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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첫 보스 공략



각성자 협회 전이 센터 앞.
산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열차를 삶아먹은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가 헌터폰에서 터져나왔다.
“야이 미친 새끼야! 너 지금 대체 어디야?”
“귀 따갑다, 소리 지르지 마라.”
“어딜 쳐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던가, 꼬박 사흘이 넘게 사라졌다 이제야 전화하는 놈이 어딨어, 이 망할 오라비야!”
“거기가 전화가 안 되는 곳이더라. 나도 그럴 줄은 미처 몰랐지.”
“미친놈아! 그럼 사람을 보내던가, 메일을 보내던가! 맨날 악플 처 달면서 익힌 컴퓨터 실력은 어디다 써먹을래? 아린이가 삼촌 다시 뒈졌다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닌 게 오늘까지 한다!”
“아니, 그게 거기가 사람도 컴퓨터도 없는 곳이라…….”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던전은 잠시 안 가기로 했다며! 그딴 거지같은 곳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데! 설마 또 게이트에 들어간 거얏?!”
“아냐, 아냐. 타워라고 던전이랑 좀 다른 데였어. 어! 저기 길영이 오네, 예정아 이만 끊는다. 오늘은 집에 들어갈게.”
“야이 미친놈아! 바로 들어오지 또 어딜 가! 오늘 우리 그이가 온단 말이야, 니 매제는 도대체 언제 만나볼 거-.”
폰을 끊은 산하가 얼얼해진 귀를 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펄쩍 뛰어 날아오는 길영을 보고 놀라 바로 주먹을 날렸다.
“이런 미친! 남자새끼가 어딜 입술을 들이대고 달려들어!”
“으켁! 형님은 역시 쿨하시다니까. 이 동생의 애정 어린 뽀뽀도 마다하시다니.”
“시펄, 쉬는 일주일동안 성정체성을 새로 깨닫기라도 했냐? 왜 갑자기 입술을 들이박고 난리야?”
“왜긴요! 꿀단지를 알려주신 형님께 감사의 표시를 하려는 거죠, 헤헤헤.”
“꿀단지?”
“꿀단지 맞아요. 이건 전부 산하 씨 덕이에요.”
길영과 함께 나타난 지나도 밝게 웃고 있었다.
“산하 씨 덕분에 우리도 아슬아슬하게 ‘타워 키’를 마련했어요. 지금 타워 키의 가격은 완전 폭등한 상태거든요, 기존 시세의 열배 이상? 아마 지금도 더 올라가고 있을 걸요?”
“형님이 문자 보내주신 걸 보고 우리도 좀 고민을 했어요. 당시에도 타워 키 가격은 만만치 않았는데 그게 순식간에 오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냉큼 사버렸죠.”
“우리?”
산하는 길영과 지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언제부터 너희 둘을 그렇게 뭉쳐 부르는 사이가 됐냐?”
“헤헤, 다 아시면서.”
“요즘은 진도가 참 빠르구만. 팀플레이에 문제없게만 해.”
“옙! 걱정 마세요.”
별 것 아닌 듯 쿨하게 등 돌려 걷는 그였지만 사실 속으론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뒤에서 꽁냥대는 둘의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우득 우득 이를 갈았다.
“씨팔, 커플 머스트 다이”

***

여기는 던전 10층.
헌터를 시작한 각성자가 초보 타이틀을 떼려면 바로 이곳을 클리어해야만 한다.
그만큼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곳이었으나 길영과 지나는 이곳을 거의 유린하다시피 쓸어버리고 있었다.
“캬아악!”
드디어 나타난 초록색 피부의 리자드맨과 멧돼지 머리에 거대한 몸집을 가진 인간형 몬스터, 헤비 보어가 덩치에 걸맞게 무식하게 큰 해머를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그러나 타워에서 훈련을 마친 길영과 지나의 실력은 이전관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져 있었다.
“길영아, 가드!”
“맡겨줘요.”
리자드맨의 곡도(曲刀)와 헤비 보어의 해머가 매섭게 떨어졌지만 길영은 새로 구입한 티타늄 방패를 단단히 잡고 그 모든 공격을 혼자서 받아냈다.
“이때다! 누나 공격해요.”
“좋아, 간다!”
지나의 무기는 여전히 평범한 보우건이었다.
데미지가 중요한 딜러로서 슬슬 무기를 바꿀 때도 되었건만 경제적 이유로 무기 교체가 어렵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딸리는 위력을 그녀는 정확한 연사로 메꾸고 있었다.
- 팟! 팟! 팟!
“꾸와아악!”
헤비 보어의 질긴 가죽에 보우건은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귓불과 눈, 겨드랑이 같은 부드러운 부분만 골라 꽂히며 녀석에게 고통스런 상처를 안겨주었다.
“이거나 먹어!”
헤비 보어의 긴 엄니를 부수고 길영의 메이스가 아가리에 처박히자 고기타는 냄새와 함께 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대로 무기를 박아 넣은 최길영은 곧바로 옆에 있던 리자드맨에게 몸을 날렸다.
“캬아악?”
“내가 무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냐. 짜식아?”
타워에서 훈련한 길영의 완력은 눈에 띄게 강해져 있었다.
넘어뜨린 리자드맨에게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리자 녀석은 바닥에 던진 찐빵처럼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렸다.
동시에 지나의 공격이 헤비 보어의 아킬레스건을 꿰뚫었고 괴성과 함께 놈이 무릎을 꿇었다.
“후우~ 가죽이 너무 단단해서 잘 먹히지 않네. 산하 씨, 대검으로 마무리해 주세요.”
“…싫어.”
“예?”
산하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니들 쿵짝이 잘 맞아서 좋겠네. 이참에 알아서들 처리해. 난 그냥 디버프만 걸고 가만히 있을래, 췟.”
“???”
“누나 괜찮아여~ 형님이 오늘 좀 피곤하신 모양이니까 내가 마무리 할게요, 얍얍!”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 그르륵대는 헤비 보어의 머리통에 길영의 곤봉 세례가 무수하게 떨어졌다.
커플의 행복을 질투하는 한 솔로남의 추잡한 원한 덕분에 불쌍한 헤비 보어는 무참히 뚝배기가 깨져 고통스런 최후를 맞고 말았다.
“헤헤헤, 10층도 별 것 아니네.”
“쳇, 타워의 훈련이 꽤나 도움 된 모양이구나. 바보처럼 쫄기만 하던 녀석이 이젠 몬스터를 맨손으로 때려잡는군.”
“이게 다 형님 덕분이죠, 히히.”
“줸장… 타워 가르쳐주지 말 걸.”
“네?”
“아무것도 아냐.”
괜히 팅팅거리는 산하의 속도 모르고 길영은 여전히 기분 좋은 듯 떠들어댔다.
“공격성 훈련이라고 하던가? 타워에서 그걸 좀 했더니 이런 것도 할 수 있겠더라구요. 이젠 힘이라면 자신 있어요.”
“헹, 너무 과신하진 마라. 넌 딜러가 아니라 탱커야. 너무 건방 떨다간 큰 코 다칠 거다.”
“음… 형님도 훈련 많이 하셨나 봐요? 그 대검 케이스 끌고 다니시는 게 훨씬 가벼워 보이시는데요?”
“뭐, 대충 그렇게 됐다.”
등에 짊어진 케이스를 쿵 두드리고 산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정도면 10층도 거의 다 끝난 것 같은데 그럼 이제 귀찮게 전이 센터로 안모여도 되는 건가?”
“10층 보스가 전이석을 떨어뜨린대요. 근데 확률은 반반이라네요?”
“쳇, 재수 없으면 다시 오게 생겼군. 좋아, 일단 가보자.”
10층 던전의 끝, 보스방.
그곳에 있는 거대한 철문을 보자 길영과 지나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위험천만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하하, 옛날 생각나네요.”
“…….”
“누나 괜찮아요? 걱정 마요, 이젠 우리가 함께 있잖아요.”
“응, 고마워.”
“뉘미 쉬펄…….”
산하가 고개를 돌리고 궁시렁대고 있을 때 철문 안쪽에서 커다란 괴성이 들려왔다.
“쿠아오오오옹~”
일행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지고 길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에 이신우 헌터님이 파이어 서펀트에 대해 말했었죠? 저건 분명 그놈일 거예요. 리자드맨이 있는 곳에서 저렇게 크게 울부짖는 보스는 그놈밖엔 없대요.”
“길영아, 난 10층의 보스는 늌크 커맨더라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았던 거야?”
“아뇨, 누나. 이번에 던전 난이도가 전부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파이어 서펀트가 10층 보스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원래 리자드맨도 15층 정도 가야 나온다고 하니까요.”
“그렇구나, 휴우~ 이젠 흔히 알려진 던전 정보를 그대로 믿지 말아야겠어.”
보스방에 들어가기 전 산하는 이전에 들었던 주의사항을 상기시켰다.
“다들 이신우 그 바보 녀석이 했던 말 기억하나? 파이어 서펀트의 정면에 서면 안 돼. 싸우다보면 안 그럴 수 없겠지만, 뭔가 입에서 나온다 싶으면 즉시 정면에서 벗어나라고. 경험상 그런 종류는 빨리 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시간은 넉넉할 거다.”
그렇게 문을 연 순간 방안을 메운 거대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파이어 서펀트. 원래 던전 15~20층 사이 보스방에서 나타나는 놈으로 입에서 뿜어내는 화염 브레스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똬리를 틀고 있는 녀석의 머리통이 길영이 든 방패와 크기가 맞먹을 만큼 커다란 놈이었다.
“쿠오아아아아~”
“긴장 놓지 마. 길영이 선두, 지나는 거리 벌리고 사격 준비해.”
“옛!”
최길영이 달려가는 동시에 산하의 손에서 붉은 촉수가 뻗어나가 녀석의 움직임이 굼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보스 타이틀은 괜히 붙는 것이 아니었다.
“우왓!”
똬리를 틀었던 녀석의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지자 길영의 몸이 기우뚱했다.
“흐엑! 이 자식 생각보다 훨씬 힘이 센데…….”
“정신 차려! 조금 세졌다고 그새 방심이냐? 내가 볼 때 넌 아직도 햇병아리 수준을 못 벗어났어. 배에 힘 꽉 줘!”
“네엡!”
채찍 같은 꼬리치기와 한입에 삼키려드는 거대한 입.
파이어 서펀트는 보스답게 매번 매섭고 치명적인 공격을 해왔다.
허공에 치켜세운 놈의 머리가 산하와 길영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지만 녀석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사각으로 돌아가 공격하려던 지나를 포착하고 투창처럼 꼬리를 내려찍었다.
“이, 이놈 꼬리에 눈이 달렸어요!”
“진짜요? 역시 괴물은 괴물… 우와앗!”
어느새 날아든 이빨을 방패로 막은 길영이 놈의 머리를 후려갈기자 파이어 서펀트가 몸을 배배꼬며 머리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동시에 날카로운 꼬리치기가 앞쪽으로 휘둘러졌다.
“으악!”
“길영아!”
비명과 함께 꼬리에 맞아 날아간 길영이었으나 바닥에 굴러 충격을 완화한 뒤 바로 방어 자세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스킬 개방! 라이트닝 인챈트!”
놈의 머리와 꼬리가 전부 앞으로 향한 순간 지나의 온몸이 시퍼런 섬광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그 파란 광채는 그녀의 보우건으로 집중되었다.
“먹어랏!”
귀를 찢는 벼락소리와 함께 보우건의 화살이 강렬한 전류를 머금고 빗살처럼 날아들었다.
한줄기 번개가 된 그 화살은 파이어 서펀트를 단번에 꿰뚫었고 살과 피부가 터지는 역겨운 소리가 들려왔다.
- 파직! 뻥!
“우와아!”
길영의 감탄과 함께 머리통이 터져버린 파이어 서펀트가 기다란 몸통을 부들거리며 축 늘어져 버렸다.
그리고 지쳐 자리에 주저앉은 지나를 향해 길영이 황급히 뛰어갔다.
“누나, 괜찮아요? 방금 그건 대체 뭐였어요?”
“내 액티브 스킬이야. 무기에 전격 속성을 부여해 주는 건데 타워의 훈련 덕분에 각성했어. 휴우~ 계속 실패만 했는데 이번에 간신히 성공했네.”
“와~ 멋져요. 우리 랭크에서 액티브 스킬을 생기는 사람 거의 없다는데. 누나, 진짜 쩌는데요?”
“나도 이렇게 빨리 실전에서 성공할 줄은 몰랐… 헉!!!”
그때, 지나가 경악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른 순간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그 커다란 입을 쩌억, 하고 벌리는 파이어 서펀트의 모습이었다.
터져버렸던 놈의 머리는 어느 샌가 순식간에 재생된 모양이었고 그 벌린 입 안에선 섬뜩한 붉은 광채가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있었다.
“파, 파이어 브레스!!!”
“누낫!”
길영이 몸을 던져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눈을 태울 듯 새빨간 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