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8화. 방향 전환



강산하는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두 개의 검지를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하얀 키보드 위를 그 쌍 검지로 하나씩 톡톡. 누르기 시작했다.
김아린이 그 모습을 한심하단 얼굴로 쳐다보았다.
“삼촌 뭐해?”
“댓글 써.”
“그런데 왜 그렇게 키보드를 치는 거야?”
“삼촌 때는 말이다. 집에 컴퓨터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삼촌은 키보드 치는 방법을 몰라요. 왜 이러는지 이제 알겠나요. 조카님?”
“어, 그래.”
아린이는 모니터로 다가가 산하가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며 정성스럽게 치고 있는 그 댓글의 내용을 보았다.

『『 ㅆ . ㅣ . ㅂ . ㅏ . ㄹ . ㅅ . ㅐ . ㄲ . l . ㅇ . ㅑ . ㄷ . ㅏ . ㄱ . ㅊ . ㅕ… 』』

“못 말려, 정말.”
두 눈까지 벌게져서 진지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댓글이 고작 악플인 이 철없는 삼촌을 보고 아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애도 아니고, 에휴~ 앞으로 커서 어떻게 될지 무섭네, 진짜.”
“삼촌이 올해로 마흔 여덟이거든? 너 나이 곱하기 셋을 해도 삼촌이 더 나이가 많다, 짜샤.”
“나이만 많다고 단가? 하는 짓이 우리 반 남자애들이랑 똑같으니 그러지.”
“조숙한 녀석들이구나. 벌써부터 사나이의 언어를 쓰다니.”
“어휴, 내가 졌다.”
“야, 됐고 걸그룹 나오는 거나 좀 틀어봐라.”
“아, 진짜~ 맨날 그런 것만 보지 마, 정말!”
VOD 다시 보기를 틀며 짜증과 함께 나가버린 아린이는 나 몰라라 강산하는 그 휘황찬란한 살색 TV 화면에 히죽대며 얼굴을 쑤셔 박았다.
그리고 가로로 길게 누워 북북 배를 긁는 그를 강예정이 극혐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오빠, 오빤 연애 같은 거 안 해? 그렇게 TV 속 여자들만 보지 말고 나가서 누구 만나보고 그래라 좀.”
“내 민증 꺼내는 순간 다들 도망갈 거야. 난 이제 끝났어, 강씨 집안의 대는 네가 잇도록 하여라~ 내 색시는 이제 이 네모 상자 속에만 존재한다.”
“아니, 걔들도 오빠 색시는 안 해줄걸? 제발 정신 차리고 현실을 좀 똑바로 바라봐, 응? 내가 이 전자 계집들을 시누이로 삼아야겠니? 아니면 나중에 니 오른손을 애인이라고 데려올 거야? 아이고, 내가 속 터져서…….”
가슴을 땅땅 두드리는 예정을 보며 산하는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예정아”
“응?”
“이거나 먹어.”
- 뿌우웅~
“…이런 미친 새끼야!”
강예정에 손에 들렸던 뚝배기가 박살이 났다.

***

“형, 머리는 왜 그래요?”
전이 센터 앞에서 불쾌한 얼굴의 강산하가 머리에 감은 붕대를 슥슥 문질렀다.
“어느 몬스터보다 더 악독한 년이 손에 든 뚝배기로 내 뚝배길 뽀개더라, 시펄.”
“와… 진짜 무섭다. 디버프 안 걸었어요?”
“존나 무식하게 센 년이라 그딴 건 소용도 없어. 365일 내내 디버프 걸어도 지구를 쪼갤 것 같은 년이거든.”
“헐… 그 사람도 헌터에요?”
“맨헌터다 맨헌터. 아주 그냥 인간 사냥꾼이 따로 없어.”
“쩐다~ 혹시 우리 팀 안 들어온 대요?”
“던전에 있을 몬스터가 불쌍해서 그딴 짓은 안 해. 걔가 오면 아주 몬스터 종족 씨가 다 말라서 헌터들 전부 실업자 될 거다.”
바닥에 퉷, 하고 침을 뱉은 산하는 짜증이 치밀어 투덜투덜 불평을 했다.
“그런데 지나 얘는 왜 여태까지 안 오는 거냐? 이러다 던전 문턱도 못 밟고 날 새겠네.”
“그러게요, 지나 씨가 늦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길영이 묘하단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지 헌터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던 순간 저 멀리서 지나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산하 씨, 길영아~ 늦어서 죄송해요.”
“요즘 정신 상태가 해이해 진 거냐? 집합 시간에 늦으면 어떻게 해?”
“아뇨, 그게요. 산하 씨 일단 이것부터 보세요.”
그녀가 헌터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주려던 순간 갑자기 주변 모든 헌터들의 헌터폰이 동시에 울렸다.
뭔가 심상치 않은 광경이었다.
“뭐야 이게… 비상 재난 경보라고?”
“던전에서 예측 외 사태가 발생했을 때 헌터폰으로 발송되는 협회의 경고 메시지에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지나는 산하와 길영에게 협회 본부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솔직히 그간 조금 이상했어요. 4층 입구를 지키던 5인조 늌크 무리와 5층 입구를 지키던 아머드 늌크, 킬링아이의 조합. 제가 한번 말씀드렸죠? 둘 다 자주 나오지 않는 것들이라구요.”
“그랬지.”
“우리뿐 아니라 던전 상층부터 중간층까지 전체적 난이도가 급상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협회 본부에 가서 뭔가 정보를 얻어 보려 했어요, 그랬더니…….”
그녀는 잠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공포가 아니라 환희에 가까운 몸놀림이었다.
“협회엔 이미 B랭크, A랭크 각성자들이 줄지어 모여 있더라구요. 소문엔 S랭크 각성자도 와 있었다 하던데요.”
“와~ S랭크 각성자? 말 그대로 초인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들이잖아요.”
“응, 맞아. 직접 안쪽에 들어가 보진 보진 못했지만, 협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낄 수 있었어. 정말로 S랭크… 아니 어쩌면 가디언도 오지 않았을까?”
산하는 갑자기 길영에게 반말을 쓰는 지나를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마 지난번 같이 장비를 사러 나간 후 뭔가 일이 있었나 보지…
“그래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거야?”
“그게요, 던전 50층의 보스가 행방이 묘연한 모양이에요.”
“50층?”
“네, 사실 대부분의 헌터들은 던전 40층 공략에 성공하면 더는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요. 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헌터는 오직 돈이 목적이라 위험대비 효율이 가장 좋은 곳인 30~40층대에서 머물거든요.
“그럼 그 밑으로 내려가는 놈들은 뭔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죠. 그런 소수의 사람들만이 40층 아래를 공략하기 시작해요.”
지나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초인 지망자들의 목표가 바로 던전 50층이에요. 그곳을 넘기는 순간 그 사람의 랭크는 최하 A, 혹은 그 이상으로 확정되거든요. 그런데 그 50층의 보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하네요.”
“우와~ 그게 대체 무슨 의밀까요?”
“동시에 50층 위쪽 모든 구간의 난이도가 올라갔대요. 결국 30~40층이 주 사냥터던 C, B랭크 헌터들이 그보다 더 상층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권 다툼 때문에 상해 사건이 벌어졌나 봐요. 그래서 협회가 재난 경보를 보낸 거죠.”
“신입 헌터들은 가급적 목표 층수를 위쪽으로 올리고 되도록 10층 밑으로 내려가지 않기를 권한 다라…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산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지나에게 물었다.
“혹시 그 50층 보스라는 게 뭔지 알아?”
“블랙 엔젤이라는 인간형 몬스터인데, 검은 피부에 검은 날개. 심지어 검은색 화염까지 휘두르는 악마 같은 놈이었대요. 진짜 무섭도록 강한 놈이었는데 그런 보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죠.”
“흐~으음.”
이마를 짚고 뭔갈 계속 생각하던 산하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군, 킥킥. ‘중간 보스’라더니 그 녀석이 거기서 그런 짓을 하고 있던 거군.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이 터져버렸다라… 푸후훗.”
“???”
나머지 두 사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산하는 유쾌하다는 듯 손을 내둘렀다.
“상황 진정될 때까지 헌터는 잠시 휴업이다. 시간은 일주일, 그 동안 알아서들 지내.”
“혀, 형! 어디 가요?”
“택배 시켜놓은 게 있어서 그거나 받으러 갈란다, 안녕~”
“아니, 잠깐! 형, 산하 혀엉!”
그의 모습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지나와 길영의 헌터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 타워 』』

***

엑스 그레이드 택배라는 게 있다.
각성자들이 입수한 아이템이 거래되는 ‘헌터몰’에서 구입한 물건을 배달하는 특수 서비스로 지대공 미사일에도 안 날아갈 특수 장갑차와 C랭크 각성자 세 명이 택배에 동행한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한적한 공터에 서 있던 산하 앞에 와 섰다.
“강산하님 되시죠? 그레이드 엑스 택배입니다.”
“장비가 굉장하시군.”
“택배 비용을 선입금 하셨으니까 조금 신경 썼죠.”
“단가도 꽤나 세던데. 거의 물건 값에 육박해서 이걸 해야 하나 고민 좀 했습니다.”
“각성자간의 거래에 단가도 높았으니 당연한 금액이죠. 문제가 생길 경우 거래의 초과 금액으로 보상해 드립니다.”
“대단하구만. 혹시 어디 회사 소속이기라도 한 겁니까?”
“이런, 저희 회사를 모르시다니… 한국의 모든 엑스 그레이드 택배는 송학 코퍼레이션에서 담당합니다. 더불어 대한민국 최고의 비즈니스 길드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죠.”
“흐음, 구룡이 아니라?”
“구룡… 이라고요?”
순간 각성자임에 분명한 택배기사의 얼굴에 노기(怒氣)가 서렸다.
그러나 곧 얼굴빛을 가다듬은 그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고 말했다.
“헌터님께선 해외에 계시다 오신 모양이군요. 저희 송학은 구룡 같은 구멍가게완 비교도 되지 않는 최고의 기업입니다. 앞으로 저희 서비스를 이용하시다 보면 분명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이만.”
택배기사는 검은색 플라스틱 상자 하나를 건네주곤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꽤 열 받았나 본데. 세상에 자기 회사에 저렇게 충성하는 사람은 처음 봤네. 송학? 구룡이 한국 최고가 아니었어?”
혼자 중얼거리며 산하는 상자를 열고 구입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뭔가 영롱한 느낌이 드는 자그마한 열쇠였다.
“이게 ‘타워 키’구나. 이것만 있으면 타워로 갈 수 있다 이거지?”
이놈을 사기 위해 그간 모았던 돈 대부분을 쏟아 부었다.
각성자의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타워’로 가는 열쇠지만 비싸기만 하고 인기 없는 상품이었다.
그냥 던전을 돌다보면 자연히 강해지는 것이 바로 각성자라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갑작스레 올라간 던전의 난이도. 안전한 사냥을 위해 상층으로 올라온 중견 헌터들… 헌터로 밥 벌어먹으려면 타워의 수요가 늘 수밖에 없지. 이젠 헌터들도 물갈이 되게 생겼어, 킥킥.”
사용 설명서를 읽은 산하는 열쇠를 손에 들고 공중에 기다란 직사각형을 그렸다.
열쇠의 궤적을 따라오는 황금색 섬광이 밝게 빛나자 그의 앞에 작은 문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동화에서 흔히 말하는 ‘다른 세계’로의 문 같았다.
“오픈.”
열쇠를 손잡이에 넣어 문을 연 후 산하는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지구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질적 풍경 속에서 거대하게 우뚝 서 있는 새하얀 탑, 각성자들에게 ‘타워’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강산하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이럴 줄 알았다. 역시 모든 게 ‘놈들’과 연결되어 있었어.”
던전과 함께 나타난 또 하나의 이(異)세계 - 타워.
그곳에서 산하가 느낀 것은 20년 전 그 공포스런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던 불길한 에너지였다.
“던전과 타워… 대체 네놈들은 여기서 뭘 꾸미고 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