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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타워와 너구리(2)



가르마쿤은 강산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안 먹을 테야? 나중에 날 먹으려 해도 안 줄 거다?”
“필요 없어. 뼈에 붙은 고기도 없어서 몇 숟갈 안 나올 녀석이야, 넌.”
“쳇, 미개한 놈 같으니라고. 생각부터 말하는 것까지 전부 다 야만스럽네.”
틱틱거리는 녀석을 보며 산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 탑을 만든 게 누군지 물으면 고장난 테이프처럼 말을 반복 했겠다? 에너지 변환 시스템이 생긴 이유를 물어봐도 똑같은 반응이었으니 그 두 개는 일단 넘어가야겠군.’
“이봐, 너구리. 타워에서 어떻게 하면 스탯을 올릴 수 있는 지 제대로 설명해 봐.”
“간단해, 각 층마다 마련된 훈련 시뮬레이터에 통과하면 특수한 능력 강화가 일어난다. 단, 네 신체 능력에 비해 너무 약한 훈련은 아무 소용없어. 그럴 땐 타워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상급의 훈련을 받도록 해라. 그걸 반복하면 상상도 못할 강력한 힘을 손에 넣게 될 거야.”
여기까진 타워에 대해 이미 들은 대로였다.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각성자의 힘을 점점 강해지게 만드는 곳.
그러나 돈이 주목적인 대다수 각성자들에게 외면 받는 곳이기도 했다.
“그럼 그 에너지 변환 시스템이란 것에 대해 말해줘. 내 아이 모니터에 나타났던 것들 말이야.”
“단어 그대로다. 네가 가진 장비를 ‘강화’하고 장비 또는 육체를 ‘수리’한다. ‘생산’은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줄 테고 ‘분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에 대한 세부 사항을 알려주지. 분석 결과로 인해 생산 물품이 변하는 경우도 있으니 분석은 자주 사용해.”
“흠… 그에 따른 비용은?”
“조건에 따라 매번 달라. 방금 네가 생산하려 했던 ‘먹이’는 스탯 1을 요구했어.”
“젠장, 안하길 잘했네. 식사 한 번에 스탯 하나라니 뭐가 그리 비싸? 난 방금 머리통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단 말이다. 내 머리통 값이 고작 스탯 하나냐?”
“후후, 타워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평범한 것일 리 없잖아.”
“그럼 뭐가 다른데?”
“후후후. 그건 직접 알아내 봐.”
가르마쿤은 그저 자신만만한 웃음만 지었고 산하는 얼굴을 구기며 녀석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후우~ 보양탕 주제에 끝까지 건방지군. 대화는 그만 됐으니 여기 2층 훈련이나 하게 해줘. 난 당분간 타워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거든.”
“훗, 앞으로도 네가 살아있다면 말이겠지. 에너지 변환 시스템을 유용하게 쓰고 싶다면 매 층의 훈련에서 살아남으라고.”
녀석이 손가락을 튕기자 건너편 벽이 열리며 푸르스름한 광채를 뿜어냈다.
산하가 그곳으로 들어갈 때 가르마쿤의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가지 팁을 줄까? 팔다리 한두 개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훈련 목표는 꼭 달성하도록 해. 살아만 있다면 내가 수리해 줄 테니까.”

***

『『 지구력 시뮬레이션 모듈 기동 - 난이도 하하하하급 』』

“이런 젠장할! 빌어먹을!”
산하는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 뒤에서 그 플라즈마인지 뭔지 하는 시퍼런 에너지장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얄미운 안내 메시지가 혼자 종알거렸다.
“저 플라즈마 장에 닿으면 바삭하게 튀겨질 테니 죽어라 달리세요. 장비는 놓고 가셔도 되요, 나중에 곱게 돌려드릴게요.”
“제기랄, 그건 미리 말하던가!”
“어머머, 죄송해요오~”
“시팔!”
등에 맨 대검도 던져버리고 산하는 죽어라 앞으로 뛰었다.
평소엔 절대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다른 방법이 없다.
물론 ‘그걸’ 꺼낸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여기선 안 된다.
던전과 타워, 이 수상쩍은 두 장소에선 산하는 진짜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는 한 진짜 힘을 드러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 달려도, 달려도 끝이 안 보여? 이거 사기 아니야?”
그가 얼굴까지 벌개져서 외치자 낭랑한 목소리가 대꾸를 해왔다.
“아닙니다~ 끝은 있어요. 당신이 너무 느릴 뿐이죠.”
“개소리하네! 너 지금 나 똥개 훈련시킨다고 일부러 계속 달리게 만들고 있지? 아까 지구력 훈련이라며?”
“어머, 들켰네? 그런데 아직 괜찮으신가 봐요, 말이 참 많으셔. 그럼 속도 더 올릴게요!”
“시파알! 너 누구야? 그 너구리 새끼랑 친구냐?”
“천만에요. 전 주변에 친구가 없거든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망할 플라즈마 장이 더 빠르게 달려오고 뒷머리가 빠직빠직 타들어가자 산하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 뽑아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이 오색빛깔로 번쩍였다.
“달리기 100점, 죽어라 뛸 때 웃긴 표정 100점, 주제도 모르고 쫑알거리기 100점. 이번에도 참 잘했어요~”
“다, 닥쳐…….”
“3층으로 가시면 던지고 가신 장비 돌려드릴게요. 우리 3층에서 다시 만나요, 안녀엉~”
“당장 꺼져!”

『『 지구력 시뮬레이션 통과 - 타워 2층 클리어 보상 - 능력치 상승 완료 』』

허리를 숙이고 헉헉대던 산하는 한참 동안 숨을 고른 뒤에야 몸을 일으켜 스탯창을 불러왔다.

< 강산하 - 랭크 E >
힘 : 18
민첩 : 18(+1) ☜ 참 잘했어요
체력 : 18(+1) ☜ 참 잘했어요
정신 : 18
협회 추천 포지션 : 특정 불능

“제기랄, 왜 타워가 인기 없었는지 알겠군. 이렇게 목숨을 걸고 올리는 스탯이 고작 1이라니 너무 수지가 안 맞잖아.”
또다시 뜬금없이 생겨난 엘리베이터로 3층에 올라가자 이번에도 자리잡고 있던 가르마쿤이 아깝다는 얼굴로 성의 없이 손뼉을 쳤다.
“요~ 용케도 살아왔네. 하긴 2층 정도론 무리지. 한 10층 정도가면 그때서야 좀 죽어나가니까.”
“넌 꼭 내가 죽길 바라는 모양이구나, 이 망할 요괴 너구리야.”
“라쿤이야! 그리고 이젠 요괴까지 추가라니 무례하구나! 이 몸은 제 3세대 애니그마 프로키온 종으로서 최첨단의-”
“닥치고 내 무기나 내놔. 동물원에 처박아 버리기 전에.”
가르마쿤이 툴툴대며 손을 휘젓자 허공이 열리고 산하의 대검 케이스가 천천히 내려왔다.
산하는 즉시 그걸 열고 무기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헷! 설마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원시적인 무기는 줘도 안가진다고.”
“그 원시적인 무기에 맞아 죽은 놈이 네놈 몸에 있는 이만큼 많다는 건 알아둬라.”
“쯧, 그런 흉물을 대체 왜 들고 다니는 건지. 이봐, 타워에 스탯을 지불하면 그보다 훨씬 좋은 무기를 얻을 수 있다고. 강화까지 한다면 더욱 강력해지겠지.”
“그러냐? 얼마나 드는데?”
“제일 싼 게 30 정도?”
“미친! C랭크 각성자 주력 스탯 수준이잖아!”
“이런, 쯧쯧. 어차피 재능 없는 녀석들은 스탯 올라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쓰지도 못할 잉여 스탯 쌓느니 곱게 좋은 무기로 바꿔가는 게 생존에 더 도움이 될 걸?”
녀석은 재수 없게 혀를 끌끌 찼다.
얼굴을 구기고 있던 산하는 좋은 무기라는 말을 듣자 문득 품속에 있던 마나 블레이드가 생각나 그걸 꺼내 보였다.
“야, 너구리. 혹시 이 무기에 대해 아는 거 있어?”
“흠, 그건 바이오 커터잖아? 하급 무기긴 하지만 너희 문명에선 제법 쓸 만 하지. 하지만 사용자를 심하게 타는 물건인데.”
“원래 이름이 바이오 커터냐? 어쨌건 난 이걸 쓸 수 없더군.”
“헹~ 이건 정신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비정형(非定型) 무긴데 이쪽으로 센스 없는 녀석은 평생 가도 못써, 킥킥… 응? 근데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너 오늘 처음 여기에 들어왔잖아.”
“샀다, 다른 녀석에게.”
복잡한 상황 모두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대충 구라를 쳤다.
그러나 녀석은 의심도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 아마 상층에서 그걸 얻은 녀석 중 누군가가 너한테 팔아넘긴 모양이네. 하긴 타워에서 얻은 걸 어떻게 하건 그 녀석 마음이니까 상관없어.”
“상층에선 원래부터 이런 걸 얻을 수 있었나?”
“물론이다. 오늘부터 하층에서 에너지 변환 시스템이 가동된 거고 운 좋게도 네 녀석이 그 첫 번째 사용자가 된 거지. 쳇, 왜 하필 너 같은 녀석이 왔을까.”
“시끄러워.”
히죽거리는 가르마쿤을 내버려두고 산하의 눈은 손에 들린 마나 블레이드, 바이오 커터라는 물건에 가 있었다.
‘길영이 녀석이 이걸 안다는 건 대중에게 제법 알려진 물건이란 건데… 어쩌면 타워의 물건들은 생각보다 흔하게 퍼져있을지도 모르겠군. 이 마나 블레이드처럼.’

***

“좀 뭔가 아쉬운 걸?”
“뭐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산하에게 가르마쿤이 투덜거렸다.
“너 같은 건 금방 죽을 테니 간만에 시체 처리장을 돌려야 할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어. 생각보다 제법이구나, 너? 설마 고작 사흘 만에 13층까지 올라갈 줄이야.”
“그 훈련이라는 게 전부 단순한 것들이었잖아. 딱 두 번만 빼면 전부 몸으로 구르면 되는 거라 다행이었다.”
“두 번? 거기서 고생했어? 뭔데 그게?”
“…….”
산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그 두 번의 끔찍한 훈련이란 별안간 웬 방안에 가둬놓고 이젠 얼굴도 거의 기억 안 나는 부모님과 상봉하게 만든 것이었다.
충격을 받은 산하가 머뭇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을 때…
“아버지, 저는…….”
“이눔아! 나이 마흔을 넘어서 아직도 장가를 못가면 어트케 혀! 네눔이 고자여? 언제까지 오른손이랑 같이 살 껴!”
“……뭔 소리에요, 젠장!”
손주, 손녀 얼굴을 보여 달라며 꺼이꺼이 울어대는 부모님의 환영과 24시간 동안 갇혀있다 보니 차라리 목을 매고픈 심정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그걸 견디고 살아나왔더니 꼴랑 정신 스탯 2가 오른 것이다.
끔찍한 고통에 비해 너무 적은 대가였다.
“말하기도 싫어. 아주 비효율적 훈련이었어.”
“으흥~ 뭔지 모르겠지만 너도 약점이 있다는 거네. 좋아 아직 희망이 있군.”
“이쯤 되면 넌 내 적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훈련은 다 무사통과했으니 그만 입 다물어, 너구리.”
“너구리 아니라니깐!”
꽥꽥대는 녀석을 두고 산하는 품에서 타워의 키를 꺼내들었다.
그걸로 문을 그리자 가르마쿤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갈 거냐?”
“가야지 그럼 뭐 어쩌라고. 여기에 집이라도 짓고 살줄 알았어?”
“쳇… 한동안 지루해 지겠군.”
“다른 녀석들도 올 것 아냐.”
“너도 알겠지만 이 타워엔 새로 오는 녀석이 거의 없어. 네가 오는 걸 타워가 감지한 순간 비로소 내가 제조된 거라고.”
“내가 왔을 때 네놈이 태어난 거라고?”
“태어난 게 아니라 제조라니까. 우리 제 3세대 프로키온 종은 대형 인공 자궁에서 생산되는 리사이클형 배양체야. 사용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다시 녹여서 보관되지.”
“그럼 네 기억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필요한 지식 외엔 전부 리셋이다.”
무시무시한 사실을 종알종알 떠드는 녀석을 보며 산하는 한숨을 쉬었다.
“꼭두각시 주제에 그게 비참하단 인식조차 없구만. 다음에 올 땐 개사료라도 선물해 주마, 너구리.”
“나는 개가 아니얏!”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녀석의 얼굴엔 선물에 설레어하는 아이의 흥분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렇게 강산하는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길영과 지나에게 말한 헌터 휴업이 딱 끝나는 날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