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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배신자(2)

게이트 안의 풍경은 황량한 폐허와도 같았다.
하늘엔 핏빛 구름이 휘몰아쳤고 사방에서 검붉은 기운이 용솟음쳐 올랐다.
그 가운데서 정체불명의 존재와 대면하고 있는 강산하의 얼굴엔 그저 싸늘한 냉소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우리들을 배신했지!”
“배신은 무슨. 우리가 그렇게 돈독한 사이들이었던가?”
“우리는 서로 뭉쳐야만 했다. 각성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핍박의 대상이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나? 그런데 네놈은 너 자신만을 위해 우리 모두를 배신했어!”
“후후…….”
산하가 얼굴을 가리고 음산하게 웃었다.
잠시 후 손을 내린 그가 혓바닥을 쑥 내밀었다.
“그렇게 미안하단 소릴 듣고 싶었나? 그럼 해주지 뭐. 아이구~ 미안해라?”
“네, 네놈! 이 버러지만도 못한 미친개 같은 놈이!”
태풍같이 회전하는 검붉은 에너지 속에서 점차 인간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기세에 지면이 갈라지고 살을 찢을 듯 날카로운 강풍이 불어왔다.
그 앞에서 위태롭게 몸을 지탱하면서도 산하의 얼굴엔 여전히 빈정대는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봤냐? 천용수.”
“뭐라고?”
“히든 던전인가 뭔가에서 나랑 떨거지들이 싸우던 장면 말이야. 20년 전에 우리가 게이트 안에서 발악하던 거랑 비슷하지 않았어? 네놈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그걸 보고 옛날 생각 좀 하라고 일부러 극적 연출을 좀 해봤는데?”
“닥치지 못해! 당장 네놈을 찢어 죽여 버릴 테다!”
광풍 속에서 드디어 그 미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뒤덮는 붉은 섬광이 사방을 물들이며 번쩍였다.

*******

“강산하 씨는… 자신이 시간 동결 능력자 덕분에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유라의 머릿속에서 병원에서 봤던 산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말을 들은 장인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그 새끼가 살아있어? 대체 어떻게? 20년 전 동인천 작전에 참여한 각성자는 전부 죽었다고 들었는데.”
“아니오, 말씀드렸듯 그분은 시간 동결 상태로 발견되어 지금까지 정지된 상태였습니다. 헌데 얼마 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셨죠.”
“그거 놀랍군… 시간 동결? 천용수가 강산하한테 그걸 써주고 죽었다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인원이 비웃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둘의 사이는 특히 별로였어. 천용수는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인 놈이라 맨 뒤에서 남아 있는 적의 숨통을 끊는 역할이었거든. 헌데 강산하는 맨 앞에서 뒤도 안 보고 돌격하는 타입이었지.”
“그렇습니까… 제가 대화해본 바론 그렇게 저돌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던데요.”
“아, 그놈이 말빨은 좋아, 머리도 잘 돌아가고. 다만 싸우는 방식이 뭐랄까 진짜 피에 미친놈처럼 싸워 대서 곁에 있기 싫을 정도였지. 그렇게 미쳤을 때 괜히 건들면 지랄지랄 했고. 그래서 천용수가 특히 그놈을 싫어했어. 돌격대장인 강산하에게 자격지심이 좀 있었을 거야.”
“그럼… 천용수 씨가 강산하 씨에게 시간 동결을 사용해 줬을 리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가 각성자를 배척하는 쪽이라 우리끼린 끈끈한 뭔가가 있었어. 같은 각성자고 괴물 취급당하기 일쑤니 ‘우리가 남이가~’ 이런 거 말이야.”
그 말을 하는 인원의 얼굴에서 조금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렇지만 서로 갈등이 없던 건 아니거든. 사람 일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거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천용수가 강산하를 살리고 대신 죽었다니… 영 뜬금없는 소리로 들려.”
“…….”
“생각해봐, 시간 동결로 누굴 구할 수 있었다면 다른 친한 놈에게 써줬겠지 왜 하필 사이도 별로인 강산하냐고. 말이 안 되잖아?”
“과연… 그렇게밖엔 생각이 안 드는군요.”
신유라의 목소리가 작게 가라앉았다.
“바로 그런 느낌 때문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겠죠.”

***

뒤흔들리던 땅이 잠잠해졌다.
폭풍처럼 사방을 뒤흔들던 에너지가 잦아들자 쥐죽은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산하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전신이 검은 빛깔로 물들고 한 쌍의 칠흑 같은 날개를 펼친 붉은 눈의 인간이었다.
그걸 아직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휘유~ 전혀 못 알아보겠군, 천용수.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그걸 두 번이나 거쳤으니 너 같은 쪼다도 그렇게 되는 거구나. 변신이라도 한 거냐? 킥킥.”
“닥쳐라, 유약한 인간 주제에. 오늘 네 몸통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갈기갈기 찢길 줄 알아라.”
천용수의 목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위협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산하는 그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놀고 있네. 맨날 용기가 없어 저 뒤에서 다 죽어가는 놈들 마무리만 하던 놈이 어딜 감히 내 앞에서 똥폼 잡고 지랄이야?”
“다, 닥쳐라! 난 내 장기를 살렸을 뿐이다. 혹시라도 적이 다시 살아나 뒤통수 맞을 일이 없게 하려고 언제나 후방에 서서…….”
“뭔 개소리야. 게이트의 괴물 놈들 제대로 마무리 안 했다가 통수 맞고 뒈지던 건 초창기에 잠깐 있던 일이잖아. 나를 시작으로 놈들의 살점 하나까지 전부 도륙 내는 게 철칙이 됐는데 네놈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었어? 킬킬킬.”
“거, 거짓을 날조하지 마라! 나는…….”
“야, 너 솔직히 말해봐.”
산하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너 사실 무서워서 매번 뒤로 숨었던 거지? 내가 그거 모를 줄 알았냐?”
“이 빌어먹을 자식! 네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인 건지 파악도 못하겠느냐!”
- 콰앙!
천용수라고 불리던 검은 악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포스런 검은 폭염과 함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기에 휘말린 산하의 몸은 맥없이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크크, 어떠냐? 내가 ‘인간이었던’ 시절엔 생각도 못한 능력이지?”
“…….”
팔 하나가 공중에서 떨어졌다.
폭발의 충격으로 산하의 오른팔이 찢겨 버린 것이다.
그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설마 벌써 죽으려는 건 아니겠지, 미친개 강산하? 20년 전 게이트 안에서 보였던 그 끈질긴 저력은 다 어디로 갔나?”
“걱정… 말라고… 아직 난… 팔팔… 하니까…….”
입은 어떻게 움직이는 모양이었지만 그의 몰골은 실로 처참했다.
천용수가 낄낄대며 비웃어댔다.
“진짜 웃기는 놈이야. 그 꼴이 되고서도 허세는 남아있다니. 헌데 넌 좀 변했구나. 옛날의 너도 몇 번 그런 꼴이 되었었지만 그땐 입 한 번 뻥끗하지 않았지. ‘그녀’가 없었다면 넌 벌써 옛날에 죽었을 거다.”
“…….”
“20년이나 지나니 그 더러운 성격도 바뀐 건가? 좋아… 그럼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기 전에 뭐 하나 물어보도록 하지.”
천용수라는 이름이었던 악마가 산하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20년 전 그때… 네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했던 거냐.”
핏자국과 함께 산하의 입가에 냉소가 서렸다.

***

“잘 가시우, 아가씨. 봉투는 고맙게 잘 쓸게. 더 궁금한 것 있으면 한 봉투 더 들고 와주면 돼, 히히히.”
“그럴 일이 있으면 진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신유라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때 뒤에서 장인원이 묘한 소리를 했다.
“그런데 말이야. 강산하가 시간 동결 상태로 20년이나 있었다고?”
“네… 동인천 작전이 끝난 후 시간 동결 상태로 발견되셨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쭉 그대로였지요.”
“거 참 희한하네. 천용수, 그 애송이의 시간 동결 능력은 잘 해봐야 1분 미만일 텐데.”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것이 궁금했습니다만… 혹시 그런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 뭔가에 대해 아시는 게 있을까요?”
“흠… 1분도 안 되던 능력의 지속시간을 20년으로 늘린 다라?”
인원은 한참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글쎄, 그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린데?”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특수 능력의 지속시간은 각성자 본인의 힘에 비례하거든. 만약 용수 녀석이 한 십만 배 정도 더 강해진 다음 그 힘을 다시 회복도 못하게 모조리 다 써버리면 20년? 그게 혹시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강해지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하하하.”
“십만 배… 라고 하셨습니까.”
“응, 아마 대충 십만 배.”
인원은 껄껄 웃음만 지었다.
“인간이 그렇게 갑자기 강해질 수 있을 리 없지 않겠어?”

***

“그때 내게 무슨 짓을 했지, 강산하?”
천용수라는 이름이었던 괴물이 괴성을 질렀다.
“20년 전… 난 분명 최강의 힘을 손에 넣었었다. 나는… ‘그분’의 선택받은 자 중에서 가장 강력해질 수 있었다고! 헌데 지금은 고작 이 망할 던전의 중간 보스에 지나지 않아. ‘다른 놈들’ 관 달리 난 영영 이곳에 갇혀 그저 각성자들을 성장시키는 발판으로 쓰이고 있을 뿐이라고! 대체 네놈은!”
그의 손이 산하의 머리를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20년 전 그때…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했던 거냐! 대답해라, 강산하!”
“알고… 싶으냐?”
잘려버린 팔에서 이미 엄청난 피를 흘렸고 다른 곳의 상처도 생명에 위협을 줄 만큼 치명상이었다.
산하는 용수의 검은 에너지에 타버려 걸레짝이 된 얼굴로 부스스하게 웃었다.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알고 싶어?”
“죽기 직전까지 끔찍한 고통을 받기 싫다면 당장 말해라.”
“아아… 지금 알려주지. 바로… 이거다!”
시체처럼 흐려졌던 산하의 눈빛 속에서 돌연 광기가 불타올랐다.
그 순간 산하의 머리를 붙잡고 있던 천용수의 몸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20년 전 동인천 작전의 현장에서 산하의 숨통을 끊으려 다가갔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끔찍한 감각이었다.
“무, 뭣을?! 네놈! 대체 이게 무슨 능력-”
“기다리고 있었다, 천용수! 네놈의 손이 내 몸에 와 닿을 이때를 말이다! 머저리 같은 놈… 20년 전에도 똑같이 당하더니 넌 정말 학습능력이 없는 놈이구나, 이 겁쟁이야!”
“크아… 아아악!… 지금 네놈 뭘!… 뭘 하고 있는 거냐, 네놈! 크아아아악!”
천용수의 몸이 점점 색깔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검은색이 회색이 되고 회색이 흰색이 된다.
그와 반대로 강산하의 얼굴엔 점점 핏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잘린 팔은…
“뭐냐?! 도대체 뭐냐, 네놈은!… 대체 네놈은 뭐냔 말이다! 뭐냔 말이다아!”
“쫑알쫑알 시끄러워. 악마도, 인간도 못된 반푼이 쓰레기가.”
잘려나갔던 그의 ‘오른손’이 멀쩡하게 다시 자라나 마른 나무토막처럼 변해버린 천용수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동시에 용수의 몸이 푸석한 과자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 알았다! 너는… 네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 아닌…….”
“그만 나불거려라, 비상식량. 얌전히 내 먹이나 돼버려!”
“흐… 아아아아악… 악… 아… 아아아아~!”
손에 잡혀있던 천용수라는 이름의 괴물이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지자 강산하는 말끔해진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려 꺾었다.
그 얼굴은 마치 한숨 깊게 자고 일어난 사람 같이 시원한 표정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목숨을 건 도박은 항상 짜릿한 법이지. 좋아… 우선 이렇게 한 마리째다.”

***

“어? 형님 오셨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어요?”
“조금 처리할 일이 있었어.”
“으응?”
세이프 존으로 돌아오는 산하를 길영이 조금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형님, 혹시 지금 기분이 좋으세요? 묘하게 기운차 보이시네요.”
“기분 탓이겠지.”
“에이~ 혹시 우리 몰래 뭐 돈 될 거 건지신 건 아니에요? 아유~ 그러지 말고 같이 나눠 먹어요.”
“그런 거 없다니까, 짜샤.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그래.”
“옛날 생각이요?”
그의 얼굴에 실로 보기 드물게 만족스런 웃음이 걸렸다.
“응, 방금 옛 친구 얼굴을 잠깐 보고 온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