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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파티 모집(2)



던전 전이 센터 앞에는 파티를 맺기로 서로 연락한 헌터들 간에 미팅을 주선하는 간이 미팅 룸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산하와 길영은 자신을 ‘원거리 딜러계의 신성’이라 소개하는 남자와 만났다.
“안녕하세요, 배인충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이 참 멋지시네요.”
길영이 뭔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내 특기는 날렵한 몸놀림의 구르기와 시가 1억 오천짜리 이 특제 폭발 석궁이죠. 이 석궁의 화살은 같은 자리에 세 번만 연속으로 맞추면 화살이 서로 화학 작용을 일으켜 폭발한답니다. 이놈에 당하고 살아있을 수 있는 몬스터는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 그러세요?”
“여러분과 한 파티가 되어 기쁘네요. 우리 함께 헌터계의 전설이 되어 보시죠. 그럼 이제 가볼까요? 우하하하!”
아주 불편한 얼굴의 산하와 길영을 뒤로 하고 배인충은 용감하게 전이석을 통해 던전 3층으로 돌격했다.
그리고…
“으아~ 인충님! 후방 딜러가 탱커보다 앞으로 가면 어떻게 해요! 님이 든 건 멀리서 쏘는 무기잖아요!”
“우하하! 상관없습니다. 내 날렵한 구르기 앞에 놈들의 공격 따위 스치지도 않을… 으헉!”
뒤도 안 보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가던 배인충은 곧 순식간에 늌크와 시체 바퀴 무리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이, 이놈들, 으걱! 내가 그런다고, 으헥! 너희들의 공격에 맞을 줄 알… 꽤에엑!”
“아오! 지금 님이 탱커에요? 거기서 다구리 맞으면 뭘 어쩌라고요! 빨리 일로 도망 와요 좀! 뭘 할 수가 없잖아요!”
길영이 달려들어 몬스터 떼거리 몇몇을 밀쳐냈지만, 인충은 사정없이 얻어맞아 팅팅 부은 얼굴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 마침 여기에 다들 모였구나. 내 폭발 화살로 단번에 몽땅 처리해 주마!”
“으아~ 무슨 헛소리에요!”
“받아라. 나의 화살! 구른다~!”
“야이, 병신아!”
- 콰아앙!
몬스터 무리 속에 제 발로 굴러 들어간 배인충의 화살이 세 번 쏘아진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폭발에 휘말린 배인충은 산산조각 난 그의 석궁과 똑같이 던전 안에 고이 뿌려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씨발!”
또다시 3층 공략에 실패한 길영이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만난 자는 더 가관이었다.
“안녕하시오, 나는 신검합일의 경지에 오른 스페이스류 검술의 창시자, 이주인이라고 합니다.”
“…….”
“영어권 사람들은 나의 실력을 경외하는 뜻으로 영어 이름, 이 마스터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가끔 서구식으로 이름을 먼저 부르기도 합니다. 나도 그걸 좋아하구요.”
“아…….”
“그럼 가볼까요? 모두가 우러러 마지않는 나의 비술 ‘스페이스류 검술’을 보여주도록 하겠소.”
“아아아…….”
길영이 혼이 뽑혀나가는 듯한 신음을 질렀지만 이주인은 아랑곳 않고 전이석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나타난 괴물들을 향해 다짜고짜 용감히 달려들었다.
“으아~ 제발 저 좀 먼저 가게 해줘요. 제가 탱커고 님은 딜러잖아요!”
“후하하하! 걱정 마시오. 내 스페이스류 검술은 세 번 때리면 한 번 더 때리게 되는 무적의 기술! 킬만 주시오, 내 이 던전을 홀로 캐리해 드리겠소!”
“아니, 시발! 캐리고 나발이고 나 좀 먼저 들어가자고! 몸빵은 내가 해줘야 할 거 아냐!”
그러나 자칭 이 마스터, 혹은 Master Lee라 불리는 이분은 귀가 막힌 모양인지 용감무쌍하게 적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잘 보시오! 나의 스페이스류 검술을!”
“야이, 병신아!”
- 콰직!
“꾸에엑!”
추잡한 비명과 함께 괴물의 공격을 받은 이주인은 신나게 몽둥이찜질을 당하다 그대로 던전의 흙속에 묻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길영과 산하는 또 한 번의 눈물을 삼키며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씨바알!”
“…….”
“각성자 협회의 파티 매칭 시스템은 진짜 최악인거 같아요. 왜 이런 벌레 같은 놈들만 소개해 주는 거죠?”
“아무래도 우린 뭔가 좀 안 좋게 찍힌 모양이다.”
시스템은 냉정하다.
강산하와 최길영은 기초교육 중 무려 B랭크 헌터가 사망하는 일을 발생시킨 요주의 대상이었다.
누군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협회의 자동 분류 시스템은 이들을 트러블 메이커로 분류해 버렸고 결국 똑같이 문제투성이인 녀석들과 엮이게 만들었다.
그러니 아무리 파티 매칭을 새로 해봐도 앞서 만났던 그 벌레 같은 두 놈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놈들만 계속 만나게 되고 말았다.
“안녕하신가. 난 '야수 Oh~' 길드의 수퍼 루키이자 명석한 두뇌로 ‘사이언스’라는 별명을 가진 장차 헌터계의 거물이 되실 귀하신 몸으로서-”
“당장 꺼져! 병신아!”
뒤에서 들려오는 괴성은 무시하고 최길영이 씩씩거리며 미팅 룸을 박차고 나왔다.
“형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협회 파티 매칭 시스템에 의지해선 저런 쓰레기들 밖에 못 만나나 봐요. 혹시 형님이 아시는 다른 각성자는 없어요?”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너랑 팀 했겠냐?”
“꽥…….”
“그리고 내가 활동할 때부터 20년이나 지났어. 이젠 현역인 놈은 거의 없을 거야.”
“아우, 저도 아는 사람 전혀 없는데. 어쩌죠? 이러다간 초보 탈출의 증거라던 던전 10층 클리어도 영영 못 할 지경이에요.”
한참을 끙끙대며 고민하던 중 갑자기 길영이 소리를 질렀다.
“아, 맞다! 한 명 있다!”
“그래? 네가 아는 딜러가 하나 있다고?”
“지나 씨요, 윤지나 씨. 그때 지나 씨 포지션이 후방 딜러로 나왔었잖아요. 실제로 히든 던전 안에서 죽을 뻔하며 싸울 때 저랑 호흡도 맞춰봤고요.”
“…하긴 그렇구나.”
길영은 신이 나서 즉시 헌터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윤지나 씨… 윤지나 씨는~ 아! 찾았다. 어, 근데…….”
“아마 다른 파티에 이미 들어가 있겠지? 그것도 꽤 안정적으로.”
“우와, 어떻게 아셨어요? 벌써 어떤 팀이랑 던전 다녀온 게 다섯 번이 넘네요. 아예 정식 멤버가 된 모양이에요.”
“대충 보면 알아. 각성자가 된 여자는 딱 두부류다. 상황 판단 못하고 어리버리하다 죽던가 아니면 야무지게 살아남던가.”
“그건 다들 그런 거 아녜요?”
“남자란 동물은 좀 위험하다 싶으면 몸이 자동으로 움직여서 줄행랑치게 돼 있어. 헌데 여자는 그게 안 되는 경우가 많지.”
“그, 그래요?”
“자기도 모르게 허리가 풀린다고 하던가 그렇다더라. 하지만 그 윤지나란 여자는 나름 배짱 있는 타입이더군. 혼자 놔둬도 너보다야 훨씬 나을 여자였지.”
“윽… 저 형님한테 평가가 영 낮군요. 하여간 오퍼는 한번 넣어볼게요. 흑흑, 부디 와주면 좋겠… 어, 어라? 유, 윤지나 씨?”
길영의 헌터폰으로 연락한 것은 놀랍게도 지나였다.
그가 파티 구인 명목으로 쪽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유, 윤지나 씨! 오랜만이에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답을 주셨어요? 정말 저희 팀 오실 거예요?”
“네, 그러려고요. 길영 씨 말 대로면 거기 그때 그분도 있죠? 1세대 각성자라시던 강산하 씨요.”
“네, 형님요? 당연히 계시죠. 근데 우리 둘만으론 던전 클리어가 좀 힘들어서 연락드린 건데 윤지나씬 이미 파티에서 활동하고 계시니 이렇게 빨리 답을 주시리라곤 생각도 못…….”
“거기 어디에요? 지금 바로 갈게요.”
“네, 넵! 여긴 던전 전이 센터 충무로 점이에요.”
“알았어요, 저 바로 갈게요.”
순식간에 통화가 끝나고 멍한 표정을 한 길영 앞에서 산하가 히죽 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뭔가 용무가 있나 본데. 이거 떨리는구먼, 킥.”

***

자리에 나타난 지나는 이전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옷과 액세서리부터 뭔가 귀티가 나는 것이 그간 벌이가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오랫만이네요, 최길영 씨 그리고 강산하 씨.”
“네, 우와~ 그간 되게 잘 나가셨나 봐요. 전보다 분위기가 훨씬 멋져지셨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름 괜찮게 벌었어요. 던전은 현재 파티에서 8층까지 클리어했고요. 초보 각성자치곤 제법 빠른 속도래요.”
“진짜 대단하세요, 헤헤헤.”
길영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살짝 초조해 보였다.
지나는 산하를 바라보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러분의 파티라면 참여할 용의가 있어요. 아마 딜러를 원하시는 거겠죠? 그간 후방 딜러로서 나름 경험을 쌓았으니 분명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와!~ 감사해요 진짜, 우웁!”
산하는 길영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지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먼저 이유부터 들어야겠어. 잘 나가던 팀을 버리고 왜 우리랑 같이 행동하려 하는지.”
“그건…….”
입이 틀어 막힌 길영의 눈길도 지나의 입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요즘… 두려움을 못 느껴요.”
“뭐야 그건. 감정 상태에 문제가 있다 고백하는 거야? 그런 거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때 그 히든 던전에서 청색 리자드맨하고 싸운 뒤론 어떤 적을 만나도 긴장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녀의 얼굴은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다.
“물론 지금의 제가 엄청나게 강해져서 그렇다는 건 아녜요. 다만 그때 겪었던 경험이 너무 엄청나서 지금 파티와 던전을 공략할 때면 솔직히 하품이 나와요. 눈앞에 아무리 늌크 따위가 쌓여 있어도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거든요.”
“흠…….”
“히든 던전에서 만났던 그 괴물은… 정말 악(惡)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녀석이었어요. 던전을 나온 뒤에도 그놈이 어디선가 나타나 내 목을 물어뜯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죠.”
“쯧!”
산하는 아까부터 그녀의 말 뒤에 묘한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뭔지 알겠다는 듯한 그의 앞에서 지나는 하소연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던전에서 만나는 몬스터들에겐 그런 악의가 없어요. 적당히 상대하다 보면 알아서 없어질 것 같은 무기력함이 엿보이죠. 그런데 지금의 파티원들은 고작 그런 놈들이나 상대하는 주제에 자기들이 아주 잘난 줄 알아요.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다간 잘해봐야 15층 아니면 20층에서 멈추게 될 거에요. 전 그러면 안 돼요.”
“윤지나 씨는 보다 더 깊은 곳을 노리고 계신건가요?”
“물론이에요. 헌터의 수입은 심층부로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나잖아요. 우리 집안은 가난해서 제가 돌봐야 할 가족들이 많아요. 제가 앞으로 하고픈 일도 돈이 많이 들고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던전 심층을 공략한 후 목돈을 마련해 바로 헌터를 은퇴할 생각이에요.”
“헐… 헌터를 은퇴하고 다른 일을 한다구요? 이 좋은 일을 그만두고요?”
“이게 좋은 일인 건 목이 붙어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겠지.”
산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드물게 영민한 아가씨군. 헌터일의 본질을 잘 꿰뚫고 있어. 확실히 그 원종 리자드맨 녀석과 싸워본 뒤론 뭐든 시시해 보이겠지. 그게 바로 차원이 다른 싸움을 경험해 본 여파야. 살아남기에 좋은 태도지, 분명…….”
“강산하 씨와 함께 있으면 나 자신이 무뎌지는 걸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높은 경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은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오신 분 같으니 제게도 그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전… 솔직히 각성자고 헌터고 별로 하고 싶지 않거든요. 목숨을 걸고 돈을 버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지금은 요원하지만 가능한 빨리 큰돈을 벌어서 이 생활을 끝내고 싶어요.”
산하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자 지나의 시선이 그에게 날아와 꽂혔다.
“도와주시겠나요? 제가 살아남아서 무사히 은퇴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제가 이 팀에 들어오려는 이유는 바로 그것뿐이에요.”
“산하 형님, 우린 지나 씨 같은 딜러가 꼭 필요해요. 그냥 허락해 주세요.”
“흐음…….”
두 사람이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산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조건은 단 한 가지야.”
“네, 말씀하세요.”
“길영이한텐 전에 말했었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지. 너희 두 사람… 나와 함께 하려면 딱 이것 한 가지만 명심해.”
그의 손가락이 길영과 지나를 향했다.
“나에 대해 괜한 호기심을 품지 말 것. 내 과거라든지 아니면 가족이라던지. 뭐가 됐건 내 개인 내력에 대한 것은 질문도 의문도 갖지 말 것. 조건은 오직 이것 하나야, 할 수 있겠어, 윤지나 씨?”
“…물론이에요. 그런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게요.”
“좋아.”
산하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한 팀이 됐으니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고. 같은 파티가 된 것을 환영하지, 윤지나 씨.”
“그냥 지나라고 불러주세요. 길영 씨, 강산하 씨. 받아줘서 고마워요.”
최길영이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이제야 드디어 진짜 던전 공략이 진행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