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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던전 공략 - 상층(2)



“이젠 이 녀석들도 지겹네요.”
최길영이 몸살 걸린 노인같이 해롱대던 늌크의 머리통에 곤봉을 때려 박았다.
어느새 그들은 4층 던전의 종반부까지 와 있었고 늌크와 시체바퀴라는 단조로운 조합은 길영과 지나의 물오른 협력 플레이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발휘된 산하의 디버프 때문에 4층의 몬스터들은 가엾을 정도로 능력이 다운되어 위층보다 상대하기 더 편할 정도였다.
“이래서야 지금보다 열 배는 더 많이 몰려와도 하나도 안 무서울 것 같네요.”
“아마 4층 내내 이럴 거예요. 몬스터의 수준이 대폭 올라가는 건 그다음 층이죠. 보통 5층 단위라고 들었어요.”
“아하~ 그러고 보니 그 리자드맨인가 하는 놈도 15층에서 나온다고 했죠?”
“그렇… 죠.”
그때 윤지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히든 던전의 보스, 그 두려운 청색 괴물이 세삼 떠오른 모양이었다.
길영은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위로했다.
“걱정 마세요. 그런 엄청 센 놈을 만나는 건 훨씬 나중 일일 테고, 그땐 분명 우리도 더 강해져 있을 거예요.”
“그래요, 그래야겠죠.”
“거기 둘,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 저 앞이나 봐라. 아마 여기가 5층으로 가는 입구인 모양이다.”
멀리 보이는 입구에 두 마리 커다란 늌크가 서 있었다.
놈들의 무기는 고철을 뭉쳐 찌그러뜨린 것 같은, 삐죽삐죽한 쇠 뭉치였는데 입은 옷에도 조잡한 금속들이 다닥다닥 이어 붙어 나름 갑옷 같은 모양새를 냈다.
그리고 두 명의 늌크 사이엔 그간 한 번도 본 적 없던 커다란 눈알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뭐야 저게?”
“저희가 좀 운이 없군요. 던전 4층 막바지에 드물게 나온다는 조합인데, 아머드 늌크 두 마리와 킬링 아이에요. 아머드 늌크는 대단치 않지만, 저 킬링아이가 사이에 숨어 있는 게 문제죠. 몬스터계의 저격수라고 불리는 놈이에요.”
“하… 저것들도 나름 파티를 짠 놈들인가?”
“그것 이상이에요. 저 두 마리 늌크는 킬링 아이를 최우선적으로 지키려 들거든요. 이 구간 헌터들은 저게 나오면 대부분 바로 귀환 탄대요.”
“그럴 순 없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다니, 그건 내가 용납 못 해.”
산하는 놈들이 눈치채지 않게 천천히 코너에 몸을 숨겼다.
“저 눈깔 괴물 공격 방식은 뭐야?”
“저격수라고 생각하세요. 저도 8층까지 가면서 몇 번 못 봤는데 저 눈에 에너지가 모이면 광선 같은 걸 발사해요. 그땐 우리 탱커님 장비가 좋아서 쉽게 막긴 했지만…….”
“내 장비론 안 되겠죠?”
“길영 씨 건 C클래스 장비죠? 협회 통해서 구입하는 최하급요. 그거론 안 될 거예요. 그 방패도 바로 뚫려버릴걸요?”
“으… 어쩌죠?”
“어쩌긴.”
산하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자 붉은 섬광이 맴돌았다.
“요걸로 버텨 봐야지. 얌마, 그러고 보니 넌 탱커란 놈이 왜 대뜸 무기부터 구입한 거냐?”
“어… 에, 헤헤…….”
“어휴~ 지나, 너 나중에 이 녀석 장비 사는데 같이 좀 다녀줘라. 짜샤, 이건 게임이 아니야. 그 잘난 무기도 너 죽으면 그냥 안 타는 쓰레기가 된다고. 네 목숨 지켜줄 것부터 먼저 챙겨.”
“헤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저걸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산하는 지나를 홱 돌아보았다.
“저 눈깔이 쏜다는 광선 같은 것, 혹시 대포 같은 거야? 그리고 연속으로 쏘나?”
“아뇨, 그냥 가느다란 광선이에요. 누가 그러는데 돋보기로 빛을 모아서 쏘는 것 같은 원리래요. 충전 시간이 필요하니 연사도 무리죠.”
“흠, 그럼 됐어.”
그가 돌연 길영의 방패를 뺏더니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놈 공격에 이게 그냥 뚫릴 거란 말이지?”

***

5층으로 내려가는 입구.
그곳에 서 있던 늌크들은 별안간 괴상한 물체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난 것이었다.
- 스윽~ 지익~ 스윽~ 지익~
그것은 인간 몸뚱이만 한 크기의 검고 네모난 방패였다.
그 뒤에 있는 건 분명 인간이었는데 방패로 몸을 가리고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며 동시에 검붉은 쇳덩이 같은 걸 질질 끌고 있었다.
두 늌크는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동시에 우캬캬캬 웃어댔다.
“뉴~욱크(병~신)!”
동시에 킬링아이가 그 커다란 눈알에 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광선이 그 방패 한가운데를 향해 쏘아졌다.
- 피융!
- 털썩…
킬링아이의 공격에 방패는 무참히 뚫려버리고, 그 뒤에 숨어있던 인간도 대자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한 번 껄껄 웃은 늌크들은 간만에 맛볼 인간고기 육질에 입맛을 다시며 녀석에게 다가가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산하가 놈들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렸다.
“잘 왔다, 연두색 고깃덩이들아.”
“늌! 크켁켁켁!”
그래도 5층 입구를 지키던 수문장 뉴크들이다.
힘 하난 자신 있었는데 그 힘이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 인간 한 명에게 붙들려 허공에서 발버둥 칠 수밖엔 없었다.
“늌크~!”
그러나 이미 킬링아이의 광선 공격은 재충전되고 있던 터였다.
산하가 놈들의 목을 붙잡고 들어 올렸을 때 놈의 눈알엔 발사하기에 충분한 에너지가 모여 있었다.
- 피유웅!
“왔구나. 막아라, 에너미 실드!”
“뉴욱~크(시바~알)!”
산하가 붙잡은 두 놈을 겹쳐 날아온 광선에 들이대자 녀석들은 꼬치 꿰인 고기처럼 단번에 꿰뚫려 버렸다.
그리고 번개같이 뛰쳐나온 지나가 바닥에 미끄러지며 정조준 자세를 취했다.
타겟은 바로 킬링아이의 눈알이었다.
“먹어랏!”
“고로록!”
눈알 한가운데 화살이 꽂히자 녀석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길영이 곤봉을 들고 달려들었다.
“수퍼 썬더 메가 일렉트릭 스턴 메이쓰~!”
- 빠지지직!
정체불명의 필살기와 함께 킬링아이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그 자리에 떨어졌고 동시에 작은 눈알 하나도 바닥에 떨어졌다.
“야호! 돈 될 거 건졌당~ 형님, 계획대로예요. 우리가 해냈어요.”
“…시끄러 임마, 빨리 나 좀 세이프 존 안으로 옮겨, 아파 죽겠다.”
“어? 다치셨어요?”
“그럼 저 눈깔 빔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안 다쳤겠냐? 지금까진 걍 오기로 버틴 거지.”
“헤헤, 죄송합니당.”
힘겹게 발을 옮기는 산하의 왼쪽 가슴엔 검게 불탄 자국이 있었다.
바로 킬링아이의 광선 공격을 받은 자국이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산하 씨가 입은 것도 C클래스 방호복이라 킬링아이의 공격을 막아주지 못 했을 텐데요.”
“괜찮아. 좀 더 좋은 장비면 막을 수 있다는 소릴 듣고 승산이 있다 생각했지. 날아오던 빔을 먹… 아니, 디버프를 걸었거든.”
“비, 빔에 디버프를 걸어요?”
“사실 본체에 걸면 더 간단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으니까.”
“맙소사! 혹시나 실패했으면 어쩌려고… 하여간, 이건 너무 무모한 작전이었어요. 다음부턴 나갔다 다시 오는 한이 있어도 제대로 준비하고 오자고요.”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잖아. 이런 하층부터 도망치는 버릇을 들이면 나중엔 정말 골치 아파져.”
“설마… 저랑 길영 씨 훈련시키려고 이러신 거예요?”
“아니, 날 위해서야. 요즘 생활이 워낙 편하다 보니 좀 느슨해지는 것 같아서 말이지.”
“고작 그런 이유로 목숨을 걸어요?”
산하는 킬링아이의 눈알을 들고 좋아하는 길영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난 이렇게 살아왔어. 처음 각성자가 된 때부터 쭉…….”

***

남루한 차림의 왜소한 사내가 쭈뼛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주저하던 그는 건물 안내센터로 가 말을 걸었다.
“배, 백미희 이사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미리 약속하셨나요?”
“네… 그분이 먼저 절 보자고 하셨습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안내센터 직원은 그의 신분증을 보더니 곧바로 VIP 전용 엘리베이터로 안내해 주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보안 층을 넘어 미리 준비된 응접실로 정중히 안내되었다.
“후우… 긴장되네. 설마 구룡에서 날 부를 날이 올 줄이야.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는 건너편 문이 열리고, 얼굴을 익혀 둔 여자가 나타나자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D랭크 헌터 일해용입니다. 이번에 구룡 그룹과 함께 일하게 돼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보잘것없는 능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귀사의 성공에 한몫할-”
“인사는 됐어요. 그리고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우리가 뭘 같이 해보자고 당신을 부른 건 아니에요, 일해용 씨.”
“네?”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를 보며 백미희는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자기 의자에 앉았다.
“앉아요. 당신을 여기로 부른 건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서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혹시 구룡 관계자에게 피해를 끼친 적이 있다면 제가 사과를-”
“후우… 그런 게 아니니까, 일단 자리에 앉아요.”
“네, 넵.”
일해용의 비굴한 태도에 미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마 전 이곳에 불러들였던 ‘그 남자’ 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그녀는 일해용의 이력을 읊었다.
“이름 일해용, 나이 서른둘, 헌터 경력 5년 차. 4년 전 E에서 D로 랭크 상승 판정을 받은 뒤 지금까지 랭크는 제자리. 특기 기술은… 디버프.”
“마, 맞습니다. 잘 아시는 군요, 하하.”
“여기, 그거 보여드려요.”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녀가 통장 입금 내역을 가져왔다.
“이번 만남은 비공식으로 해주십시오. 사례는 이 정도로 만족하시겠습니까?”
“네, 넵! 물론입니다!”
“그럼 거래가 성사된 걸로 알고 바로 질문할게요. 디버프란 능력은 정확하게 뭐죠?”
“디버프 말씀입니까?”
그는 눈만 껌뻑거렸다.
“그야… 말 그대로 디버프지요.”
“구체적인 효과를 말해줘요. 당신이 알고 있는 건 모두.”
“네… 아시다시피 각성자의 신체 능력은 스탯이라는 이름으로 수치화하여 표시할 수 있습니다. 디버프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스탯을 실시간으로 줄이는 능력이죠.”
“어떤 것이든 가능한가요? 예를 들어 힘을 약하게 한다던가?”
“스탯으로 표시되는 건 모두 디버프할 수 있습니다. 이건 버프의 반대 개념이니까요.”
“사용하는 방법은요?”
“대상을 보고 캐스팅, 그러니까 정신 집중을 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발동합니다. 대신 상대의 저항력에 막힐 수 있는데, 이럴 경우 효과가 줄거나 아예 먹히지 않게 됩니다.”
“그럼 그걸로 상대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나요?”
일해용은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네? 디버프는 말 그대로 버프의 반대 개념입니다. 스탯이 줄어들 때 살짝 불쾌할 순 있지만, 고통을 주는 건 불가능합니다.”
“…….”
용건이 끝났다고 하자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일해용에게 미희가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만약 상대가 건 디버프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면 그건 대체 뭘까요?”
“그렇다면…….”
일해용은 조금 생각하다가 곧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아마 디버프가 아니겠죠.”
“…그렇군요. 알겠어요. 대화 즐거웠어요.”
그가 나가고 집무실 안의 모두를 내보낸 백미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게 디버프가 아니라고? 그럼 그자의 능력은 대체 뭐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