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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타워와 너구리(1)



가까이서 보니 타워는 기이한 금속 재질을 하고 있었다.
마치 유리 코팅을 한 대리석 같았는데 분명한 건 지구상 어디에도 이런 금속은 없다는 것이다.
“입구는 어디지.”
어디에도 문 같은 곳은 안보였다.
혹시 다른 각성자가 있나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인기척은 발견할 수 없었다.
황무지 같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타워는 기묘하게 머리를 우뚝 세우고 있었다.
“혹시 이거냐?”
키를 들어 올리자 바로 반응이 왔다.
그저 벽이었던 곳이 도려내지듯 예리하게 잘라지더니 네모난 사각 형태로 구멍이 뻥 뚫렸다.
“여기로 들어오란 모양인데, 환영인사 한번 삭막하네.”
안으로 들어간 순간 앞이 확 밝아졌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SF영화에서 볼 법한 우주 실험실 같은 새하얀 복도였다.
분명 누군가의 손에 만들어진 하얀색 타일이 조각조각 맞춰져 이 복도를 이루고 있었고 그 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길은 하나… 역시 앞으로 나가야겠지.”
산하가 발길을 내딛을 때마다 복도의 바닥이 둥둥 거리며 묘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갑자기 산하의 아이 모니터에 신호가 나타났다.

『『 회피 시뮬레이션 모듈 기동 - 난이도 하하하하하하급 』』

“뭐야 이게?”
장난스런 문자였지만 곧이어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회피 시뮬레이터를 기동합니다. 난이도 하하하하하하급. 정면에서 발사되는 플라즈마 탄환을 피해 주세요.”
“뭐가 어째?”
“플라즈마 탄 발사합니다. 머리 숙이세요. 3~ 2~ 1~ 쏩니다. 숙이세요, 진짜 쏩니다? 쏠 거예요? 지금 쏩니다. 뿅~”
“이게 무슨 개 같은 장난… 으헉!”
개그맨 같은 안내 지시에 어이 없어하던 산하는 순간 멀리서 시퍼런 섬광이 날아오는 게 보이자 엉겁결에 허리를 뒤로 꺾어 공격을 피했다.
맞았으면 분명 머리가 날아갔을 하늘색 강력한 에너지가 그의 이마 위로 스쳐 지나갔다.
눈썹이 지글대며 타버린 건 덤이었다.
“반응속도 100점, 예술점수 100점, 눈썹 태우기 100점. 참 잘했어요, 짝짝짝!”
“조까! 어떤 새끼야, 당장 나왓!”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 백색의 복도가 오색찬란하게 빛나더니 아이 모니터에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 회피 시뮬레이션 통과 - 타워 1층 클리어 보상 - 능력치 상승 완료 』』

“…이게 바로 각성자의 능력 성장을 유도한다는 타워의 실체란 말이군.”
산하는 즉시 아이 모니터로 자신의 스탯 데이터를 불러 보았다.

< 강산하 - 랭크 E >
힘 : 18
민첩 : 18(+1) ☜ 참 잘했어요
체력 : 18
정신 : 18
협회 추천 포지션 : 특정 불능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하여간 스탯에 보너스가 더해진 걸 보니 방금 그 훈련을 통과해서 스탯이 늘어났나 보구나. 그래, 타워란 바로 이런 놈이었군.”
아이 모니터를 보며 산하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복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도 않던 그 긴 복도의 끝이 엄청난 속도로 당겨져 이쪽으로 날아왔다.
“윽!”
순간적으로 팔을 들었으나 복도의 끝에 있던 기묘한 문은 산하의 눈앞에서 딱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는 이 문 역시 백색의 기묘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소위 ‘엘리베이터’인 것을 알아챘다.
“오호라~ 여긴 던전이 아니라 타워니까 층별로 클리어하면서 위로 올라가란 소리냐? 거 말 되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입구를 제외한 사방이 전부 거울처럼 안쪽을 비췄다.
그리고 그 거울은 곧 아름다운 우주와 평화스러운 음악을 내보내더니 아주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안내 멘트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 각성자 여러분~ 모두들 오늘의 훈련을 즐기고 계신가요? 다들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

“이게 뭔 개소리야? 방금 내 머릴 날려버리려 했으면서.”
이상하게 이곳의 모든 것이 산하를 약 오르게 했다.
아까 날아왔던 플라즈마 탄이란 무기는 장담컨대 ‘지금의’ 산하로선 절대 막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아까의 회피는 단련된 생존 본능 덕에 가능했던 것이었고 웬만한 각성자라면 바로 머리를 잃은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매번 이런 식이면 길영이 녀석에게 딱이겠네.”
녀석이라면 멘트를 듣는 순간 아무 의심 없이 바로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분명 가볍게 보너스 스탯을 하나 얻고는 타워도 사실 별거 아니라면서 깔깔대겠지.

『『 띠링~ 2층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

“가라는 말이 의미심장한데, 설마 지옥으로 보내버린단 소린 아니겠지?”
문이 열리자 산하는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타워 2층은 탁 트인 또 다른 하얀 색의 공간으로 역시나 그 정체불명의 금속 타일이 사방에 조화롭게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이 새하얀 세상에서 오직 하나 검은 색을 띈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요~ 여기야 여기.”
‘너구리?…’
검고 하얀 털이 섞인 너구리같이 생긴 생명체가 사람처럼 팔짱을 낀 채 두발로 일어서 있었다.
그 녀석의 얼굴엔 아주 노골적인 어떤 감정이 엿보였는데 그건 바로 비웃음이었다.
“또 왔네, 또 왔어. 그래~ 너도 이곳에서 강대한 힘을 얻기 위해 여길 온 거겠지? 항상 똑같지, 그리고 항상 똑같이 소용없을 거야. 너희 같은 열등 생물들은 이 탑의 진가를 모르거든.”
“넌 뭐하는 괴물이냐?”
“무례하긴! 난 괴물이 아니야! 제 3세대 애니그마 프로키온 종이자 이 타워 하층의 변환자, 가르마쿤이라고 한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너구리.”
“알 리가 있나!”
너구리 괴물은 꽥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은 너희 지구문명과 최소 이십만 사천팔백육십 쿼터 이상의 문명 지수 차이가 난다. 너희 문명의 과학 상식이란 건 말할 가치도 없어. 1층을 통과했으면 플라즈마 탄의 위력을 보았을 테지?”
“플라즈마… 그 재수 없던 퍼런 불꽃 말이냐?”
“그래! 플라즈마 테크놀러지는 우리 문명이 만들어낸 수많은 전투 수단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이야. 그렇지만 무려 외(外)우주 세력체 모함의 표면에도 충격을 줄 수 있지, 후후후~웁!!!”
산하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녀석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러니까 그걸 나한테 쏜 게 네놈이란 말이지, 노린내?”
“욱! 캑! 이것 좀 놧!”
“망할 짐승새끼가 뒈지고 싶나? 넌 뭘 발라주면 그 망할 노린내가 사라지겠냐? 된장? 고추장? 아니면 그냥 술에 재워버려?”
“윽! 이 야만스런 원시 문명 생명체 주제에 제 3세대 애니그마인 날 식용으로 쓰겠다는 거냐?”
“야만이고 나발이고 뭔가 처먹는 건 다들 똑같을 거 아냐? 대답해 봐, 뭐가 발리고 싶어?”
녀석이 멱살을 잡힌 채 공중에서 아등바등 거렸다.
“안됏! 날 먹으면 안 돼! 넌 지금 타워에서 힘을 기르려고 온 거잖아. 날 잡아먹으면…….”
“잡아먹으면, 뭐?”
“내 다음 개체가 제작될 때까지 네 유한한 시간이 낭비돼.”
“제작… 이라고?”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자 녀석이 쿵 소리 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사리만 한 손으로 엉덩이를 슬슬 문지르며 일어난 놈에게 산하가 미간에 힘을 주며 물었다.
“질문에 대답해라, 너구리. 그럼 먹는 건 취소하지.”
“너구리가 아니야! 그리고 너희 원시 문명 생명체와 굳이 비슷한 종을 꼽는다면, 난 라쿤으로 분류될 수 있다!”
“시펄,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너구린지 라구린지 모르겠다만 이 타워에 대해 말해봐.”
“흥! 우리 위대한 기술의 결정체를 보고 압도된 모양이구나. 좋아~ 좋은 자세다, 원시 생물.”
녀석은 우쭐한 표정으로 양손을 허리에 가져다 댔다.
“타워는 우리 우주 다중차원 교차로에 건설된 특수 훈련소로 이곳에 접촉한 생명체의 능력 개발을 위해 건설되었다. 접촉한 생명체가 어떤 존재건 그 문명 수준에 맞추어 훈련 사항을 지시하고 안내하며 또 보상 하도록 되어 있지.”
“누가 만들었나?”
“말했잖아! 우리라고!”
“그 우리가 누군데?”
“…….”
녀석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강산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말했잖아! 우리라고!”
“그 우리가 누구냐니까?”
“……말했잖아! 우리라고!”
순간 산하는 녀석의 동공이 묘하게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너구린지 라쿤인지 하는 이 사람 흉내나 내는 동물 녀석은 다시 한 번 꽥 소리를 지르며 아까와 똑같은 톤으로 소리를 질렀다.
“말했잖아! 우리라고!”
“흥… 됐다. 네가 어떤 놈인지 대충 알겠어.”
“뭐야? 열등한 원시 문명 생명체 주제에 감히 제 3세대 애니그마 프로키온 종인 이 몸에 대해 파악했다니 실로 가소롭구나.”
거만한 표정으로 비웃는 놈을 보며 산하는 차갑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놈들… 뭔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야. 역시 여기는 ’그놈‘이…….’
“하여튼!”
가르마쿤이라는 동물 녀석은 우쭐한 미소까지 곁들이며 허리에 손을 얹고 배를 쭉 내밀었다.
“기특하게도 이 몸을 안 먹겠다 결정한 네놈의 뜻이 갸륵해서 앞으로 타워에서 훈련하는 걸 이 몸이 직접 도와주도록 하겠다.”
“……왜 그걸 네 마음대로 결정해. 배고프거나 짜증나면 바로 탕을 끓여버릴 거야, 노린내.”
“그, 그러지 마라. 식량이라면 여기서 생산해내면 그만이니까.”
“식량을 생산한다고? 이 타워엔 무슨 대형 농장이라도 있는 거냐?”
“좋은 기회니 지금부터 설명해 주지, 에헴!”
가르마쿤이 양손을 어지럽게 교차하자 산하의 아이 모니터가 반응하며 시각에 기묘한 홀로그램을 표시했다.
“네 녀석, 지금 내 아이 모니터에 접속한 거냐?”
“후후, 너희 원시 문명 디바이스에 간섭하는 건 일도 아니지. 시각 장치에 표시되는 내용을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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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수리] [생산]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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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아주 간결하구만. 네 잘난 문명엔 미적 감각이란 게 없는 거냐?”
“소소한 건 넘어가라, 하등 생물. 거기서 생산탭을 선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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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수리] [생산]☜ [분석]
[식료]
[장비]
[의약]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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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아서 잘 하고 있구나. 그 식료탭을 고르면 너희 비효율적 생체 구조에 적합한 에너지원을 제공받을 수 있을 거야. 고작해야 100년 남짓 사는 불쌍한 너희들이니 그거라도 먹고 에너지 보충 해보라고.”
“생각보다 흥미로운 걸… 이건 전부 무료인건가?”
“원시 문명에서 살던 녀석답게 생각이 저능하구나. 이 우주는 등가교환의 법칙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어.”
“그럼 교환 대상은 뭐지?”
“뭐긴 뭐야.”
가르마쿤이 당연하다는 듯 툴툴 거렸다.
“대가는 네 생체 에너지다. 너희 문명의 용어로는 ‘스탯’이구나.”
“……뭐? 스탯을 가져가? 그 스탯을 올리려고 여길 오는 건데 그걸 도로 가져가 버리면 대체 누가 타워에 오겠냐. 넌 바보냐?”
“후후후, 생각이 짧군. 타워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막대하다. 이전엔 상층에 도달한 녀석만이 그 맛을 볼 수 있었지만 하층의 변환자인 이 몸이 제조된 이상 얘기는 다르다. 바로 네 녀석이 하층 에너지 변환 시스템을 처음으로 사용하는 녀석일 거다.”
“예전엔 상층의 녀석들만 이런 기능을 사용했단 말이냐? 갑자기 왜 하층에 이런 기능이 생긴 건데?”
“그건…….”
눈앞에 있던 녀석의 초롱초롱한 눈이 갑자기 흐려졌다.
묘한 느낌에 녀석을 쳐다보자 가르마쿤은 발작하듯 몇 번 고개를 튕겨대더니 마치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후후, 생각이 짧-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막- 상층에 도달한 녀석만이 그 맛- 변환 시스템을 처음으로 사용-”
“그만 됐다, 너구리. 이제 대답 안 해도 돼.”
가르마쿤은 신기하게도 바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흐려진 안광(眼眶)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산하는 그의 눈 속에서 기묘한 슬픔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산하는 갑작스레 기분이 나빠져 얼굴을 찡그렸다.
‘말해선 안 되는 건 아예 생각도 못하도록 조작해 놓았군. 여긴 진짜 마음에 안 드는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