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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이
5화

다시 과거로 돌아간 후에(2)

외식하고 집에 돌아왔을 땐 어느덧 밤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강아지 얘기부터, 생선회 맛에 대해, 그리고 조금 전에 마주친 현주 친구에 대해서까지 참으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따지고 보면 전부 의미 없는 대화일지 모르겠으나, 오랜만에 외식이라서 그런지 들떠 있는 어머니와 현주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뒤, 일도 쉬는데 괜히 돈 쓴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어머니와 과식했다며 아우성치는 현주까지… 두 사람을 방에서 내쫓는 데 성공한 나는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슬슬 괜찮겠지?”
모두가 곤히 잠든 야심한 시간까지 명상을 하며 기다린 나는 슬쩍 밖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침대 위에 앉아 편안히 자세를 잡았다.
앞으로 1년 후, 기자회견을 통해 천족이 세상에 등장하고, 초능력 기술을 인류에게 전수한다. 그 뒤, 다시 1년이 지나 전 인류의 30%를 잃게 되는 초유의 사건, 게이트를 통해 지구를 침공하는 1차 마물 침공이 일어나게 된다.
즉, 적어도 2년간의 준비가 가능하다는 것.
그 남은 2년이란 시간 안에 내가 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는 바로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신체를 각성하는 것부터가 시작이고, 그 준비를 위해 나는 방해받지 않는 야심한 밤까지 기다린 것이다.
천족이 가져온 ‘각성의 돌’이라는 것을 만지는 것으로 인류는 각성할 수 있었다.
각성의 돌이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루비 색 돌멩이를 말하는 건데, 그걸 만지면 재능 여부의 따라 신체가 각성해 공기 중에 떠도는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천족은 이 돌 열 개를 인류에게 주었고, 미국의 주도하에 각국으로 퍼져 대표적인 각성 시험에 쓰이기 시작했다.
당시 각성 시험은 전 국민에게 의무인지라 나는 어머니와 현주랑 같이 청와대로 찾아가 그 각성의 돌을 만졌고, 재능이 있었는지 나와 현주는 각성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각성의 돌을 만져야만 하는가.
그 물음에 답하자면, 각성자가 되기 위해서 꼭 각성의 돌이란 것을 만져야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각성 조건은 돌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돌 안에 들어 있는 힘을 느끼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각성하지 못하는 유전자일 뿐입니다.”

각성의 돌을 만졌는데 왜 자신은 아무런 반응이 없느냐고, 어느 한 사람이 따지듯 묻자 천족 베르디가 한 말이다.
당시 베르디가 말한 대로라면 각성의 돌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겨 있는 힘일 뿐.
우리가 마력이라 일컫는 그 힘은 판타지에 등장하는 마나라는 것이나 인도에서 말하는 차크라, 어쩌면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말하는 생기(生氣)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건 모르겠으나, 그 힘은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속에도, 식물, 동물, 심지어 내 몸 안에도 존재한다.
단지 각성의 돌 안에는 농축된 마력이 강해서 느끼기 쉬울 뿐이지, 꼭 그 돌이 아니라 할지라도 공기 중에 떠 있는 마력만 느낄 수 있어도 신체 각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어려울 것이다. 고도로 압축된 마력을 직접 손으로 만져 느끼는 것과 구름과도 같이 흐릿하게 떠 있는 공기 중의 마력을 느끼는 것은 천지 차이일 테니까. 하나 이미 신체 각성을 경험한 적이 있는 나라면?
나는 이미 각성을 경험한바 있고, 그 힘을 실제로 사용해 본 적도 있다. 정신과 육체가 이미 기억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 내가 마력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자, 보여라.”
공기 중에 마력을 포착하기 위해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두운 방 안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려니 어둠 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만큼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 살펴봐도 도무지 느껴지는 게 없었다. 금방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세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니.
하도 정신을 집중한 탓인지, 눈은 뻑뻑하고 이마에 땀이 맺히다 못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침대 시트는 꿉꿉해져, 올라오는 더운 열기 때문에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쯤 되니 혹시 그동안의 모든 일은 꿈이며, 마력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시작해 오늘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변명 어린 잡념까지 흘러 들어왔다.
제길, 어째서냐. 무슨 이유로 느껴지지 않는 거냐. 나는 마력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으며, 직접 사용도 해봤어. 그런데 왜… 혹시 무언가 내가 놓치는 게 있는 걸까?
회귀 전에 나는 분명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각성의 돌을 만져 그 안에 있는 마력을 느끼고 조금씩 체내에 쌓아 초능력이란 힘으로 방출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 어어?
잠깐, 각성의 돌을 만졌다? 그러니까 마력을 만졌다고? 그래, 그거였어. 단순히 마력을 느끼고 인지하는 게 아냐. 피부로 ‘직접’ 느끼는 거야!
뒤늦게 깨달은 난 웃통을 벗어버렸다. 조금이지만 차가운 밤공기가 맨살에 부딪쳐 시원해졌다. 나는 조금 더 그 기분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눈까지 감아버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언제 숨어 있었느냐는 듯 바로 느껴졌다.
공기와 달리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피부가 짜릿해지는 녀석의 존재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등줄기부터 퍼지는 서늘한 녀석의 존재가.
느껴진다, 공기 속에 숨어 유유히 흘러 다니고 있던 마력의 존재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피부로 느끼니 녀석들도 나라는 존재를 지각한 듯 내 주위로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마력이란 개구쟁이 요정처럼 한곳에 머무르길 거부하는 녀석이지만, 한 번 존재를 알아준 상대라면 써먹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한곳에 고착되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 변덕쟁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체내에 마력을 모아둘 수 있고, 마력을 이용해 무한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 와라. 내가 기꺼이 너희를 써주마. 이 내가 바로 인류 최초로 너희를 인지한 사람이며, 사용해 줄 초능력자니까.
정신을 집중해 불러들이자, 공기 중의 마력들은 체내와 연결된 코와 입, 귀를 통해 점차 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몸속 여기저기서 힘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동반되는 것과 동시에 가려운 곳을 긁어내는 듯한 쾌락이 느껴졌다.
이건 아마도 혈액 속에 떠돌고 있던 내 본래 마력이 새로 유입된 마력을 거부해 서로 충돌하며 느껴지는 고통인 동시에, 체내가 마력의 충돌로 인해 서서히 각성해 가는 쾌락이리라.
그 번갈아 찾아오는 고통과 쾌락을 버티던 나는 드디어 새로 유입된 마력이 흡수된 것인지, 몸 안에 힘차게 돌아다니는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쯤 되자 눈으로도 마력의 존재를 지각할 수 있게 되었다. 희미한 안개처럼, 또는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처럼 정해진 방향 없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녀석들을 말이다.
그만큼 몸이 각성하였다는 것을 뜻했고,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녀석들을 조종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에 나는 기쁨을 감추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자, 집중하자.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나는 체내의 마력을 머리로 유도했다. 그러자 혈액과 함께 몸속 전체를 돌아다니던 마력들이 내 의지에 따라 서서히 머리로 모여들었다.
“웁!”
과도한 마력이 머리로 모이자 두통과 함께 극도의 매스꺼움이 느껴졌다. 간신히 구역질을 참고 버티자, 이번엔 마력이 빠져나오려는 듯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마치 비좁은 걸 버티지 못해 터지려 하는 풍선처럼 말이다.
회귀 전에는 마력을 배꼽 아래, 단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때는 두통 대신 복통이 느껴졌지만, 빠져나오려는 반발력은 그때와 똑같았다.
그렇다면 버텨야 한다. 버텨야만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나 버텼을까, 쨍! 유리 깨지는 소리가 귀에 들린 것 같았다.
한순간 머리가 시원해지는가 싶더니, 극도의 쾌락이 느껴져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 위로 떠오를 것만 같은 이 기분. 성욕을 풀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약을 하면 이 정도일까?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신 느끼지 못할 쾌락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걸로… 성공이라 할 수 있으려나?”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상태를 살폈지만, 영 아리송하다. 회귀 전에는 단전에 물이 꽉 찬 포만감과 더불어 눈에 띄게 육체적인 힘이 증가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딱히 변한 점을 찾기 어려웠다.
으음, 굳이 달라진 점을 꼽자면, 상당히 피곤하던 머리가 지금은 맑아졌다는 것 정도일까?
머리로 생각만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기에 나는 당장 각성한 힘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정신력을 집중해 마력을 일깨우자 머릿속에 있던 마력이 슬금슬금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 무게도 없는 땀이 흘러나와 두둥실 떠오른다고 해야 할까.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아지랑이 같아 무척 생소한 느낌이었다.
단전에 쌓아둔 마력을 체내 곳곳으로 보내 근력을 강화할 때와는 너무도 다르구나. 이건 마치 내 몸속에 기생하는 생물을 명령해 조종하는 듯한 느낌이다.
너무나 신기해 한동안 마력을 손바닥 위에 올려 찰흙 만지듯 가지고 놀다 책상을 향해 흘려보내 봤다.
빠르진 않지만 흘러가는 물처럼 의지에 따라 뻗어 나가던 마력은 책상 위에 있는 펜 하나를 포착, 명령에 따라 감싸 안았다.
좋아, 그대로… 들어 올려.
강렬한 의지를 보내자 마력은 즉시 힘이 되어 펜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술처럼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는 펜.
“해냈어!”
지금 나는 서포터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초능력, 즉 염동력을 사용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하핫, 이거 재미있네.”
펜을 들어 올린 상태로 빙글빙글 돌려도 보고, 좌우로 이동도 시켜보고, 비행기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날려도 보았다.
정신력이 꽤 소모되고 마력도 모자라 금방 지쳤지만, 어릴 적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의 기분이 들어 재미는 있었다.
이것저것 실험하던 도중, 혹시 무거운 것도 가능할까 싶어 의자를 들어 올려보려고 했지만, 조금 들썩거릴 뿐 들어 올리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지금으로선 펜 하나 들어 올리는 것이 한계인 듯했다.
하,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히네. 아무리 막 각성한 상태라 해도 그렇지, 의자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하는 힘이라니. 이럴 거면 그냥 걸어가 손으로 들어 올리는 게 훨씬 빠르고 편하겠다.
나는 어째서 많은 각성자가 머리가 아닌, 단전에 마력을 모아온 건지 비로소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리도 비효율적이니 다들 서포터를 무시하고 잡무 처리 같은 일거리나 준 거겠지. 이 정도로 능력 효율이 떨어지면 쓰레기 청소부라고 비웃음당할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절망하진 않았다. 이를 해결할 방법을 이미 생각해 두었으니까.
어느덧 밤이 지나고 벌써 샐녘인지 창가 너머로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식어버린 땀을 닦으며 파랗게 짙어져 가는 창을 바라보던 나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주먹을 꽉 쥐었다.
자, 우선 첫 번째 단계는 돌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