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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구룡 그룹(2)



검은색 바탕에 은을 뿌린 듯 화려하게 빛나는 외벽.
역삼 중심가에 우뚝 치솟은 최고층 빌딩인 바로 이곳에 명성 자자한 구룡 그룹 오너가문의 집무실이 있다고 전해진다.
1조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로 인수된 이 빌딩은 중간층부터 강력한 보안 절차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건물 매니아들 사이에선 그 안쪽 구조에 대한 갖은 추측이 나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보안 층에 허름한 옷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원, 젠장. 무슨 놈의 빌딩이 이렇게 크냐. 올라오는 데만 한 세월이네.”
“무슨 용무십니까?”
딱 봐도 각성자인 건장한 남자 세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남자, 강산하는 그저 똥 씹은 표정으로 보안대 너머를 야리며 한마디 내뱉었다.
“여기가 구룡 그룹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슨 용건이신지요?”
“가서 허연 쌀인지 검은 쌀인지 좀 불러오쇼.”
“???”
자리를 지키는 보안 요원들의 미간이 찡그려지자 산하도 같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제기랄, 하도 짜증이 나니 머릿속에 있는 게 그대로 튀어나오네. 가서 백미흰지 흑미흰지 데려오란 말입니다, 젠장!”
“…백미희 이사님 말씀하시는 거겠죠?”
묘하게도 갑자기 보안 요원들의 얼굴에 측은한 빛이 보였다.
그리고 산하의 신분증을 보더니 두말없이 그대로 통과시켜주었다.
“의외로 쉽게 보내주시네. 이런 일이 잦은가 봅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오면 들여보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누구한테?”
“당연히 백미희 이사님이죠.”
“그런데 댁들 표정은 왜 그런 겁니까?”
“…….”
보안 요원들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고 재수 없는 예감에 산하는 입꼬리를 뒤틀며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나타난 커다란 방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멀리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 찰칵! 찰칵! 찰칵!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타이틀 사진이에요. 구룡의 다음 프로젝트를 장식해 줄 메인 화면이죠. 타이틀은 ‘가장 오래된 헌터가 돌아오다’ 정도가 좋겠군요.”
“누가 보면 내가 무슨 원시인인 줄 알겠군. 당장 사진 지워.”
“그건 우리가 좀 더 이야기해 본 뒤에 해도 늦지 않겠죠?”
던전에선 눈물 콧물 투성이던 것과 달리 검은 생머리에 세련된 여성 정장을 걸친 지금의 백미희는 카리스마 넘치는 커리어 우먼처럼 소위 그룹 이사‘님’ 소리 들을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하는 그저 얼굴만 찡그린 채 그녀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뭐하자는 짓이야.”
“내가 뭘요?”
“언론사에 연락해서 내 뒤를 캤잖아. 내 동생한테 전화가 오더니 날 바꾸라더군.”
“해령이가 맡은 일은 참 잘해요. 벌써 당신에 대해 많은 걸 알려줬거든요.”
그녀가 탁자 위의 모니터 화면을 이쪽으로 돌리고 거기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강산하. 1971년생, 학력 고졸. 알려지지 않은 때에 양친이 사고로 사망. 역시나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각성자로 등록되고 이후 한국 각성자 협회에서 게이트 처리 작전에 동원되다 1998년 말 동인천 게이트 크래쉬 사건으로 행방불명.”
“…….”
“친족 관계로 여동생 강예정, 조카 김아린이 있고 강예정은 현재 중소 보험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음. 또 강예정의 남편인 김…….”
“그만!”
산하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찍자 파편이 흩날렸다.
그 순간 방안의 조명이 붉은빛으로 번쩍이며 경보가 울렸으나 백미희가 한쪽 손을 번쩍 들었다.
“괜찮아요, 이대로 진행합시다. 경계태세 해제하세요.”
“흥, 대기업 따님이시라 역시 끄나풀들을 대기시킨 모양이군.”
“만에 하나는 대비해야죠. 각성자라는 존재가 나타난 뒤로 보안 업체들은 나름 쏠쏠하게 돈을 벌고 있답니다.”
탁자를 부숴버린 것과 다르게 산하의 눈빛은 아주 냉정한 상태였다.
피가 흐르는 주먹은 아랑곳 않고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미희에게 손가락을 향했다.
“아무래도 그때 죽게 놔뒀어야 했나 보군. 너 지금 도를 넘고 있다는 거 알아?”
“알아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널 이 자리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당신은 E랭크고 난 D랭크에요. 데이터상으론 내가 더 우위죠.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잠시 찡그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히든 던전 속 당신의 모습을 본 뒤론 절대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드네요.”
“그걸 알면서 무슨 깡으로 날 여기에 들여놓은 거냐. 이 방 바깥에 어떤 녀석들이 득실대던, 그놈들 오기 전에 네 목을 꺾어버릴 시간은 충분한데.”
“내가 사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에요.”
미희의 입에 드디어 작게 미소가 걸렸다.
부서진 탁자에 걸터앉은 그녀가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20년 전 각성자들의 실체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어요. 오합지졸인 옛날 각성자 협회는 기록 보관조차 제대로 못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세상에 당신은 굉장히 파격적인 존재에요. 랭크를 무시한 강함… 그런 게 있을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건 제법 괜찮은 화젯거리가 될 거에요.”
“그래서 내 뒤를 캤다고?”
“당신에게 그냥 접촉해 봤자 곧바로 거절당할 걸 알았거든요. 당신을 당신 발로 이곳까지 끌어들일 방법은 이것뿐이었으니까.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이건 불쾌 정도가 아닌데. 난 별로 남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아.”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지난번에 돈으론 당신을 살 수 없다고 했잖아요. 대체 뭘로 당신을 살 수 있어요? 그걸 말해줘요.”
“넌 왜 그렇게 날 사고 싶어 하는 건데? 그것부터 말해봐라.”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미희가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알아요? 지금의 구룡은 내가 만들었어요.”
“네 아버지가 아니고?”
“구룡 기업은 아버지께서 만드셨죠. 하지만 구룡의 여성 의류를 던전에서 나오는 신소재로 가공해서 여성용 호신 의류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내가 낸 거예요. 그 덕에 구룡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그 공을 내게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탁자를 두들기는 손가락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산하는 그녀의 눈에 점점 불길이 일어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아이디어를 제안서로 만들어 드렸을 때 아버진 그걸 보지도 않으셨어요. 하지만 던전의 신소재 관련 상품이 세계적 유행이 되자 태도를 바꿔 내 아이디어를 자기가 진행하기 시작했죠. 내가 드렸던 제안서를 그대로 베껴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신 아버지가 당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지금의 구룡을 만들었단 말이야?”
“그런 셈이에요. 내 제안서의 계획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실행하시더군요. 물론 나는 반드시 빼놓고요.”
“킥… 그거 진짜 웃기는군.”
“비웃어도 상관없어요. 이게 바로 명문 재벌가 사람으로서의 삶이니까. 돈과 사업 그리고 권력 앞에선 부모, 자식, 형제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죠.”
“그래서 날 사려는 이유가 그건가? 당신의 또 다른 아이디어를 성공시켜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훗! 인정 따윈 필요치 않아요. 구룡 그룹 내에서 내 입지를 단단히 하고 싶을 뿐이에요. 차기 경영자의 자리를 다른 형제들로부터 빼앗아 올 만큼이요.”
“왕위 다툼이라 이거구만. 이제 보니 난 졸지에 왕자님께 스카웃 제의를 받고 있는 거로군. 아니… 이제 보니 공주님인가?”
“공주, 그 말 좋죠. 내가 각성자로 각성하고 그 능력이 일반인보다 높다는 것을 안 순간, 난 나 스스로를 이 계획의 얼굴마담, 그래요, 공주가 될 생각이었어요. 보다시피 내가 얼굴이건 몸매건 뭐 빠지는 게 없잖아요? 대기업 구룡 창업자의 딸에 헌터로서 능력까지 뛰어나니 화젯거리론 금상첨화인 거죠.”
대놓은 자화자찬에 입술을 씰룩이던 산하를 무시하고 미희는 계속 떠들어댔다.
“하지만 당신의 내력도 제법 매력적일 것 같아요. 20년 만에 돌아온 동인천 작전의 생존자이자 스탯으로 측정될 수 없는 강함을 가진 헌터라… 가십거리론 딱이죠.”
“그 뒤엔?”
당신을 시작으로 다른 참신한 인재를 포섭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생각이에요. 물론 그 옆엔 구룡제 호신 의류가 항상 함께하겠죠. 결국 내 사설 비즈니스 길드 창설에도 성공할 거고 그때가 되면 차기 구룡 후계자 중 날 능가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게 바로 내 계획의 전모랍니다.
“말은 좋군…….”
그때 산하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계획’엔 단순히 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분명히 있었다.
그때 이 여자의 배경이 있다면 뭔가 편리하지 않을까?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당신을 살 수 있을지 말해주겠어요? 산다는 표현이 싫다면 협력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그거… 지금 꼭 답해야 하나?”
“시간이 필요하다면 드릴게요. 단 너무 오래는 안돼요. 기한은 한 달. 그 안에 답을 주세요.”
“그렇게 하지. 다만 네가 기억해야 할 게 있어.”
강산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 안에 돌고 있는 살기를 보고 백미희는 잠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너와 손을 잡건 안 잡건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야 할 거야.”
“그, 그게 뭐죠?”
“내 동생과 그 가족에게 접근하지 마… 어느 쪽이건 이번처럼 괜히 접촉하거나 뒤를 캤다간…….”
“허억!”
어느새 휘감겨온 붉은 촉수.
그것이 몸에 닿은 순간 미희는 마치 땅속으로 추락하는 듯한 끔찍한 느낌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질렀다.
경보와 함께 또다시 붉은 조명이 켜졌다.
“생지옥이란 게 뭔지 느끼게 해주마… 아니, 네가 그렇게 원하는 구룡 그룹 전체를 지옥의 엉덩이 속으로 처넣어주지.”
“…….”
산하에게 중화기를 겨눈 보안 요원들이 그를 제압하고 포박하려 할 때 미희가 그것을 제지하고 나섰다.
아직 창백해진 낯으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를… 내버려 둬요. 강산하 씨, 이쪽의 무례는 사과할게요. 다신 당신 주변인의 뒤를 캐는 일은 없을 거예요.”
“사람을 얻으려 할 땐 예의를 지키고 행동하는 게 좋을 거다. 괜한 수작 부릴수록 나중에 비수가 돼서 돌아올 테니까.”
“기억… 할게요.”
그가 사라지고 집무실에 혼자 남은 미희는 산하의 디버프 능력이 휘감았던 자리를 만지며 작게 몸을 떨어댔다.
‘대체… 디버프란 게 뭐길래 그렇게 끔찍한 느낌을 준 거지? 마치 온몸의 기운을, 심지어 영혼까지 모조리 빨리는 듯한…….’
그리고 잠시 후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지시하는 것이었다.
“각성자 중에 디버프 능력이 있는 사람을 포섭해 봐. 그리고 그 능력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와. 필요하면 내가 직접 설명을 듣겠어. 그 디버프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