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한걸음 더 내딛으면(1)

“디버퍼(De-buffer)…….”
신우가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아군 또는 자신을 강하게 하는 버퍼(buffer)와 달리 디버퍼는 상대를 약하게 하는 능력자를 말한다.
그러나 그 가치는…….
“특이한 능력이긴 한데, 운이 없군. 디버퍼의 미래는 뻔해. 던전 심층엔 마법 스킬에 저항력이 강한 몬스터들로 우글거린다. 왜 상급 마법 유저들이 한방 공격력 위주로 능력을 키우는지 알면 네놈 미래가 암울하단 걸 알 수 있을 거다.”
“흥.”
신우가 악담을 퍼부어도 산하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는 신우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저 길영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 빨리 처리해. 저 애송이가 말한 내 암울한 미래를 좀 더 앞당겨 보자고.”
“네, 형님! 맡겨주세요.”
“얌마, 맡겨주세요는 아니지.”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던 늌크들이었지만, 지금은 야근 6일째에 접어든 대한민국 직장인 마냥 눈 밑에 다크서클까지 끼어 있었다.
길게 끌 것도 없이 녀석들은 길영과 지나의 삼단봉 세례 앞에 곱게 무너져 버렸다.
“와! 형님 진짜 짱이에요. 그런 편리한 능력을 갖추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앙~ 기모띵.”
“…….”
그 말을 들은 산하가 갑자기 길영의 어깨를 꽉 끌어안더니 작게 속삭였다.
“기모찌라니… 네 건 일제구나? 그래 남자는 위로는 반일, 아래론 친일인 법이지. 나중에 나한테도 꼭 빌려다오.”
“네?”
멍청한 얼굴로 반문하던 길영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산하를 뒤로 밀쳤다.
“형님, 조심하세요!”
“욱!”
그들이 있던 곳으로 커다란 몽둥이가 내리 찍혔다.
“그—뉴—욱크!”
“오~ 이런, 한 마리가 더 있었군. 저놈이 바로 던전 1층의 우두머리인 대장 늌크다.”
신우가 빙글빙글 웃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아까 본 세 마리 늌크보다 더 우람한 근육을 가진 커다란 늌크였다.
그 손에 방금 바닥을 내리찍은 묵직한 곤봉이 들려있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파티 플레이를 벌여볼 때가 왔군. 저놈은 너희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야 잡을 수 있을 거야. 부상을 입어도 세이프 존에 들어가면 대충 회복되니 걱정 말고 공격해. 정말 위험해지면 내가 나서주지.”
“그, 그래요. 지나 씨, 형님! 우리 모두 동시에 달려들-”
“저리 비켜!”
갑자기 길영의 말을 잘라버린 강산하가 홀로 대장 늌크 앞에 나아갔다.
보기 드물게도 그는 뿌득뿌득 이를 갈고 있었다.
“20년 만에 흥미 돋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방사능 헐크처럼 생긴 게 그걸 방해해? 넌 이제 죽었어, 이 괴물딱지야.”
별로 공감이 안 가는 이유로 열 받은 산하 앞에서 대장 늌크가 괴성을 질렀다.
“그—뉴—욱크!”
“시끄럽다!”
산하가 오른손을 내밀자 그 손에 검붉은 기운이 맺히더니 반투명한 촉수들로 변해 대장 늌크에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에 붙잡힌 녀석의 얼굴이 역시나 크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뉴, 그, 뉴웈… 크…….”
- 쿠당탕!
바로 그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뭔가 바닥에 떨어졌다.
산하가 여기까지 끌고 왔던 검고 기다란 케이스.
그것이 바닥에 나뒹굴자 나타난 것은 코끼리 잡을 때나 쓸법한 거대한 양손 검이었다.
날은 뭉툭한데 검붉은 녹까지 슬은, 검인지 쇠빳다인지 모를 그것을 보고 길영이 비명을 질렀다.
“히이이익! 형님, 그게 대체 뭐에요?”
“대화 수단이라고 했잖아.”
“그, 그걸로 무슨 놈의 대화를 해욧!”
“뭐긴 뭐야! 육체의 대화지!”
“그— 뉴우크!”
힘이 빠졌어도 녀석은 우두머리급.
손에 든 흉악한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산하 또한 일명 ‘대화 수단’이라는 그것을 질질 끌며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이 녀석이 네 초록색 머리통을 따버리고 싶댄다. 20년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어서 몸이 근질거린대!”
“그—늌크!”
- 까앙!
수직으로 내려친 곤봉을 산하의 대검이 막아냈다.
엄밀히 말해 막은 게 아니라 대검을 등딱지처럼 써서 놈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낸 것이다.
강하게 내리누르는 힘에 산하의 무릎이 꺾여 반쯤 주저앉았다.
“그으—늌크!”
대장 늌크가 허리춤으로 내려온 산하의 머리통으로 곤봉을 휘갈겼다.
그러나 그때 난데없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걸 노렸다, 임마!”
산하와 함께 그 거대한 검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제대로 들지도 못해 질질 끌고 있던 검이 어떻게 공중에 떠올랐을까?
답은 검날 뒤에 붙어있는 점화 장치, 소위 로켓 분사기였다.
사람 몸통만 한 그 무식한 대검이 달로 날아가는 우주선처럼 솟아올라 산하와 함께 공중제비를 돌았다.
“나이스 투 미츄다, 새끼야!”
로켓 추진으로 인한 도약, 공중제비의 원심력, 빌딩 기둥도 썰어버릴 무식한 크기의 양손 검에서 나오는 무게와 낙하 에너지.
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대장 늌크의 정수리를 노리고 내리쳐졌다.
“쿠와아아악!”
녀석의 비명이 들린 그 순간…
- 와그작!
날로 베는 게 아니라 몽둥이로 짜부러뜨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대장 늌크의 몸통은 방망이로 내려친 찰떡처럼 머리부터 납작하게 찌그러져 버렸다.
허나 산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인사를 했는데 왜 대답이 없냐? 이제 넌 아임 파인 땡큐 해야지.”
이미 조용해진 녀석의 잔해에 대고 산하는 마치 정육점 고기 다지듯 계속해서 검을 내리찍었다.
“내가!”
- 콰직!
“지금!”
- 콰직!
“인사를!”
- 콰직!
“하고 있잖냐!”
- 콰직!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대답을 해,이 예의범절 없는 새끼야.”
“우우웁!”
지나가 입을 막고 자리에 엎드렸고 미희와 심지어 이신우까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명 나는 칼질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고 박살 난 늌크 덩어리와 함께 산하의 몸이 연두색 체액으로 흠뻑 물들어서야 광란의 칼질은 간신히 멈추었다.
“간만에 대화 즐거웠다. 다음엔 함부로 내 말 끊지 마라, 찰떡아이스.”
“…….”
잠시 후 그 불쌍한 늌크의 잔해는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고 바닥엔 녀석의 이빨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길영아, 이거 내가 가져간다?”
“네… 네, 그, 그러세요, 형님. 다 가져가세요…….”
항상 생글생글인 길영조차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산하는 자기 몸에 묻었던 늌크의 피와 살 조각조차 안개로 변해 사라지자 싱겁다는 듯 혀를 찼다.
“이건 뭐 알아서 청결유지까지 해주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지금 각성자들의 싸움이란 이렇게 매번 뒷맛 깔끔하단 말이야? 진짜 편하게들 살고 있군.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네놈이 더 어이가 없다, 1세대.”
신우가 경멸하는 표정으로 말머리를 끊고 들어왔다.
“왜 네가 그런 무식한 무기를 들고 다니는지 알겠군. 네놈, 디버퍼의 재능만 있고 스스로 강해지는 건 이미 포기한 거지? 그러니 그런 무식한 도구를 써야 실력 차이를 메꿀 수 있는 거야. 내 말이 틀려?”
“무슨 헛소리냐, 멍청하게. 20년 전 내가 싸우던 것들은 오물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어도 갈기갈기 찢어놔야 하는 놈들이었어. 안 그랬다간 도로 살아나서 우리 뒤통수를 쪼개준다고. 조각 하나 안 남게 조져버려야 했으니 이런 무식한 무기를 써야만 했단 말이다, 애송이 녀석아.”
“크윽…….”
“죽었다고 알아서 사라져주는 이런 편리한 놈들과 소꿉장난하는 너희랑 같은 취급하지 마라.”
“허, 헛소리 집어치워. 스탯도 허접한 1세대 쓰레기 각성자 주제에.”
아까부터 뭔 말을 해도 계속 밀리던 신우는 결국 꽥 소리를 지르며 백미희를 향해 돌아섰다.
“자, 아가씨. 이걸로 던전 1층을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여기까지가 준비된 실기 테스트의 전부이니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짜요? 하지만 난 아직 돈 되는 물건을 본 적이 없는데요?”
“네? 그게 무슨 소리신지…….”
당황한 신우에게 미희가 여전히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신우 씨 같은 B랭크 헌터를 일부러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생각해요? 난 현역 헌터가 실제로 어떻게 싸우는지, 또 돈 되는 물건은 어떻게 수집하는지 그 현장을 제대로 보고 싶어요. 실속 있는 비즈니스 길드 창설을 위해선 현장 경험이 필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그렇지만 이제 헌터 라이센스도 나올 테니 아가씨께서 직접 경험해보시면 됩니다만.”
“당연히 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바닥부터 올라갈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요. 초보 헌터들과 파티를 맺거나 다른 일반 길드에 들 생각도 없어요. 그러니 지금 여기서 B랭크 헌터의 현장 작업 모습을 보여주세요.”
“하, 하지만… 그런 정보는 조금만 찾아보셔도 얼마든지 알 수 있으실 텐데.”
“난 직접 보고 느끼는 걸 선호하는 타입이라서 말이에요.”
“…….”
이신우가 망설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B랭크인 자신에게 이런 저층 던전쯤 혼자서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풋내 풀풀 나는 초보들을 털끝 하나 안 다치게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제기랄, 오냐 오냐 떠받들어 줬더니 던전 무서운 줄 모르는군. 던전 2층에선 사상자도 발생한 적이 있단 말이다, 너희 같은 쌩초보 세 명을 지키면서 여길 클리어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겁대가리 없는 년.’
헌터 라이센스도 안 나온 이 신입 중 누군가 크게 부상 입거나 혹여 사망이라도 한다면… 그건 모두 통솔자인 자신의 책임이 된다.
특히 백미희. 저 여자가 그 대상이 되기라도 하는 날엔 자신은 구룡 그룹이라는 거대한 적을 만들고 말겠지.
여유로운 미희의 얼굴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신우는 결국 이를 꽉 악물었다.
“그럼 좋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2층부턴 사상자도 나왔을 만큼 그 위험도가 증가합니다. 그러니 모든 몬스터의 처리는 저 혼자 하겠습니다. 1층 수준이라 생각하고 멋대로 적에 맞서거나 단독 행동을 해선 안 됩니다.”
“좋아요.”
“그리고 이건, 제가 정식으로 여기 인원들과 파티를 맺고 던전 공략에 나선 거라 생각하십쇼. 즉 파티 리더인 제 말이 항상 우선입니다. 따라주시겠습니까, 아가씨?”
“…알겠어요, 그게 헌터들의 규칙이라면.”
“이건 당신들도 마찬가지야. 다들 내 말에 동의하나?”
“우, 우리도 간다고요? 어째서요?”
“바보 같은 질문이군, 윤지나 씨. 던전에 들어올 때 우린 한 파티로서 이곳에 온 거야. 세이프 존에서 귀환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파티 전원이 모여 있지 않으면 귀환 불가 판정이 뜬다고. 설마 2층 공략 끝내고 당신 데리러 다시 여기로 오란 소린가? 보모 노릇은 이쪽에서 사양하고 싶은데.”
지나가 싫은 표정을 지었으나 길영은 그저 싱글벙글 이었다.
“와~ 그러면 2층에서 돈 될 게 생기면 다 같이 나누는 거죠?”
“뭐, 뭐라고?”
“정식 던전 공략이라면서요. 그러면 룰에 따라 팀원 모두 공평하게 보수를 나눠야죠.”
“제기랄, 그런 건 잘도 알고 있었군. 아, 알겠어… 그렇게 해주지.”
“그럼 전 당연히 갈게요~”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산하와 지나 옆에서 길영은 계속 바람을 넣었다.
“아유~ 형님, 윤지나 씨. B랭크 헌터가 동행하는데 위험할 게 뭐가 있어요. 게다가 온 김에 수입 생기면 좋잖아요. 결국 우리도 나중엔 던전 2층에 발을 들어놔야 하는데 미리 견학해보면 좋지 않아요?”
“…알겠어요, 저도 각성자 테스트 비용이랑 기초 훈련비용 모두 내느라 지출이 많았으니 조금이라도 수익이 생기면 만회할 수 있겠네요.”
이제 길영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산하를 향했다.
그는 그저 한숨만 폭 쉬었다.
“하여간 네 녀석은 못 말리겠군. 너 좋을 대로 해라.”
“야호!~”
합의가 된 걸 알리러 달려가는 길영의 뒤에서 산하는 조용히 미간을 찡그렸다.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면 지금도 나쁘지 않지. 이곳에 숨어있는 20년 전의 망령에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