 어찌 보이려나, 내 눈이?”
“헛소리하지 마!”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프로라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뭐, 이 정도인가. 슬슬 장난은 그만 쳐야겠다.
“와라.”
말장난도 지겨워져 다시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이 새끼가 정말!”
그는 전부 헛소리라고 판단한 걸까, 아니면 얕보였다고 생각한 걸까? 알 순 없지만, 이를 으드득 갈며 돌진해 오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화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대단하네. 공포심이 각인되었을 텐데, 복싱을 오래한 만큼 공포를 마주하는 것이 익숙한 걸지도.
폭풍 같은 잽이 연달아 날아왔다. 역시나 프로답게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먹이 날카롭고 빨랐다.
하지만 난 고개를 트는 것만으로 너무도 쉽게 전부 피해냈다.
“뭣!”
“저게 뭐야!”
“와!”
링 아래서 여기저기 탄성의 목소리가 터졌다. 수틀리면 당장에라도 끼어들겠다는 듯이 대기하시던 관장님마저도 두 발을 땅에 붙인 채 입만 쩍 벌리셨다.
어째서 피할 수 있느냐고? 당연히 마력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지.
아무리 생사를 무수히 넘어온 나라 할지라도 복싱을 배운 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된 상태에서 프로 선수를 평범하게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마력의 힘을 빌리는 중이었다.
아, 물론 신체 능력을 강화한 것은 아니다. 나는 서포터니까.
머리에 마력을 모은 나로서는 신체 능력을 강화할 순 없지만, 딱 하나 강화할 수 있는 게 있다. 그건 바로 눈.
단순히 시력을 강화하는 게 아니다. 마력의 힘으로 평소 볼 수 없는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벽을 관통해 본다거나,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무언가를 본다거나, 사물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본다거나, 혹은 미래를 본다거나.
그래, 지금 내가 보는 건 바로 미래다. 즉, 미래 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