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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6화

다시 과거로 돌아간 후에(3)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목이 잘려 내 발치로 굴러오는 리더와 여동생의 머리가.
그 주위를 둘러싼 마물과 악마 놈의 가증스러운 얼굴까지.
“…제길.”
더러운 꿈에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마지못해 피눈물을 흘리며 선택한 내 결단에 ‘히햐햐햐’ 하고 웃던 놈의 웃음소리가 꿈에서 깬 이후에도 이명처럼 귓가에 남아 있었다.
너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비록 너에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이 원통함만은 그대로 돌려주리라.
도무지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아 눈가에 팔을 얹은 채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각성에 성공한 직후, 잠이 들었던가…….
몇 시간이나 지났지?
슬쩍 창밖을 보니 아직 새벽녘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다. 그럼 이대로 좀 더 자둘까.
다시 잠을 청해 조금이라도 쉬며 피로를 해소할까 생각도 했지만, 흥분했는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결국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회귀 전, 헌터로서 활동할 때의 아침 조깅은 일상이나 다름없기에 익숙하지만, 회귀 후엔 처음인지라 조금만 달려도 숨이 가빠왔다.
그래도 설마 30분도 달리지 않았는데 지칠 정도라니, 헌터가 되기 전까지 내가 얼마나 운동과 인연이 없었는지 한숨이 나올 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마력 이전에 몸부터 만드는 게 순서겠는걸.”
근처 공원의 벤치에 앉아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이만큼 체력이 저질이라면 우선 사항을 조정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력만 사용하는 서포터인지라 체력을 기르는 건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마물의 이빨과 손톱을 피할 수 있을 만한 반사 신경은 갖춰야 한다. 그것도 안 된다면 하다못해 뒤돌아 도망갈 수 있을 만한 체력이라도 키워야 한다. 그 의미 없어 보이는 하나하나가 모여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거니까.
“그렇죠, 리더?”
지금 어딘가에 살아 있을 리더를 불러보았다.
이 말은 리더가 서포터인 김철종 대원에게 한 말이다. 그런 리더의 올바른 생각이 있기에 우리 팀은 바퀴벌레라 불릴 만큼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만큼 증명된 사실이니, 나는 리더의 방침을 믿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체력을 어찌 기른담? 지금은 헌터 양성소가 없으니, 헬스라도 끊어야 할까?
새벽 공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내 눈에 문득 저 멀리 복싱 체육관이 들어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체육관 안은 조용했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적어도 누군가 사람은 있겠지 싶어 조심히 문을 열어보았다.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목만 빼꼼 안으로 들이밀며 사람을 불러보았지만, 내 목소리만 울릴 뿐, 반응은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도 뭐해 안으로 발을 들이며 다시 한 번 사람을 불러보았다.
“누구슈?”
그제야 안쪽, 관장실 또는 상담실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40대 이상이라 추정되는 중년 남자였다. 까끌까끌한 턱수염에 뱃살도 나오고, 대충 입은 동복에 실내화를 질질 끌며 나왔다.
아무래도 어제저녁 한잔하고 지금까지 잠을 잔 듯, 부석부석한 머리를 긁적이며 연신 하품하는 자세가 어쩐지 영 미덥지 않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자가 범상치 않은 싸움꾼이라는 걸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단순히 만두처럼 말려 있는 귀만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자라는 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사람 특유의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기세 같은 걸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헌터로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온 나로선 어느 날부터인가 상대의 강하고 약함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저자가 내뿜는 기세는 딱 E급 마물이 내뻗는 기세와 비슷한 정도였다.
즉, 저자는 각성자가 아님에도 F등급의 몬스터는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이리라.
“무슨 일로 오셨수?”
내가 그를 살피듯 상대도 나를 살펴봤는지, 그는 상당히 미덥지 못하단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나는 운동 한 번 하지 않은, 삐쩍 마른 남자에 불과하니까.
“운동 좀 배우려고요.”
“취미?”
“어, 음… 뭐, 그런 식으로.”
다소 머무적거리며 답하자, 그는 나를 소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여긴 가볍게 다닐 만한 곳이 아니니까, 해변에서 근육 자랑하려고 단련할 생각이라면 저 옆에 헬스장이나 가게.”
말투가 거침없다. 아무래도 나를 며칠 못하고 때려치울 사람으로 본 모양이었다.
“못 미더웠다면 죄송합니다만,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거 아닙니다.”
자세를 똑바로 하고 상대의 눈을 직시하며 평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딱 부러지게 바꿔 말했다.
저렇게 고집 있어 보이고 강직해 보이는 타입은 경험상 이런 방식이 잘 먹힌다. 역시나 졸린 듯 반쯤 내려가 있던 그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아마도 ‘이 녀석 보게?’ 정도쯤 생각했겠지.
“힘들 텐데?”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망설임 없이 바로 답하자, 그는 입을 오므리며 다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따라오게.”
안쪽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입관 원서네. 여기 이름, 연락처, 주소 적으면 되고… 혹시 복싱한 적 있나?”
“아뇨.”
“그럼 물품도 필요하겠네. 여기 사인하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관 원서에 필요한 기재 사항을 적어 나갔다.
“운동은 아예 한 적이 없나?”
“네.”
살짝 망설일 뻔했지만, 의연한 척 대답했다. 운동은 회귀 전에 물릴 듯 해왔지만, 지금은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군대는 다녀온 것 같고… 휴학 중?”
“아뇨. 직장인이었는데 지금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군대 다녀온 건 어찌 아는가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대충 내 행동을 보고 지레짐작한 게 아닐까 생각하며 넘어갔다.
“여기, 다 작성했습니다.”
“그런가? 강민혁이라… 좋은 이름이네.”
잠시 작성된 원서를 살펴보던 그는 만족한 얼굴로 서랍 속에 챙겨 넣으며 다시 내게 물었다.
“그 나이에 복싱은 왜 배우려고?”
그 물음에 살짝 답하기를 망설였지만, 또 머무적거리면 화낼 것 같아서 그냥 거짓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입니다.”
현주가 이 말을 들었다면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질색했겠지. 내가 봐도 중2병 걸린 애가 심취한 영화의 대사를 읊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정말 이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데.
“그런가?”
하지만 괜히 말해놓고 상대가 나를 철없는 애로 인식하면 어쩌나 싶어 슬쩍 눈치를 살폈는데, 놀랍게도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짧게 넘어가 버렸다.
그런 모습이 새삼스러워 눈을 끔벅이고 있자, 그는 눈썹을 와그작 구겼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 아뇨. 아닙니다.”
다급히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딱히 자네를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지켜보면 알 테니까.”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우직한 타입인가? 그렇다면 더 쉽지. 변명할 것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기만 하면 될 일이니까.
“아무튼… 나름 각오는 되어 있는 모양이니. 일도 쉰다고 했지? 내일부터 나오게. 앞으론 나를 관장님이라 부르고, 나는 입장상 편하게 말놓을 테니. 괜찮지?”
“네, 관장님.”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밝게 미소 지어주었다.
“표정이 그게 뭐야? 하대당하는 게 그렇게 싫나?”
…아무래도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또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체육관을 오가며 몸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단순한 기본 유산소 운동도 따라가기 벅찼지만, 역시 해본 바탕이 있어서인지 일주일쯤 되자 곧잘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근육통만큼은 해결되지 않아 여전히 고생하고 있지만.
그쯤 되자 슬슬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관장님은 복싱의 기본적인 자세부터 시작해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과 회피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기본적인 무술의 틀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했던가. 헌터 양성소에서 배운 실전 무술과 흡사한 점들이 많아 며칠 지나자 곧잘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부분이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 보다.
관원 선배들과 관장님에게 정말 운동을 처음 한 게 맞느냐며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어, 그래. 그런데 강민혁, 요즘 탄력 붙었던데… 그러지 말고 시간 비면 오후에도 나오지?”
“죄송해요. 오후에는 일정이 있어서요.”
“일도 쉰다는 놈이 항상 무슨 일정이야? 쯧, 알았어. 가봐.”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도 나는 이른 아침 체육관에 들렀다가 오후가 될 때쯤 밖으로 나섰다.
실은 그동안 체육관에서 몸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따로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체내의 마력을 늘리는 일이다.
“다녀왔습니다.”
잠시 귀가한 나는 혹시 누가 있나 싶어 말해봤지만, 역시 응답은 없었다. 지금 시간에 어머니는 회사에 일 나가 계시고, 현주도 학교에 있을 때이니까 당연하다.
평소라면 나도 한창 일하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나 홀로 집에 들어오니 기분이 묘하네.
뭔가 낯선 집 안을 잠시 둘러보다 적당히 옷만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쫓길세라 급히 내가 향한 곳은 광화문에 있는 조선 5대 궁궐 중 하나인 창덕궁이었다.
우리나라 고궁 중에서 유일하게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
나에게 있어 창덕궁은 솔직히 말해 별로 달갑지 않은 장소였다.
그도 그럴 게, 이 바로 옆 광화문에서 리더와 동생, 그밖에 동료들이 죽기도 했거니와, 마지막으로 인류가 멸망되는 것을 보며 내가 죽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내가 트라우마가 된 광화문을 지나 창덕궁을 찾느냐면, 앞서 말했다시피 마력을 늘리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각성자가 체내에 마력을 모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물을 잡아 마력이 응축된 ‘코어’라는 것을 얻어 직접 흡수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공기 중에 떠 있는 마력을 천천히 흡수해 쌓아가는 방법인데, 헌터는 대부분 전자를 택했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간단히 말해 이런 거다.
하루 여덟 시간씩 공기 중에 떠 있는 마력을 한 달간 흡수한 양과 D등급 마물의 코어 하나를 얻어 흡수한 양이 같은 정도의 효율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쉽고 빠르게 마력을 쌓을 방법이 있는데, 어느 누가 방구석에 처박혀 하루 여덟 시간씩 명상만 하고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후자는 대부분 마물을 잡기 어려운 서포터나 F등급 헌터가 사용하는 방법인데, 지금 나는 바로 그 비효율적인 마력 흡수를 하러 이곳에 온 것이다.
당연히 나라도 현재 마물이 지구에 있다면 더 빠른 방법을 선택했을 테지만, 지금은 천족의 존재조차 모르는 평화로운 때이니 어쩌겠는가. 아쉬운 대로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하지만 딱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결코 평범한 장소가 아니니까.
옛적부터 우리나라는 풍수지리에 능통해 땅의 기운이 강한 곳에 고분이나 궁을 짓곤 했는데, 옛사람들이 말한 땅의 기운이란 바로 마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창덕궁은 마력이 밀집된 터라는 거였다.
평범한 곳에 있는 마력과 비교하자면 대충 열 배 가까이 농도가 짙다고 할까. 확실히 여기 와보니 달랐다. 일반적으로 공기 중의 마력이 희미한 먼지처럼 보인다면, 이곳은 안개 속을 거니는 것처럼 짙었으니까.
즉, 공기 중에 마력을 흡수하는 데 이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곳은 헌터에게 매우 유명한 곳이다. 각성자의 시대가 열린 후에 이런 마력 밀집 장소를 마력 스폿이라 부르게 되는데, 평범한 곳보다 마력 흡수 효율성이 뛰어나기에 날마다 수백 명 이상의 헌터들이 찾곤 하던 장소니까.
하지만 아무리 응집된 마력의 터라 해도 무한하지는 않기에 수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자 금세 마력은 소실되었다. 적어도 다시 회복되는 데 1년 이상 걸린다는 걸 알고 헌터들은 실망하여 떠나게 되었고, 마물의 코어 흡수를 알게 된 후에는 완전히 잊힌 장소이기도 했다.
이제 내가 여기를 찾은 이유를 이해하겠는가.
그렇다. 나는 서울에 있는 조선 5대 궁궐을 시작으로 지방에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마력 스폿까지 죄다 찾아가 독식해 버릴 작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