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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습격자들(1)



길영은 지나를 감싸고 두 눈을 꼭 감았다.
탱커니까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아무 근거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던 건 오직 이것뿐이었다.
랭크 A이상의 각성자들, 소위 초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상식을 초월한 육체를 가졌다고 한다.
타워에서의 훈련을 마친 자신이라면 혹시.
“핫?!”
방안을 가득 메우던 붉은 광채가 사라진 뒤 길영은 자기 몸이 멀쩡하단 걸 깨닫고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행히 품속의 지나도 무사해 보였다.
“호, 혹시 나도 초인의 경지에 들어선 건가? 야호~ 그럼 내가 벌써 A랭크가-”
“뭔 헛소리야, 병신아.”
“아욱!”
머리에 매운 꿀밤이 떨어지자 길영이 비명을 질렀다.
“혀, 형?”
“끈적하게들 붙어있어서 좋겠다? 시펄, 왜 하필 지들끼리 커플이 되고 지랄이야. 그만 확 팀 깨 버릴까보다.”
“그, 그놈은… 파이어 서펀트는 어떻게 됐어요?”
“내가 무슨 디버프거는 말뚝인 줄 아냐? 니들 향해서 브레스를 쏘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냥 장식품이나 마찬가지 아냐?”
어느새 그의 손엔 예의 그 대검이 들려있었다.
파이퍼 서펀트의 푸른 피가 묻은 채로 그는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그놈 머리통 좀 없앴다고 니들이 이긴 줄 알았어? 멍청하게 긴장 푸는 꼴 보고 ‘에구~ 저건 아직 멀었다’ 했더니 순식간에 고 녀석 머리가 재생되더라. 파이어 브레슨가 그걸 쏘려고 말이야.”
“어, 어떻게 그걸 멈췄어요?”
“뻔하지, 머리를 잘라도 안 죽으면 다른 델 조지면 되잖아. 20년 전에도 머리 자르고 팔다리 뽑아내도 다시 살아나는 놈들이 있었거든. 그럴 땐 반드시 다른 데에 약점이 있는 법이야. 그래서 그걸 박살내 줬지.”
뒤를 가리키자 몸통 한가운데가 거칠게 썰려있는 파이어 서펀트의 시체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 속에는 석탄 덩어리처럼 검게 변한 커다란 핵(核)이 있었는데 그것 또한 두 조각으로 쪼개져버린 상태였다.
지나의 얼굴이 살짝 파랗게 변했다.
“노, 놈이 재생한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헌데 산하 씨 정말 괜찮아요? 파이어 서펀트의 브레스는 일단 발동되면 그전에 죽인다 해도 남아있던 화염이 어디로든 방출되게 되어 있거든요. 놈을 베어버릴 때가 오히려 가장 위험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산하의 옷은 조금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의 피부에도 약간의 화상이 남아 있었다.
“아아, 그거야 뭐 저놈 핵을 파괴했을 때 약간 불꽃이 터져 나오긴 했지. 하지만 별로 대단치 않아서 다행이었어.”
“그럴 리가… 놈의 파이어 브레스는 폭발한 폭탄과도 같아요. 그 정도로 끝났을 리가 없는데.”
“몰라, 어쨌건 난 살아남았잖아. 녀석이 불꽃을 만들다가 사래라도 걸렸던 게 아닐까?”
“…….”
납득을 못하겠단 지나의 얼굴 앞에서 산하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펄, 엿 같은 불도마뱀 새끼. 하필이면 자폭사 할 뻔 했잖아. 적당히 ’먹어‘버렸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스테이크 될 뻔 했네.’

***

“우와~ 형님 이것 보세요! 이거!”
파이어 서펀트의 잔해를 뒤진 길영이 입이 귀까지 찢어져서 달려왔다.
“뭔데?”
“타워 키에요, 타워 키! 히야!~지금 이걸 팔면 몇 억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응, 그래. 그리고 전이석은?”
대박이 터졌음에도 영 밋밋한 산하의 반응에 길영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어, 없어요. 이번엔 안 나왔네요. 하지만 보세요, 여기 타워 키가 나왔다니까요? 떼돈 벌었다고요.”
“에이 씨… 그럼 또 이놈 잡으러 와야 한단 거냐? 드럽게 귀찮네.”
“넹?”
멍하니 입을 벌린 길영을 보며 산하가 얼굴을 찡그렸다.
“야, 다음엔 나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할 테니 니들끼리 알아서 잡아. 내 옆에서 배웠다는 놈들이 그렇게 어설퍼서 어쩔래? 여기가 게이트였으면 니들은 이미 괴물 위장에서 온천욕 즐기고 있었어.”
“어, 에… 그건…….”
“대박 쳤다니 잘 됐네. 타워 킨가 그거 팔아서 방어구라도 좀 제대로 맞춰. 또 븅신 같이 무기 샀다간 그걸로 니 뚝배기 깨버린다.”
“어, 넵… 근데 형은 대박친 거 안 기뻐요?”
“우리 집엔 내가 헌터 짓해서 번 돈은 죽어도 안 받겠다는 고집불통 녀석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시펄, 이러면 돈이고 뭐고 나한텐 별 의미가 없어.”
“헐… 대체 누구신데 그래요?”
“내 여동생. 몬스터계의 대왕마님 같은 년이다, 제기랄.”
오늘 집에 들어가야 하는 강산하는 빡친 강예정의 도깨비 같은 얼굴을 떠올리며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씨팔, 누가 좀 안 잡아가나… 아니지, 잡아가는 놈이 더 불쌍하지. 에휴~ 내 매제도 참 불쌍한 작자라니까. 골라잡을 여자가 없어서 하필이면 그런 트리케라톱스 같은 년을 마누라로…….”
푸념을 늘어놓던 순간 산하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보스방에 단 하나 있던 문 쪽을 노려보았다.
“뭐야 니들? 재수 없게 숨어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
“…….”
길영과 지나도 그곳을 바라보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형, 왜 그래요? 저기엔 아무도 없어요.”
“방금 내가 봤어. 그리고 그건 분명 몬스터가 아니야.”
“그럼 다른 헌터란 말이에요? 그럴 리가요.”
길영과 함께 문으로 다가간 지나가 문 바깥까지 가볍게 둘러보곤 손을 내저었다.
“역시 아무도 없어요. 기억 안나요, 산하 씨? 헌터들이 서로 마주치기 시작하는 건 던전 11층부터예요. 여긴 10층이라고요.”
“지나 너 이럴 땐 은근 머리가 안 돌아간다? 던전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고 네 입으로 말해 놓고 벌써 까먹은 거냐?”
그녀가 말문이 막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문 쪽에서 뱀처럼 교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타워 키라고 하지 않았나, 애송이들?”
“누구야?!”
길영이 소리친 순간 갑자기 정전이라도 된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
이곳은 던전, 애당초 조명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으으윽!”
그 몇 초간의 암흑이 지나가고 다시 앞이 보인 순간, 길영과 지나는 자신들의 목 앞에 짧은 칼날이 가로질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둘 다 이미 뒤쪽에서부터 제압당해 있는 상태였다.
“대, 대체 어느 새에…”
“뭘 그리 놀라? 고작 10층 클리어에 좋아하는 초보 녀석들, 뒤통수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흐흐.”
나타난 녀석들은 모두 다섯 명.
길영과 지나를 제압하고 있는 남녀 둘과 앞에서 재수 없게 히죽대는 두 남자, 그리고 뒤쪽에서 혼자 무게 잡고 있는 범상치 않은 모습의 사내가 놈들의 전부인 듯 했다.
“혀, 형…….”
“쯧쯔~ 움직이지 말라구. 이 칼은 아주 날카로워서 스치기만 해도 네 경동맥을 딸 거야. 피가 아주 많이 나올 건데 그러면 옷 세탁하기 귀찮단 말이지.”
“…….”
짙은 살기가 묻어나오는 놈의 말에 길영이 꾹 입을 다물었지만, 별 신경도 쓰지 않는 산하는 그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대체 뭐하잔 건데?”
“이 친구 생각이 없네? 키키킥. 우리가 뭐하는 놈들일 것 같아?”
“한 10초 뒤에 뒈져서 저쪽에서 썩어가고 있을 시체 지망생들로 보인다만.”
“캬~ 요놈 새끼 말하는 것 보소?”
히죽대던 놈 중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지나가 자기 목에 칼이 겨눠졌음에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산하 씨 도망가요! 이 사람들 분명, 전문으로 강도질하는 자들이에요. 목격자는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고요.”
“아하~ 이 아가씬 뭘 좀 아네.”
지나를 제압하고 있던 여자가 비웃음과 함께 종알거렸다.
“아까 우렁차게 스킬 이름 소리치던 거 너지? 스킬 성공률 간당간당한 녀석들이 그렇게 입으로 외치면서 쓰면 성공률을 올린다고 믿고 있더라? 그거 다 구라야, 킥킥.”
“이익!”
지나를 붙잡고 있는 여자가 아까 시야를 가린 암흑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산하의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냐? 살고 싶으면 가진 거 다 내놓고 빨리 꿇어, 새끼야.”
“응, 넌 상황 파악이 안 될 테지만 살고 싶으면 가진 거 다 내놓고 빨리 꿇어, 새끼야.”
“???”
예상도 못한 오묘한 대답에 어리둥절해 하던 녀석은 곧 히죽거리는 산하 앞에서 벌게진 얼굴로 고함을 쳤다.
“이 씨발 새끼가 죽고 싶어!”
녀석의 오른손이 산하의 뺨을 후려 갈겼다.
아니… 갈기려고 했다.
뒤이어 들려온 소리는 상대의 뺨을 향해 날린 싸다구와 전혀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 뿌각
나무토막이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강산하의 뺨을 후려친 순간 녀석의 오른손이 다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러져 버린 것이다.
팔뚝에서 대롱거리는 손이 우스꽝스럽게 흔들거렸다.
“흐… 흐에?”
“!!!”
놈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흘렀다.
오직 뒤에서 혼자 폼 잡고 있던 녀석만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반사 데미지… 아니, 디버프와 섞어서 쓴 건가?”
산하의 오른손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걸 눈치 챈 건 녀석뿐이었다.
팔이 부러진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아아아악! 내 팔!”
“저, 저 새끼가!”
맨 뒤의 남자를 뺀 나머지 패거리의 얼굴이 험악해 진 순간 산하의 시선이 좌우로 갈라져 붙잡혀 있는 길영과 지나를 향했다.
어느 한쪽을 구하면 다른 한쪽을 구할 수가 없는 위치였다.
‘쯧… 귀찮게 시리.’
그리고 그의 엄지와 검지가 눈앞에 올라와 ‘딱’하고 튕겨졌다.
- 콰쾅!
- 쾅!
“뭐, 뭐야!”
좌우로 인질을 잡고 있던 놈들에게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그 화염은 불길한 검은색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 털썩
폭발에 휘말린 네 명의 남녀가 썩은 짚단처럼 자리에 쓰러졌다.
폭발은 인질과 뒤를 붙잡은 강도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등에 부상을 입은 길영과 지나는 몰라도 정면에서 폭발을 맞은 두 남녀 강도는 안면까지 완전히 날아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
맨 뒤에 있던 놈의 얼굴이 꿈틀 움직였다.
“검은 화염? 설마 저건…….”
그리고 산하는 부러진 팔을 붙들고 아우성치는 녀석의 목에 발을 가져갔다.
“끄… 끄헥! 깩! 나, 나 죽엇…….”
“응, 죽어. 그러라고 밟고 있잖아.”
바둥거리던 녀석의 목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 몸이 축 늘어지며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산하의 날카로운 눈이 남아있던 두 놈에게 향하자 폼 잡는 녀석 옆에 있던 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
“서, 선생님. 저저저, 저 자식이 지금 우리 팀원을 전부 죽였어요. 당장 처리해 주세요, 당장!”
“쯧…….”
“아, 빨리요 빨리! 저 개새끼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보셨-”
“야, 시끄러워.”
그의 갑작스런 발길질에 덜덜 떨며 매달리던 녀석이 저만치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천천히 팔짱을 푼 개폼 녀석은 이쪽으로 다가와 산하의 눈앞에 떡 버티고 섰다.
그 시선이 싸늘하게 날아와 꽂혔다.
“너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강산하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