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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배신자(1)



청색 리자드맨의 몸은 그 광채마저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변해버렸다.
그걸 끌어안고 있던 길영은 그 몸의 엄청난 강도를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혀, 형님!”
“거기서 비켜!”
그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산하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길영은 지나를 낚아채며 몸을 굴렸다.
그리고 산하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대검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로켓 분사가 마치 불타는 화염검처럼 검날을 붉게 물들였다.
“넌 아주 멍청한 선택을 했다, 괴물 도마뱀.”
“키이익?”
“내 능력은 가까워질수록 더 강력해지거든!”
도약과 공중제비 그리고 폭발적으로 늘어난 무시무시한 검의 무게와 낙하 에너지.
그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은색으로 빛나는 괴물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산하의 손에서 뻗어 나온 촉수가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망령의 손처럼 또렷하게 눈에 보였다.
“뒈져라, 파충류! 난 V를 별로 안 좋아했다!”
“키갸아아아악!”
강산하의 대검이 내리쳐진 순간 놈의 은빛 몸체는 이미 흐물흐물 녹아있었다.
그리고 그 필살의 일격 앞에 녀석의 머리통은 단번에 땅속까지 꺼져버리고 말았다.
- 우그작!
이번에도 들려온 소리는 깔끔하지 못했다.
검인지 쇠뭉치 인지 모를 대검의 일격 앞에 청색 리자드맨의 몸은 푸르죽죽한 피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끄, 끝난 건가?”
길영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와 미희가 불안한 시선으로 괴물이 있던 곳을 바라봤을 때 그곳에선 또 한 번의 도끼질이 시작되어 있었다.
- 콰직! 콰직! 콰직!
산하는 녀석의 살점 하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괴물의 잔해에 미친 사람처럼 칼질을 해댔고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야 한숨을 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끝났다. 우리가 이겼어.”
“오… 오오~”
길영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우와! 이겼다, 이겼어! B랭크 헌터도 못이긴 놈을 우리가 이겼다고! 이야호!”
그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진 지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고 바닥에 엎드린 미희는 안도의 울음을 터트렸다.
청색 리자드맨의 죽음과 동시에 보스 방 가운데에 히든 던전에 들어올 때 봤던 빛나는 공간의 균열이 생겨났다.
드디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돼, 됐다. 형님 빨리 여기서 나가요. 앗차차! 그전에 챙길 건 다 챙겨야지.”
최길영은 이젠 고인이 된 이신우가 열심히 모아뒀던 리자드맨의 비늘과 함께 그의 장비품도 주워들었다.
“엇? 형님. 그 기분 나쁜 보스 녀석이 뭔가 떨어뜨린 모양인데요?”
“그것도 일단 네가 가져가. 어떻게 할진 나중에 결정하자고.”
“옙.”
산하는 길영이 아직 걸치고 있던 구룡의 호신 의류를 벗겨 들더니 미희에게 다가가 건넸다.
“자, 이거 입고 당신도 빨리 저 녀석 따라 여기서 나가.”
“악!”
그제야 정신이 든 그녀는 자기가 속옷만 걸치고 있단 걸 깨닫고 비명과 함께 옷을 낚아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걸 아는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허나 산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꼴에 염치는 있군.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으니 안심해.”
“……?”
“네가 준 구룡제 호신 의류, 그것 때문에 길영이 녀석이 멀쩡했던 거야. 덕분에 놈을 물리칠 기회를 잡았던 거고. 그러니 너도 대충 도움 됐다 치자고.”
“…….”
미희가 멍한 표정으로 산하를 바라보았다.
“왜? 한마디 들을 거라 생각했나 본데 어차피 우린 살아남았고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 에너지 낭비하는 거, 난 안 좋아해.”
그녀가 옷을 입게 등을 돌리고 선 산하가 조롱조로 궁시렁 거렸다.
“이신우가 한 말을 들어보면 요즘 헌터 새끼들은 배가 불러서 그런지 머리가 돈 것 같아. 싸울 병사에게 흠이 있으면 훈련시켜서 고칠 생각을 해야지 왜 병신처럼 눈대중으로 대충 골라내고 지랄인지 모르겠어.”
“…강산하 씨라고 했죠?”
옷을 다 입은 미희는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 모습엔 처음에 보였던 오만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나중에… 다시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글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혹시 돈으로 날 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정작 필요할 때 내 손에 없던 게 돈이라 그놈을 평생 믿지 않기로 했거든.”
“…….”
미희와 지나가 빛나는 균열 속으로 들어가자 길영이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우와~ 빨리 가서 이것들 얼마인지 알아보고 싶어요.”
“나가면 세이프 존인지 뭔지에서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라. 바보처럼 무작정 돌아갔다가 바로 응급차에 실려 나가지 말고.”
“헤헤, 알겠어요. 형님도 얼른 나오세요. 우리 지금 대박 하나 제대로 터트린 거라구요.”
길영의 깔깔대는 얼굴이 균열 속으로 사라지자 이제 보스 방 안엔 강산하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직 독기를 품은 그의 시선이 주변을 날카롭게 훑었다.
“흠, 그냥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경계를 풀지 않고 사방을 노려보던 산하가 천천히 균열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괴이한 광경을 보며 그는 차갑게 냉소를 흘렸다.
“제기랄, 그러면 그렇지.”

***

허름하고 낡은 원룸 앞에 어떤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초인종을 누른 그녀는 곧 그게 작동하지 않는단 걸 깨닫고 살짝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안에 계십니까?”
“…누구쇼?”
“각성자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추레한 얼굴의 늙은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던 여자는 남자에게 정중히 명함을 건넸다.
“장인원 씨 되시죠? 전 한국 각성자 협회, 대외 지원 4팀 부장 신유라라고 합니다.”
“흥…….”
각성자 협회라는 말에 장인원이란 남자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바쁘신 각성자 협회 분께서 이런 곳에 어쩐 일로 오셨을까? 나 같은 1세대 각성자 따위, 영영 묻어둘 줄 알았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뭐, 들어오슈.”
방은 비좁았고 눅눅한 데다 담배 냄새가 찌들어있었다.
바닥엔 술병 몇 개가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젊은 처자를 지저분한 곳에 들여서 미안하구만. 헌데 어쩌겠어? 난 수중에 가진 게 하나도 없거든. 일은 열심히 했었는데 말이야, 킬킬킬.”
“…알고 있습니다.”
신유라는 먼저 살짝 고개부터 숙였다.
“너무 늦게 찾아온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송은 무슨, 동인천 작전 뒤로 한동안 게이트가 안생기니 냅다 잘렸을 뿐인데 뭐. 부상 때문에 동인천 작전에 없었다고 퇴직금 한 푼 없이 쫓아낸 건 덤이고 말이야.”
“…….”
“캬~ 그 뒤가 또 웃긴단 말이지. 그렇게 쫓겨나고 몇 년 지나니 갑자기 사방에서 각성자가 물밀 듯 생겨나네? 우리 1세대보다 훨씬 강한 능력을 가지고 말이야. 덕분에 E랭크에서 몇 년을 빌빌대다 결국 은퇴해 버렸어. 시펄, 누가 같이 던전에 가줘야 돈을 벌지, 퉷!”
방바닥에 장인원의 가래침이 떨어졌다.
“저희 협회의 배려가 매우 부족했던 건 알고 있습니다.”
“아유~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협회에서 20년 넘게 코빼기 한번 안 비춘 것 가지고. 앞으로 20년 더 관심 끊어도 돼. 아! 그전에 내가 먼저 죽지 않을까? 킬킬킬.”
“이건 비공식입니다만.”
유라가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바닥으로 밀었다.
“약소합니다. 우선 받아주시길.”
“…….”
꿀꺽,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장인원의 태도가 눈에 띄게 싹싹해졌다.
“그, 혹시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 믹스 커피밖엔 없지만서도…….”
“괜찮습니다. 전 ‘비공식’적으로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 찾아뵈었으니 부담 갖지 마세요.”
“오, 그래요? 질문 좋지 비공식도 좋고. 어서 물어보시구랴.”
열정적으로 봉투를 여는 인원에게 유라가 입을 열었다.
“강산하라는 사람을 아시는지요?”
“강산하? 강… 산하?”
“장인원 씨와 같은 1세대 각성자였다고 들었습니다.”
“아! 강산하! 이제 기억나네! 미친개 강산하 말이지?”
그가 뒤통수를 치며 껄껄 웃었다.
“미친… 개?”
“그래 미친개. 그 자식, 우리 1세대 중에서도 좀 실력이 모자란 놈이라 기억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능력’이 모자랐지.”
“능력이라시면?”
“스탯 말이야. 그땐 그런 측정 수치는 없었지만 대충 하는 거 보면 알 수 있잖아. 강산하 걔는 다른 육체파 각성자에 비해 능력이 좀 딸리는 편이었어. 상대를 조금 약하게 만드는 것 외엔 별다른 특수 능력도 없었고 말이야.”
“헌데 미친개라는 별명은 어째서?”
“아~ 그게…….”
인원은 좀 껄끄러운 표정으로 자기 턱을 매만졌다.
“그 자식 싸우는 건 뭐랄까, 좀 섬찟한 데가 있었어. 지 몸뚱이만큼 커다란 대검을 들고 다녔는데 그걸로 몬스터들 곤죽 내는 걸로 유명했지.”
“…….”
“한번 게이트에 들어가면 언제나 초죽음 돼서 나오는 놈이기도 했지. 능력도 부족한 게 몸은 또 안 사리면서 그런 무식한 무기까지 마구 휘두르니 부상이 없어도 게이트를 나올 때면 숨 꼴딱거리는 반시체가 되곤 했다니까.”
“그렇군요. 그럼 인간관계는 어땠습니까?”
“그놈 성질 진짜 더러웠지. 왜 하필 별명이 미친개겠어. 싸우는 모습도 미쳤는데 성질도 지랄 같았거든.”
인원은 유라가 앞에 있음에도 실내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대충 조사했으면 알 건데. 우리 1세대 각성자들은 이래저래 찬밥 신세에 매 작전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 우리끼린 잘 뭉치는 경향이 있었어. 헌데 그놈은 좀 겉돌았지. 아마 그 자식이랑 친한 놈은 단 한 놈도 없었을 거야.”
“그게… 정말입니까?”
“걔한테 좀 안 좋은 소문도 많았거든. 그놈이랑 같이 작전 나가면 묘하게 사망자가 자주 나온다던가? 사실 나도 같은 팀 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컨디션이 이상하게 안 좋더라고. 재수 옴 붙었다 생각하곤 다신 근처에도 안 갔지.”
“그러면 혹시 시간 동결 능력자와 어떤 사이였는지 아시는지요.”
“시간 동결?”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장인원이 손바닥을 탁 쳤다.
“아, 천용수! 맞아, 걔가 아주 잠깐 시간을 동결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응? 걔랑 강산하랑 사이가 어땠냐고?”
그는 별 말 같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했잖아. 강산하 좋아하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고. 특히 그 둘은 사이가 영~ 별로라 서로 투명인간 취급하며 다녔다니깐.”
신유라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강산하가 빛나는 균열을 통과하자 나타난 곳은 던전이라 부르던 그곳이 아니었다.
거기는 20년 전 목숨을 걸고 싸워댔던 바로 그곳, 일명 게이트.
누군가는 이곳을 이렇게 불렀다.
‘지옥’이라고.
검붉은 광채, 인간에게 뒤틀린 악의를 내뿜는 땅과 하늘 그리고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왔다.
그곳에 산하가 발을 디딘 순간 그의 앞에서 어떤 강력한 에너지가 휘몰아치며 점점 형체를 이루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산하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여어, 오랜만이다. 20년 만에 다시 보내. 안 그러냐, 천용수?”
“왜!!!”
아직 형체가 제대로 자리 잡히지 못한 중에서도 그 휘몰아치는 에너지 속에서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우리들을 배신했나, 강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