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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한걸음 더 내딛으면(2)

던전 2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묘하게 ‘인간’스러웠다.
손잡이까지 있는 그 돌계단은 축축하고 곰팡이투성이였지만, 계단 입구부터 마지막까지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발을 헛디딜 일도 없었다.
산하가 이것을 만든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길영이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그거 아세요, 형님? 우리가 쓰는 아이 모니터는 개인적으로 개조가 가능하대요. 상급 헌터들은 협회의 기본 시스템에 더해서 여러 가지 추가 기능을 붙여두는데 열기나 유독물질, 투사체 같은 걸 미리 감지해서 회피 경고를 해준대요. 물론 돈은 많이 깨지지만.”
“거 꽤나 편리하겠군. 20년 전에도 그런 게 있었으면 지금쯤 살아있을 녀석들도 많았겠다.”
“그, 그때는 어땠는데요?”
“게이트 출입 순간부터 죽느냐 사느냐지. 게이트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뭐가 날아와서 머리를 날려버린 놈도 있었어.”
멍하니 입을 벌린 길영 앞에서 산하가 혀를 찼다.
“그 사건 뒤론 게이트 진입 시 다들 포복 자세를 취했어. 십여 명이 바닥으로 줄줄이 기어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꼭 사람 지네 같더군.”
“아하하… 하, 하여간 그런 실리적인 부분 말고도 다른 재미있는 기능도 많이 있어요. 노래를 듣는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아… 야구 동영상도 본다니까요, 킥킥킥.”
“프로야구는 아직도 인기가 많나 보구나. 여기서도 볼 정도면.”
멍청하게 산하를 쳐다보던 길영이 자기 이마를 탁 치곤 그의 귀에 속닥속닥, ‘야구 동영상’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산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걸 자기 눈으로만 볼 수 있다고? 맙소사, 20년간 얼어있던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남자만의 대화를 진행 중인 두 사람과 달리 지나는 아까부터 계속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 그녀가 신우에게 말을 걸었다.
“이신우 헌터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죠?”
그가 살짝 표정을 바꾸며 지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와 같이 교육받던 다른 사람들이요. 그들은 공용 전이석을 사용할 거라고 하셨죠? 우리는 이신우 헌터님 개인소유 전이석으로 여길 왔지만 그 사람들이 오는 곳도 결국 이 던전 아니겠어요? 왜 그들이 보이지 않는지 궁금한데요.”
“흠, 윤지나 씨는 센스가 좋군. 좋은 지적이야. 헌터에게 꼭 필요한 감각, 타인을 경계할 줄 아는 것 말이지. 한심한 누구와는 달리.”
신우는 길영과 시시덕대는 산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말대로 그들도 던전으로 오지. 하지만 던전을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해선 곤란해. 설명은 물론 못하고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도 없지만 전이석을 통해 들어온 던전은 각 사람마다 다 다른 곳인 모양이야. 뭐랄까, 던전이 스스로를 복제해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하나씩 분배해 준달까?”
“그렇다면 던전에서 다른 파티나… 어쩌면 위험한 의도를 지닌 다른 각성자를 만날 일은 없다는 건가요?”
“이 던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군. 당신은 꽤 소질이 있어.”
신우의 팔이 지나의 어깨에 거침없이 턱 걸쳐졌다.
“나중에 필요하다면 연락하게. 내가 직접 지도해 주지. 물론 일대일로.”
“…….”
신우의 손끝이 지나의 어깨를 쓰다듬고 그녀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던 순간, 백미희가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싶네요, 이신우 씨. 뒷소문으론 헌터들 사이에선 위험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들었어요. 한번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겠어요?”
“네? 아, 네. 아가씨.”
지나의 가슴께를 보며 슬쩍 입맛을 다신 신우가 말을 이어갔다.
“아까 얘기로 돌아가면, 각 파티별로 다른 던전이 나타나는 건 10층까지 만이야. 그 뒤론 간간히 다른 각성자와 마주치게 되지. 헌터들이 가장 많은 30~40층에선 하도 자주 만나서 그냥 친구 먹는 경우도 있을 정도야.”
“그건 상대가 우호적일 경우에 한해서겠죠?”
“역시 아가씨도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던전 안에선 헌터들끼리의 경쟁이 치열하죠. 말 그대로 굴러다니는 돈은 먼저 잡는 쪽이 임자니까요.”
신우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은근히 경쟁도 있고 소위 강도 같은 놈들도 있습니다. 입구에서 매복하다가 습격한 뒤 전리품을 강탈하죠. 물론 목숨은 보장 못합니다.”
“…….”
“사람이 많이 몰리는 층에선 금방 소문이 나니까 그럴 일이 적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야 상황이 다르죠.”
“결국 자기 몸과 재산은 알아서 지켜야 한다는 거네요.”
“역시 아가씨. 한눈에 꿰뚫어 보셨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독보적 실력을 가진 개인이 있다 해도 반드시 파티를 맺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보단 둘이 뒤통수 맞을 확률은 낮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헌터들의 생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어요.”
그런 이야기들도 잠시 마침내 일행은 2층의 시작지점, 세이프 존에 도착했다.
아직도 세이프 존의 밝은 빛이 사방에서 빛나건만 던전 2층은 확실히 보이는 것부터 뭔가 분위기가 다른 듯했다.
“여기가 던전 2층의 시작 부분이다. 진지하게 말하겠는데 헌터 중 첫 사상자가 발생했던 계층이 바로 여기야. 1층의 몬스터들은 살인은 하지 않아. 묘하게도 상대가 기절하면 그냥 돌아가 버린단 말이지. 그러나 이곳의 몬스터는 인간의 살을 씹어 삼킬 줄 아는 위험한 것들이다. 몬스터의 식탁에 오르고 싶지 않다면 항상 주의하도록.”
괴물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말에 지나와 길영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물론, 그래 봐야 던전 2층이기에 나오는 몬스터는 별로 강하지 않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수준의 이야기지.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들, 그리고 백미희 아가씨도 몬스터에게 손끝 하나 대지 마셔야 합니다. 놈들의 상대는 오로지 제가 합니다. 특히 너! 1세대 노땅 쓰레기, 네놈도다!”
“좋을 대로 해. 어디 입만큼 실력도 따라오나 지켜봐 주지.”
“이걸 보고 지리지나 마라. 퇴물 각성자 놈아!”
신우가 두 개의 뭉툭한 손잡이를 꺼내 기합을 지르자 거기서 파란빛 칼날이 솟아올랐다.
그걸 본 길영이 놀란 눈으로 소리 질렀다.
“우와, 마나 블레이드! 형님, 이신우 헌터님은 마법이랑 검을 같이 쓰시나 봐요.”
“마나? 마법이라고?”
산하가 인상을 찡그리자 신우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건 본적도 없겠지? 원시인 같은 녀석. 이 마나 블레이드는 마력을 고(高)절삭력의 검날로 변환시키는 최첨단 병기다. 나같이 근접 전투형이면서 마법도 사용 가능한 선택받은 엘리트만이 사용하는 최강의-”
“자기 입으로 최강이라고 말하는 거 좀 부끄럽지 않냐? 그리고 그런 말 하는 놈 중, 실속 있는 녀석을 본 기억이 없다만.”
“다, 닥쳐! 이제부터 보여 주마. 입 닥치고 따라왓!”
이신우가 앞장선 가운데 2층 세이프 존을 빠져나오자마자 늌크 세 마리가 나타나 달려들었다.
과연 2층은 다르다는 듯 녀석들의 눈엔 전에 없던 살기가 돌고 있었으나 마나 블레이드가 허공을 가르자 모두 두 토막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훗! 봤느냐? 이게 바로 랭크 B 헌터의 수준…….”
“뭐 어쩌라고, 그게 니 일인데. 빨리 길이나 뚫어. 이제 그만 집에 가서 자고 싶단 말이야.”
“…비, 빌어먹을 자식!”
입을 열 때마다 낭패를 본 신우는 그저 이빨만 뿌득뿌득 갈았고 그런 산하를 백미희는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일단 생김새는 괜찮아. 흔들림 없어 뵈는 분위기도 좋고. 진짜 실력은 좀 더 두고 보면 될 테지.’
그녀가 살짝 입술을 핥았다.
‘20년 전 동인천 사건이라… 한번 알아보도록 할까?’

***

- 스사삭, 스사삭
“이, 이게 무슨 소리예요?”
지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미희의 얼굴도 보기 드물게 하얘져 있었다.
일행이 2층 던전 중반부에 들어섰을 때 들려오던 소리였다.
“쯧… 귀찮은 것이 나왔군.”
혀를 찬 신우가 살짝 짓궂은 표정으로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윤지나 씨 그리고 백미희 아가씨. 좀 운이 없으시군요. 하필이면 여성 헌터 최악의 적수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그가 마치 배우 소개하듯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인사하시죠. 던전 대표 벌레형 몬스터. 시체 바퀴입니다.”
“히아아아악!”
나타난 것은 스케이트보드만 한 크기의 거대한 바퀴벌레였다.
놈의 커다란 촉각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비벼지자 두 여자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끼아아아악!”
“원래 바퀴도 시체를 먹지만 이 녀석들은 스스로 알아서 시체를 ‘만든’ 다음 맛나게 먹어치우죠. 자 어떻게 해드릴까요, 백미희 아가씨.”
“빠, 빨리 없애 버려!”
“하하, 알겠습니다.”
- 서걱~
“꾸엑~”
마나 블레이드가 꽂힌 시체 바퀴는 크기만큼이나 우렁차게 돼지 멱따는 소릴 내며 죽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들을 오히려 더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하하~ 소리가 웃기죠? 지가 무슨 동물인 줄 아는지 항상 저런 소릴 낸다니까요.”
“으으…”
저만치 뒤로 물러난 여자들을 보며 신우는 재밌다는 듯 빙글빙글 웃어댔다.
“사실대로 말하면 지금이 바로 헌터가 멘탈 체크를 당하는 시점입니다. 윤지나 씨, 당신 계속 그렇게 발발 떨고만 있을 거면 일찌감치 관두는 게 좋아. 아무리 각성자가 됐어도 몬스터가 징그러워 손도 못 대고 얼어있으면 민간인과 다를 바 없지.”
신우는 슬쩍 한 발짝 뒤로 빠져 있던 길영도 히죽거리며 쳐다보았다.
“헌터로서 한몫 벌고 싶으면 어서 빨리 익숙해지라고. 아니면 지금 곱게 때려 치던가. 기초 교육받은 각성자 중에 바로 이런 이유로 관두는 녀석들이 절반은 된단 말이지. 멘탈 관리도 안 되는 녀석들이 어딜 감히 헌터를 넘봐? 쯧쯧쯧…….”
킥킥대며 일행을 지켜보던 신우였지만, 곧 싫은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강산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칭 B랭크라는 놈이 고작해야 초보들 놀려먹기나 하고 있다니… 그렇게 시간 낭비하면서도 마냥 히죽거리냐, 멍청아?”
“뭐라고?”
“적과 싸울 병사가 필요하면 공포를 이기도록 훈련을 시켜. 한 발짝 뒤로 빠져서 방실방실 쳐 웃지만 말고.”
그는 혐오스럽단 표정으로 바닥에 찍 침을 뱉었다.
“아니면 각성자가 썩어나니 될 만한 놈들만 써먹겠다… 뭐 그런 심보인 건가?”
“그, 그래! 미래가 없는 놈들은 일찌감치 탈락시키는 게 인류를 지키는 각성자들의 효율적 지원을 위해 꼭 필요한…….”
“각성자의 능력이 나중에 어떻게 발전할 줄 알고 니들 멋대로 가지치기해? 너 정원사야?”
싸늘한 일갈에 신우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지 못했다.
“과거, 각성자 현상의 발생 조건과 그 능력의 정체는 한마디로 오리무중이었어. 지금이라고 달라진 건 없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니들 입맛대로 병력을 줄여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멍청이 같은 것들.”
“그, 그건… 그러니까…….”
“지금의 인류는 게이트 안 괴물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했나? 놈들의 정체는? 기원은? 그래서 결국 뭘 원하는 건지 밝혀내고 그런 짓이나 하고 있냐고.”
멍청하게 입만 벌린 신우를 바라보며 산하는 경멸의 냉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골 빈 머저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