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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구룡 그룹(1)



작은 집, 작은 방.
그리고 작은 TV.
그 앞에 가로로 길게 누워있던 강산하의 멍하니 벌린 입에서 한 가닥 침이 흘러내렸다.
왜냐하면 지금 막 TV 속 걸그룹이 두 다리를 신나게 ‘쩍벌’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20년… 20년이 지나고 세상이 이렇게 변하다니. 천국이 어쩌고 떠드는 놈들이 있더니, 진짜 그게 온 건가?”
“아유~ 삼촌 또 걸그룹이야? 벌써 사흘짼데. 이제 질리지 않아?”
“저게 왜 질리겠냐. 남자가 저거에 질렸으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어.”
강예정의 딸, 이제 딱 13살인 산하의 조카 김아린은 자기 무릎에 얹어놓은 삼촌의 머리통을 팡팡 때리며 말했다.
“삼촌 아직 병원에 누워있을 때 엄마가 이렇게 머리를 때리면서 맨날 그랬어. ‘이 속엔 대체 뭐가 들었기에 여친 하나 못 만들던 쪼다 주제에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오호라, 그래?”
“그리고 나보곤 절대 삼촌 같은 사람은 되지 말래.”
“지 딸한테 참 잘도 좋은 거 가르치네. 그리고 머리 고만 때려라, 탈모 생길라.”
“괜찮아, 삼촌. 삼촌은 속이 좁은 만큼 모공도 좁아서 머리 안 빠질 거라고 엄마가 그랬어.”
“…대체 네 엄마는 날 뭐라고 너한테 교육시킨 거냐?”
“음… 인간 돗자리? 삼촌 병문안 갈 때면 엄마랑 같이 삼촌 배 위에서 고스톱 쳤거든. 그 쫙쫙 감기는 맛이 참…….”
“강예정, 이것을 그냥 확! 조카 앞에서 지 오라비를 대체 뭐로 만든 거야.”
산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다가 아린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넌 내가 낯설지 않냐?”
“왜에? 삼촌은 삼촌인데.”
“난 20년이 넘게 깡통처럼 얼어붙어 있었잖냐. 솔직히 너랑 말 섞은 것도 오늘이 사흘째인데.”
시간 동결 상태에서 깨어난 뒤 각성자 기초교육부터 시작해서 첫 던전 돌입, 그리고 옛 동료와의 ‘감동적 재회’가 끝날 때까지 산하는 동생, 예정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각성자 협회에서 과거 동인천 작전의 생명 수당 1억을 지급한 걸 확인한 뒤에야 예정의 집에 들어온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TV 앞에서 꼼짝도 않은 채 21세기 신문명의 혜택을 맛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요 맹랑한 조카 녀석은 그런 삼촌에게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달라붙었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삼촌을 계속 봐와서 별로 어색한 거 없어. 그리고 삼촌 헌터잖아? 요즘 헌터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하더라. 혹시 너도 각성자가 되고 싶으냐?”
“그럼! 얼마나 좋아? 돈도 많이 벌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 마지막 한마디엔 신경질적인 짜증이 섞여 있었다만, 아린인 개의치 않는 투였다.
“삼촌 혹시 나도 각성자 아닌지 한번 봐주면 안 돼?”
“자다가 헛소리하면서 깨냐?”
“아니.”
“좀 밉살맞은 놈, 어깨 한 번 툭 쳤더니 전치 3개월 나왔다고 고소장 날아 왔냐?”
“아니.”
“왠지 손에서 장풍 나갈 것 같아서 쏴봤더니 진짜로 뭐가 날아 가냐?”
“아니.”
“그럼 해당 사항 없네. 꿈 깨라 꿈 깨.”
“히잉~ 하지만 나중에라도 될 수 있는 거잖아. 우리 담임 쌤이 그러는데 전 세계 각성자 수는 점점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대.”
“…그래?”
산하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아린이는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얼마 전엔 다른 쌤 하나가 각성자인 게 판명돼서 이제부터 헌터 한다고 학교 그만뒀어.”
“흐음… 다들 그런 식이면 애들은 누가 가르치냐. 그리고 자꾸 쌤쌤거리지 마라. 선생님이라고 불러.”
“피~ 삼촌 진짜 옛날 사람인 거 티낸다. 요즘 누가 선생님이라고 해? 쌤들도 다 자길 쌤이라고 불러.”
“시대가 변했구만, 쯥… 됐으니까 저 가시내들이랑 비슷한 춤추는 다른 애들도 보여 줘봐.”
“에휴~ 알았어요~ 우리 불쌍한 모쏠 삼촌.”
“요게.”
그때 방문을 열고 강예정이 안으로 들어왔다.
13살 조카에게 노출 만빵 걸그룹 VOD를 틀어달라는 향년 마흔여덟 삼촌의 모습에 극혐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던 그녀가 엄지를 척 들었다.
“참 자~ 알도 한다. 계속 그렇게 살아줘, 오빠. 우리 집 방구석에 안타는 쓰레기 한 마리가 산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게.”
“야, 현금 일억을 한순간에 똭하고 벌어오는 능력 있는 남잔데 안타는 쓰레기라니 평가가 너무 박하지 않냐.”
“그러다 다음번엔 한 200년 굳어져 있겠다? 정신 차려, 이 아저씨야.”
“쯥…….”
사흘 전 산하가 일억 잔액이 찍힌 통장을 가져와 내밀었을 때 강예정은 그걸 집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었다.
“일억? 십억, 이십억을 줘도 다 필요 없어! 20년 내내 굳어져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는 오빠 보면서 가슴팍 치며 살았는데 협회에선 보상이랍시고 돈이나 휙 던져주면 그만인 거야? 이게 그때 세상을 위해 목숨 걸었던 오빠의 값어치야?”
“…….”
“나 이 돈 못 받아. 쓰려면 오빠나 알아서 써. 저금을 하던 어디 가서 확 써버리든 맘대로 해.”
“알았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여동생의 말을 산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 오빠 피 값을 받아다 그걸 쓴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끔찍한 생각이겠지.
지난 20년 동안 예정은 유약했던 열일곱 소녀에서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강인한 어머니로 탈바꿈해 있었고 그걸 인정한 산하는 그저 곱게 두 손 두 발 들어버렸다.
그때 아린이가 눈치 없게 끼어들었다.
“엄마, 그럼 나는? 나 요번에 폰 바꾸고 싶은데.”
“경고하는데 너 삼촌한테 꼬리 쳐서 뭐 받아낼 생각하지 마. 오빠도 절대 아린이한테 그 돈으로 뭐 사주지 말고. 그건 오빠 피 값이고 잃어버린 인생 20년 값이야, 그 돈만큼은 절대 안 돼!”
“알았다, 알았어.”
“정 우리한테 뭐 해주고 싶거든 그놈의 망할 헌터 짓거리 말고 다른 걸로 벌어다 줘. 이제 각성자라면 정말 지긋지긋해.”
“야, 그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이 오라비는 괴물 때려잡는 것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어요.”
“누가 뭐래? 헌터짓 계속하다 뒈지는 건 오빠 맘인데 그 짓으로 번 돈으로 우리한테 뭐 해줄 생각은 말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그 꼴은 못 봐.”
“까칠하기는…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뭐 다른 할 말 있어?”
“손님 왔어.”
“손님?”
산하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지금 세상에서 자길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설마 협회의 머저리들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설마?
“형님! 헤헤, 안녕하셨어요.”
“…너 어떻게 여길 알았냐?”
나타난 것은 최길영이었다.
그의 얼굴은 뭔가 때깔이 좋아졌는지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발품 좀 팔았죠, 히히히. 그리고 던전에서 벌어놓은 게 좀 있잖아요. 그걸로 한동안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으면서 남는 걸로 수소문 좀 해봤어요, 킥.”
“좋겠구나. 난 벌어온 돈,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원 세상이 하나둘 바뀌었어야지.”
“헤헤헤, 돈 쓰는 게 어려울 게 뭐 있어요. 조금만 지나면 다 적응되실 거예요.”
“그래, 여긴 무슨 일?”
쌀쌀맞은 말투에 길영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아유~ 형님, 너무 차가우시다. 같이 목숨 걸고 같이 싸운 사인데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목숨 걸고 같이 싸운 놈들한테 뒤통수를 자주 맞아봐서 말이야. 용건이 뭐야?”
“아후~ 일단 이거 받으세요.”
“이건… 이신운가 하던 그놈 꺼 아니냐?”
길영이 내민 것은 던전에서 죽어 시체도 찾지 못한 헌터 이신우의 무기, 마나 블레이드였다.
마법, 소위 마력을 가진 각성자가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 중 하나로 제법 고가의 물건이었다.
“이신우 헌터한텐 연고자가 없대요. 그래서 같은 팀원이었던 우리한테 소유권이 돌아왔어요.”
“그래? 그 잘난 B랭크께선 고아출신이기라도 했나?”
“아뇨, 음… 가끔 있는 일인데 헌터가 되자마자 부모랑 연을 끊어버렸나 봐요. 헌터 수입은 막대하니까 가족이라 해도 나눠 먹긴 싫다 이거죠.”
“시팔… 그놈 진짜 개새끼였네. 그럼 이거 어떻게 할 건데? 다른 사람들은?”
“지나 씨는 권리 포기하겠다 하셨고. 미희 누님은 연락이 안 닿아요. 어휴, 구룡 그룹 따님이랑 제가 어떻게 연락을 해요.”
“그래그래, 그럼 너랑 나만 남았네. 이거 팔 거면 당연히 동의해 주지.”
“아뇨, 이거 그냥 형님이 쓰시는 게 어때요?”
“내가?”
길영이 히죽 웃었다.
“형님 디버퍼시잖아요. 디버프도 마력을 다뤄야 쓸 수 있는 능력이니 당연히 이 마나 블레이드 쓰실 수 있으실 거 아녜요. 형님의 그 커다란 대검은 잔챙이한테까지 매번 휘두르긴 너무 번거로울 것 같고요.”
“그건 그렇긴 하지.”
녀석이 다시 한 번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마나 블레이드에 형님이 은근슬쩍 눈길 주신 거, 저 봤거든요, 헤헤헤.”
“그런 눈치는 또 있구나, 요 녀석아.”
“헤헤.”
멋쩍게 머리를 긁는 길영의 앞에서 산하는 약간 찡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런 뇌물까지 바쳐가며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뭐냐?”
“으어, 역시 형님한텐 뭐 숨길 수가 없다니까.”
“네 녀석 정도야 내 손바닥 안이지. 뭔데?”
“저기…….”
길영은 우물쭈물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푹 숙였다.
“형님, 저랑 앞으로 팀 짜서 헌터일 쭉 같이하지 않으실래요?”
“…팀을 계속 같이하자고?”
“네. 솔직히 저 감명 먹었습니다. 사실 던전 클리어 조건은 오로지 각성자의 랭크가 전부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형님은 전혀 다르셨어요. 그때 살아나온 것 생각하면 아직도 꿈만 같습니다. 전 꼭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헌터가 될 생각이거든요. 그러려면 형님 같은 분 옆에서 배우는 게 최고일 것 같아요. 부디 받아주세요, 산하 형님.”
“흠…….”
현대에 다시 깨어난 강산하에겐 한 가지 중대한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가능한 아는 사람이 적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걸 위해 혼자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죽은 이신우의 말에 따르면 현대의 헌터 중 팀을 짜지 않는 자는 없다고 했다.
혼자 다녔다간 오히려 세간의 이목을 더 끌게 될지도 모르지…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산하의 날카로운 눈빛이 계속 헤죽거리는 길영의 얼굴에 날아가 꽂혔다.
“너… 더 강한 헌터가 되려는 목적이 뭐냐?”
“뭐긴요. 그냥 잘 먹고 잘살려고 그러는 거죠.”
“…그래?”
“아, 물론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 끼치고 잘 먹고 잘살래요, 헤헤.”
“그 잘 먹고 잘 살려는 짓을 하다 보면 반드시 다른 사람과 부딪히게 돼있어. 네가 가지려는 걸 다른 사람도 가지겠다고 칼 들고 덤벼들면 넌 그때 어떻게 할 거야?”
“그, 그럴 땐요?”
길영의 표정이 잠깐 심각해지더니 곧 다시 실실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정 급한 게 아니면 양보하죠 뭐.”
“…….”
“전 떼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녜요. 그냥 적당히 잘사는 게 목표지. 흡혈귀처럼 밑도 끝도 없이 보이는 것 다 집어삼키는 사람은 되기 싫어요, 에헤헤.”
“흠…….”
잠깐 고민하던 산하는 결국 한 손을 내밀었다.
확 밝아진 표정의 길영이 그 손을 잡으려 할 때 산하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말고, 내놔 임마.”
“예?”
“이신우가 쓰던 싸이킥 부스터 내놓으라고. 그것도 가지고 있는 것 아냐? 어차피 넌 쓰지도 못할 테니.”
“네, 네…….”
길영이 한 쌍의 팔찌, 싸이킥 부스터를 내밀자 그걸 받아든 산하는 등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길영의 앞에서 문을 닫는 산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정 짠 다음에 연락해라. 나랑 팀 먹을 싹수가 있나 한번 기회는 주마.”
“예?… 네, 네! 형님,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연락드릴게요! 이얏호!”
최길영은 날아갈 듯한 얼굴로 방방 뛰며 감사하다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오는 산하에게 예정이 자기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전화네.”
“나한테? 누가?”
“…언론사래.”
“…….”
“너 또 무슨 사고 쳤냐?”
“안 쳤어, 임마.”
“그런데 언론사에서 전화가 와! 오빤 핸폰 개설도 안 했는데, 신상 털어서 내 폰으로 전화가 올 정도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20년 만에 깨어나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일 저질렀냐, 이 화상아!”
“아오~ 시끄럽다! 비켜봐 좀.”
흥분하여 왁왁대는 예정을 저리 밀어놓고 전화를 받자 폰 안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산하 씨 되시죠? 저는 알파 위크의 윤해령이라고 합-”
“너 누구야, 뭐 하는 놈이야? 내 동생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살벌한 목소리에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20년 전 동인천 작전 참가자였던 1세대 각성자 강산하 씨 맞으시죠? 그때 일에 관해서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누가 알려줬어?”
“네?”
“내가 동인천 작전 참가자라는 거, 누가 알려줬냐고. 그것도 언론에다가 말이야.”
“…….”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침묵이라면 강산하의 전매특허, 무려 20년을 버텨왔던 그였다.
그리고 결국 상대는 백기를 들었다.
“구룡 그룹입니다.”
“시팔!”
단번에 전화를 끊어버린 산하가 이를 북북 갈며 중얼거렸다.
“백민지 흑민지 그년이 한 짓이겠군,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