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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9화

미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하리라(3)

생각해 보라. 염동력도 겹겹으로 쌓아 밀도를 높여 강도를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느냐의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충분히 해볼 가치는 있어 보였다.
우선은 가볍게 아까처럼 허공에 염동력 갑옷을 생성해 보았다.
이것까진 가볍게 클리어.
다음은 똑같은 형태로 겹치듯 갑옷 위에 갑옷을 둘러쌌다. 이 공정이 살짝 버거웠지만, 몇 번 착오를 거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염동력 혈호 다섯 개로 무차별 공격을 시도했다. 물론 이번엔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주위를 염동력으로 둥글게 감싸 방음하는 걸 잊지 않았다.
어라? 가만 보니 이렇게 염동력으로 공기를 차단해 질식시키는 것으로 상대를 가볍게 제압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아차차,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똑같이 반복해 실험해 본 결과, 정확히 스물여섯 방에 모두 깨져 버렸다.
안 돼. 이래서야 단순히 5분 버틸 게 10분으로 늘어난 정도에 지나지 않는가.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겹겹이 수를 늘려도 B등급 마물의 공격에는 한 방에 전부 깨져 버릴 것이다.
후, 그럼 달리 생각해 보자. 그래, 단순히 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밀도 자체를 높이는 건 어떨까? 마치 검을 만들 때 접쇠란 기술로 철을 접어 강도를 높이듯 말이다.
생각보다 그럴듯해 바로 시도해 보았다.
그러니까 처음과 같이 기본적인 염동력을 생성, 여기서 갑옷의 형태로 이미지를 굳히기 전에 압축하듯 밀어붙여 부피를 줄…….
“큭!”
압축하는 과정에서 사달이 일어났다. 예상보다 반발력이 커 조금이라도 의식을 풀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밀어붙여 아까 갑옷 두 개를 만든 분량만큼 염동력을 압축하는 데 성공하긴 했다. 문제는… 여기서 도저히 갑옷의 형태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형태를 바꾸지 않고 압축한 그대로 단순히 사각 철판의 이미지를 담아 굳힌 다음, 똑같이 실험해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아무리 염동력 혈호로 공격해 봐도 부서지지 않은 것이다.
“강도와 내구성 모두 증가했어. 하지만 이래서야…….”
확실히 실험은 성공이다. 이 압축한 염동력을 몸에 두른다면 총탄이든 뭐든 전부 막아내는 최강의 갑옷이 되겠지. 하지만 이건 실패작이나 다름없다. 설사 갑옷으로 변환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상태가 불안해서야 폭탄을 입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단순히 폐기하기도 아깝긴 한데…….”
억지로라도 이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어찌하면 좋을까? 우선 압축한 염동력을 갑옷의 형태로 바꿀 수 있을 만한 정신력을 키워야겠지. 그건 몸 안에 저장되는 마력량에 비례해 강해지기도 하니 꾸준히 마력을 흡수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다음으론?
무엇보다도 의식하지 않더라도 압축된 염동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하지만 이게 가장 큰 어려움이겠네. 내가 말해놓고도 가능할지 의아스러울 정도니까. 하지만…….
“뭐, 해볼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이런 것에 강해지기를 포기할 정도라면, 애초에 서포터로 전향하지도 않았다. 전에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나에게 있어선 가능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내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다음 날부터 두 번째 마력을 흡수할 장소로 창덕궁 아래 있는 창경궁과 그 아래의 종묘까지 위치를 잡고 마력을 흡수할 때도, 체육관에 있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까지도 압축한 염동력을 생성한 채로 지냈다.
물론 터질 위험에 대비해 크기는 콩알만 하게 줄여놓은 상태다. 이 정도면 만약 실수로 터트린다 해도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며칠간 몇 번이나 실수로 터트렸는지 모르겠다. 어머니하고 현주가 요즘 어디선가 풍선 터지는 소리가 자주 들려온다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더불어 이것 때문에 긴장을 풀 수 없어 얼마나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는지, 눈가가 아플 정도에다 며칠간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내 몸에 일부가 되도록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나는 노력…….
“오빠.”
“어?”
“혹시 변비야?”
“아들, 안 나오면 약 먹어. 참지 말고.”
…하던 와중 동생하고 어머니에게서 들은 소리였다.
아아, 훈련이란 참으로 고단한 것이로구나.

* * *

“원투, 피하고, 라이트. 팔 안 올리냐!”
“옙!”
제길, 힘들다. 글러브가 납덩이처럼 무거워 자꾸 팔이 아래로 내려갔다.
“발이 멈췄다. 주먹과 동시에 앞발 내밀어야지!”
“네, 넵!”
“위빙이 느리다! 좀 더 상체를 써. 어허, 허리 비었잖아!”
숨이 턱까지 차올라 대답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체육관을 다닌 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된 나에게 이 무슨 시련이란 말인가.
분명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에 체육관에 나와 간단한 유산소 운동 후, 늘 그렇듯이 샌드백을 상대로 섀도복싱 중이었다.
이것이 항상 내가 하던 일과였는데, 지금껏 눈길도 안 주시던 관장님이 갑자기 자세를 봐준다며 뜬금없이 나를 링 위로 불렀다. 그로부터 이처럼 집요한 미트 교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벌써 지쳤냐? 남자 새끼가 근성이 없어! 자, 그만. 여기까지.”
“가, 감사합니다.”
“근육이 굳지 않게 몸 풀어둬.”
펀칭 미트를 벗으시며 툭, 내던지듯 조언하신 관장님은 어깨에 두른 수건을 털어내며 관장실로 들어가셨다. 그렇게 관장님이 사라지기 무섭게 나는 쓰러지듯 링 바닥에 드러누웠다.
와아, 바닥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네.
“강민혁 씨, 수고했어요.”
한창 차가움을 만끽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얼굴로 수건을 내밀었다. 슬쩍 돌아보니 자주 본 관원이었다.
“고마워요, 선배.”
“선배라뇨,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그냥 편히 부르세요.”
그는 운동하는 젊은 사람답지 않게 겸연쩍어 하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이라고 했던가. 그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니 그럴 만도 하겠구나.
“힘들죠?”
그는 땀을 닦고 있던 내게 슬쩍 목을 내밀며 물었다. 관장실 안쪽을 살피며 말하는 것을 보니, 뭔가 몰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싶었다.
“그럭저럭 견딜 만해요.”
거짓말이 아니라 기절할 만큼 몸을 혹사해 본 적도 있기에 이 정도는 버틸 만했다. 하지만 그는 빈말로 들렸는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강민혁 씨는 축복받은 거예요. 입관한 지 두 달째죠? 이렇게 빨리 관장님이 교정 봐주는 건 강민혁 씨가 처음일걸요?”
응?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옆으로 꺾자, 그는 투덜거리듯 말을 이었다.
“저희 관장님, 관원들 안 봐주기로 유명해요. 싹수없는 관원들은 내쫓기로 더 유명하고요.”
“어째서죠?”
“그게요, 관장님이 한창 열심히 키우던 새끼… 아니, 선수가 한 명 있었는데, 그놈이 프로 데뷔하고 좀 잘나가니까 배신 때리고 다른 유명한 체육관으로 이적했거든요. 그 뒤부터 저 모양이세요.”
아무래도 특별한 사건이 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강민혁 씨는 다른 운동 하다 오셨나 봐요?”
“아뇨. 딱히.”
“에이, 거짓말 마요. 아무 운동도 안 하고 고작 두 달 만에 관장님의 미트를 따라갔다고요? 언뜻 봐도 자세가 잡혀 있던데.”
뭐라 답변하기도 어려워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감탄한 듯 나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진짜 여기가 처음이라고요? 와, 그래서 관장님이 어제 그런 말을 하신 거구나.”
“그런 말이라뇨?”
의아해하며 묻자 그는 다시 한 번 슬쩍 관장실을 살펴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 강민혁 씨 퇴실할 때, 관장님이 뒷모습을 보면서 ‘아깝네’라고 중얼거리셨어요. 처음엔 헛들은 건 줄 알았는데, 진짜 그 천하의 관장님이 그렇게 말했…….”
“안성태, 말이 많다!”
“으헉! 죄송합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갑작스러운 호통에 안성태라 불린 선배는 기겁해 차렷 자세를 취했고, 나 역시 덩달아 깜짝 놀라 앉은 자세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말았다.
“뭔 놈의 남자 새끼들이 그렇게 수다를 떨어? 여기가 카펜 줄 알아? 그리고 강민혁, 다음 주에 스파링 잡을 테니까, 그리 알아.”
“네? 스파링이요? 강민혁 씨 입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그래서 뭐?”
“위험하지 않아요?”
“그건 내가 판단해. 강민혁, 알았지? 그렇게 알아둬.”
“네,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관장님은 다시 휑하니 관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와, 벌써 스파링이라니.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그런가요?”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아무튼, 축하해요. 그래도 스파링은 조심하셔야 해요. 잘못하면 골병드니까. 오늘 고생하셨어요.”
“아, 네. 고마워요.”
파이팅이라며 주먹을 쥐는 선배에게 나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사실 이때만 해도 별일 없을 줄 알았다. 스파링쯤이야 수없이 생사를 넘나들며 마물과 싸워본 나로선 무서울 것도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사건은 그다음 주에 일어났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체육관에 들렀는데, 무슨 일인지 바닥에 백 원짜리 동전에 수없이 쏟아져 있고, 안성태 선배가 어느 처음 본 남자와 싸우는 걸 보게 되었다.
“이봐요! 이러시면 어쩝니까?”
“왜? 위약금 물으래서 돈 가져왔는데.”
“위약금인지 뭔지 나는 알 바 없고, 바닥에 이거 어쩔 거냐고요.”
“줍든지 말든지,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고.”
“뭐요? 이 사람이 미쳤네.”
“미쳐? 좆 고딩 거지새끼가 싸가지 없게…….”
“뭐? 이 새끼가 돌았나. 프로면 아마추어들은 다 좆으로 보이지?”
“그래, 이 새끼야. 다 좆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쩔 건데? 또 한 대 칠래? 이번에도 관장한테 뒤 닦아달라고 빌어보게?”
“뭐? 이 새끼가!”
“안성태, 그만둬!”
둘이 치고받고 싸우기 직전, 관장님이 말렸다.
나는 입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좀 더 사태를 관망했다.
“혹시 둘이 무슨 사이입니까? 뒤 닦아주는 줄은 알았는데, 설마 진짜 대주고 있는 거 아냐?”
“미친! 저 호로새끼가!”
“냄새나니까 소리 좀 그만 지르지? 아니면 스파링 함 뜰까?”
“이시형, 행패 그만 부리고 가라.”
“어이구, 거지새끼 묵사발 날까 봐 말리는 겁니까? 하긴 골병들면 약 살 돈도 없을 테니, 곤란하겠네.”
“저 호로새끼가! 관장님, 프로든 뭐든 저딴 새끼 날려 버릴 테니, 붙여주십쇼!”
“시끄러! 넌 가만있어.”
“관장님!”
“못 알아들었냐? 넌 저놈한테 안 돼.”
대놓고 안 된다고 단정 지은 게 큰 충격이었을까, 선배는 어금니를 으드득, 가는가 싶더니, 욕지거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얼핏 내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눈시울이 젖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