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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8화

미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하리라(2)

“선배님들,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민혁 씨,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
“어, 그런데 벌써 점심인가? 저 사람, 부지런도 하지. 시간은 칼같이 맞추네.”
“이야, 강민혁 씨는 참 대단하네. 처음 봤을 땐 깡마른 멸치였는데, 고작 한 달 만에 몰라보게 변했던데? 요즘엔 꽤 빡빡한 스케줄도 곧잘 따라 하지?”
“아이고, 선배님. 말도 마세요. 그것 때문에 민혁 씨 본받으라고 관장님이 난리라니까요.”
“넌 좀 본받아야지, 인마. 그렇게 게을러서 쓰겠냐.”
“아, 선배님까지 잔소립니까!”
“하하하하하!”
재미있는 얘기라도 하는 걸까? 체육관을 나서기 무섭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내 얘기를 하던 거 같던데, 설마 나… 따돌림당하는 건 아니겠지?
살짝 걱정스러웠지만, 설마 그러겠나 싶어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내고 오늘도 여지없이 창덕궁을 찾았다.
“드디어……!”
주변을 돌며 마력을 흡수하길 두 시간. 마지막 남은 마력 덩어리를 흡수하는 데 성공한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 없는 함성을 내질렀다. 이 커다란 창덕궁에 있는 마력을 전부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참으로 오래 걸렸다. 이런저런 것까지 다 합치면 거의 두 달쯤 걸렸을까. 이런 페이스로 다른 마력 스폿도 점령하면, 마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부 독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그전에 먼저 내 몸에 한계가 찾아온다는 것이겠지.
고작 이곳에 마력을 흡수한 것만으로도 체내에 마력이 반 이상 채워진 느낌이다.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많아야 세 군데 이상 취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하아, 설마 이 정도로 자질이 뒤떨어질 줄이야.”
사람마다 성격과 체질이 다르듯 몸 안에 마력을 담아둘 수 있는 한계도 저마다 다르다.
보통 아무리 자질이 뒤떨어져도 C등급 이상은 쌓을 수 있고, 최대로는 AAA등급까지 가능하다고 할까. 사실 그 정도도 천재라 평가받는 정도고, 평범한 자는 A등급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중에 S등급에 도달하는 자들은 말 그대로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이나 가능했다.
한국에선 유일하게 딱 한 명 존재했다. 영웅이라 불린 한국 랭킹 1위의 발화 마스터 윤혁. 2차 침공 때 나타난, 함선만 한 크기의 드래곤을 정면으로 상대해 진정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윤혁이 인터뷰에서 말하기론, S등급에 도달하기 위해선 단순히 마력을 모으는 게 아닌,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무협지에서나 말하는 그런 깨달음이.
그렇기에 우리는 AAA등급의 벽을 넘어선 자들을 마스터라 칭했다. 그중에서도 SSS등급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초월자라 부르는데, 실상 사람 중에 SSS등급까지 올라선 자는 존재하지 않고,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천족이었던 베르디가 SSS등급이기에 그걸 토대로 분류만 했을 뿐이지.
어쨌든 지금 내가 흡수한 마력의 양은 대충 과거 어택커로 활동할 시절보다 약간 더 많은 정도였다. 그때가 D등급이었으니, 지금은 대충 C등급 언저리 되지 않을까.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두 군데의 마력 스폿을 전부 흡수한다 치더라도 B등급 이상은 올라서기 어려울 것이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내 한계는 B등급까지라는 것. 이러니 한숨이 절로 나올 만하지 않겠는가.
“이대로는 안 돼.”
마력을 더 쌓을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취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머리뿐만 아니라 단전까지 열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물론 위험한 발상이다. 전에 말했다시피 머리와 단전을 동시에 연 자는 없으니까. 괜히 욕심 부리다 되레 두 번 다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아냐, 급할 건 없어. 이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보류해 두자.”
당장은 지금처럼 마력을 모으는 게 우선이다. 게다가 헌터의 강함은 단순히 마력의 양만으로 치부되지 않으니까.
헌터의 강함은 쌓은 마력의 양과 그를 다룰 줄 아는 능력, 그리고 초능력 이해도, 훈련의 성과 등 여러 가지 요소로 판단한다.
이게 빈말이 아닌 게, A등급이었던 리더가 마력량이 더 높은 AA등급의 헌터를 모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직접 나에게 해준 말이었으니까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느 정도로 강해져 있을까?
마력량만 보자면 C등급 정도 되겠지만, 실질적인 실력은?
염동력을 다루는 연습도 꾸준히 해왔으니, 꽤 강해지지 않았을까?
문득 지금 내 상태가 궁금해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잠시 살펴본 나는 재활용 쓰레기통 안에 있는 빈 캔 십여 개를 염동력으로 공중에 높이 던져 올렸다.
그와 동시에 반경 20m 안에 있는 모든 돌멩이를 염동력으로 장악해 캔을 향해 던졌다.
까가가가가가가가강!
호쾌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리던 빈 캔들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응, 이건 쉽다. 염동력 자체를 이미지해 구현시키지 않고 단순히 주위 물건을 장악해 다루는 건 하품이 나올 만큼 쉽구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F등급 마물을 처리하는 정도밖에 쓸 수 없겠지. 그럼 만약 구현화시켜 공격한다면?
차분히 염동력을 이미지해 검의 형태로 만들었다. 그러자 야수의 송곳니처럼 완만하게 굽은 형태의 단검이 만들어졌다. 이건 회귀 전에 내가 애용하던 혈호(血虎)와 흡사… 아니, 완전히 똑같았다.
혈호는 레드 타이거의 붉은 이빨을 다듬어서 만든 무기였다. 그래서 단검도 피처럼 붉기에 나는 혈호라 이름 지었다.
그동안 중세 시대의 검이나 도를 이미지해 장검도 만들어봤는데, 역시 이게 가장 이미지하기 편하며 쉽고 빨랐다. 아무래도 내게 익숙한 것을 이미지하는 게 정신력 소모가 덜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앞으로 ‘염동력 혈호’라 부르기로 했다.
사방으로 날아간 빈 캔을 다시 주워 와 아까처럼 공중에 높이 던져 올리고, 이번엔 염동력 혈호를 다섯 개 생성해 절단해 보았다.
그러자 전부 매끄럽게 잘려 버리는 빈 캔들.
어라? 이것도 쉽다. 잠깐, 이거 더 가능한 거 아냐?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염동력 혈호를 다루는 건 최대가 다섯 개가 한계였는데, 설마…….
혹시나 싶어 염동력 혈호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추가로 만들어봤다.
여섯, 일곱, 여덟, 아, 아홉, 세상에… 더 만들 수 있다고?
열 개 이상을 만들었는데도 그다지 지치거나 힘들지 않았다. 저번에 실험해 보기엔 염동력 혈호는 돌덩이도 두부처럼 잘라냈다.
그 말인즉, 돌처럼 단단하다는 D등급 마물의 외피도 뚫고 베어버릴 수 있다는 뜻인데, 그런 염동력 혈호를 열 개 이상 동시에 만드는 게 가능하니… 열 마리 이상의 D등급 마물 무리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공격만 놓고 보자면 B등급 실력자에 가까울지도.”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두 달 만에 과거의 내 등급을 두 단계나 뛰어넘어 버렸다는 게 아닌가.
과거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택커로서 D등급까지밖에 올라설 수 없었다. 물론 육체가 마력을 버티지 못해 안정될 때까지 마력 흡수 단련을 소홀히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C등급까지가 한계였을 것이다.
그러던 내가 고작 두 달 만에 B등급이라니, 10년이나 노력해서 겨우겨우 D등급에 올라선 과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쓰레기 청소부라 불리던 서포터가 마력량만 뒷받침되면 이렇게 무시무시해지는구나.
물론 방어적인 측면에선 한없이 약하지만, 대부분 원거리에서 처리할 수 있으니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아냐, 방어도 가능했어.”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언젠가 TV 쇼에서 나강철이 염동력으로 총탄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걸 본 헌터들은 서포터도 능력만 뛰어나면 나름 쓸 만한 것 같다며 칭찬이 자자했기에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 그는 염동력을 거대한 보호막처럼 펼쳐 원거리에서부터 모든 적을 차단하는 식으로 방어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완전히는 불가능하지만, 적의 발목을 붙드는 정도로 속도를 감속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했던가. 그 염동력들을 한 점에 집중하면 이렇듯 총탄도 막아낼 수 있다고 했지.
그럼 나 역시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면, 방어적인 측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문제는 보호막을 거대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마력과 정신력 소모도 커지기에 비효율적이라는 점, 또 하나는 주위에 동료가 있을 시, 적뿐만 아니라 아군의 움직임까지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가 최악이다. 혼자서 적진을 휩쓸 때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럼 방어막을 최소한도로 줄인다면?”
그러니까 내 몸에 옷을 두르듯… 아니, 아예 갑옷을 걸친다는 느낌이 좋겠어.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이미지로 염동력 혈호를 구현할 수 있다면, 갑옷을 연상시켜 몸에 두르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성공만 한다면 강철보다도 단단한 염동력 갑옷이 되겠네.
“좋아.”
이참에 한 번 실험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선은 가볍게 염동력을 일으켜 몸 주위에 두르고, 그것을 단단하게 고정, 이미지를 부여해 강화…….
그 뭐라더라, 풀 플레이트 메일이라든가, 대충 중세 시대 영화에서 은색 갑옷을 온몸에 걸친 전형적인 기사를 연상해 가며 염동력을 구현시켜 보았다.
염동력이라 눈에도 보이지 않고 무게도 느껴지지 않지만, 내 몸에 확실히 달라붙어 존재한다는 걸 느낀 나는 슬쩍 팔을 휘돌려 불편한 점이 없나 점검해 보았다.
음, 부자유스러운 점은 없다. 요즘엔 이미지한 염동력을 많이 사용해 본 터라 딱히 무리가 가거나 지치지도 않고.
하지만 과연 이게 어느 정도로 방어력이 뛰어날지는 미지수인데…….
마음 같아선 염동력 혈호로 내 몸을 두드리며 실험해 보고 싶지만, 그런 미친 짓은 할 수 없기에 우선 몸에 두른 염동력 갑옷을 풀고 옆에 따로 똑같은 형태의 염동력 갑옷만 생성했다. 즉, 알맹이 없는 인형을 준비한 것이다.
그런 상태로 우선 염동력 혈호 하나로 공격.
팡!
염동력끼리 부닥치니 공기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통 염동력은 공기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이건 이미지화해서 구현시킨 것이니 그런 듯했다.
어쨌거나 한 방은 버텼다. 그 말인즉, 적어도 D등급 마물의 외피보다 강도가 높다는 뜻. 다시 말하면 D등급 마물 이하의 공격은 대부분 막아낸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내구력은 어떨까?
염동력 혈호 다섯 개를 동시에 만들어 시차 없이 염동력 갑옷을 때려보았다.
파파파파파파파팡!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멀리 지나가던 한 커플이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볼 정도였다. 아마도 누가 폭죽을 터트리는 건가 정도로 생각하겠지.
이러다 사람이 몰리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하는 사이,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만들어둔 염동력 갑옷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정확히 열세 방째 때리던 순간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썩 괜찮은 내구력도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라면 총탄 한두 방은 막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어렵겠지. D등급 마물 무리가 몰려든다면 5분도 버티기 어려울 테고.
아, 이래서야 거의 쓸모가 없잖아. 좀 더 강화하는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고민해 보던 나는 문득, 매우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다.
하나로 어렵다면 두 개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