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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던전 기초 교육?(2)

전이석에 손을 내민 이신우가 정신을 집중했다.
밝은 빛이 빛나는 순간. 일행은 자신들이 정체 모를 이상한 곳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석조 구조물로 이루어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미궁.
바로 여기가 던전, 즉 헌터라 불리는 각성자들이 목숨을 걸고 돈 될 것을 찾아 헤매는 바로 그 장소였다.
“생각보다 어둡네요, 그리고 습해. 좋지 않은 냄새도 나는 것 같아요.”
“그럴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역시 여성분껜 이런 게 필요하겠죠.”
“탈취용 향수군요, 준비성이 좋네요. 돌아가면 당신에 대해 아버지께 잘 말해주죠.”
“감사합니다.”
여기엔 여성이 한 명 더 있지만 신우의 눈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역겨운 수작에 산하는 애초에 눈길도 주지 않았고 지나도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와중에 길영인 무슨 인간 두더지처럼 땅을 마구 파헤치고 있었다.
“이히힉! 여길 파면 혹시 보물이 나오지 않을까?”
“최길영 씨! 후우… 헌터는 광부가 아니야. 던전 땅을 파본다고 돈 될 게 튀어나오진 않는다고.”
“네? 그럼 어떻게 돈을 버나요?”
“노 페인, 노 게인”
신우는 멋 부리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고생한 만큼 대가가 오는 법. 던전의 보물이란 몬스터가 드롭 하는 희귀품이나 놈들이 지키는 특수 공간에서 채취하는 신(新) 재료들을 말하지. 보물찾기 마냥 땅이나 파서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심지어 여긴 던전 1층이다. 가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겠나?”
“그, 그렇군요. 그렇다네요, 형님.”
“…….”
“산하 형님?”
“시끄러워, 잠깐 조용히 해봐.”
던전에 들어온 산하의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굳어져 있었다.
어느새 맺힌 이마의 땀방울을 보고 신우가 빈정거렸다.
“흥, 첫 경험이라 긴장하신 모양이군. 아깐 잘난 척하더니 뭔가 그 꼴은? 가져온 식량이나 먹어보지 그래? 푸후훗.”
“에이~ 그럴 리가 있어요? 우리 산하 형님은 게이트 경험도 많으신데 이런 던전 따위야.”
“뭐?”
신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뭐라고? 각성자 라이센스도 없는 놈이 게이트 경험이 있다니 그게 말이 돼?”
“아휴, 뭘 모르시네. 산하 형님은 1세대 각성자시래요. 동인천? 뭐 그런 작전에 참가하셨다가 20년 동안 얼어계셨대요.”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동인천 작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젠 얼마 없다.
순진한 길영인 그저 산하가 얘기해 준 대로 좔좔 읊을 뿐이었고 백미희가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자 심통이 난 신우가 험악한 얼굴로 다가왔다.
“진짜요? 당신이 1세대 각성자라는 거?”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
산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신우와 미희를 흘겨보았다.
“적어도 당신들한텐 말이야.”
“뭐야?”
“저따위로 거들먹거리는 게 날뛰는 세상 만들자고 목숨을 걸었던 게 아니라서.”
“뭐라고? 이 자식이 감히 누구 앞이라고-.”
“뭐 어쩌려고? 지금 우리 인솔자는 당신이야. 우리 중 한 명이라도 해를 입으면 평판 깎이는 건 당신이라고.”
산하가 히죽 웃음 지었다.
“저 아가씨한테 꼬리 치던 것처럼 네 앞일을 생각한다면 현명하게 행동해.”
“……넌 나중에 꼭 두고 보자.”
한참 동안 이를 갈던 신우가 산하에게서 떨어지자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길영이 슬쩍 귓속말을 했다.
“제가 뭐 잘못 말했어요?”
“말은 잘못한 게 없는데 결과적으론 그렇다. 이 눈치 없는 녀석아.”
“죄송해요. 근데 형 아까 왜 그렇게 땀 흘리고 있었어요?”
“……별 것 아냐.”
길영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산하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위기 경보가 켜진 상태였다.
‘이 던전이라는 곳…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비슷해.’
꽉 움켜쥔 주먹이 시퍼레지는 것도 모른 채 산하는 경계의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20년 전… 그 게이트하고 비슷한 냄새가 난다고 지금.’

***

뿌득뿌득 이를 갈던 이신우는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고 일행이 서 있는 주변 일대를 가리켰다.
“던전엔 절대적인 규칙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안전구역, 세이프 존이지. 세이프 존은 자체적으로 빛이 내 그 영역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이 안에만 들어오면 모든 몬스터의 공격에서 100% 안전해진다. 자, 이건 정말 중요한 것이니 잘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백미희 아가씨.”
“그래요.”
신우의 말투가 존대법으로 바뀔 때마다 일행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한 문장 안에서 대상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이야기했다.
짜증이 안 날수가 없었다.
“보통 각 층의 시작 지점이 세이프 존이 되고 던전 중간에도 몇 개 더 존재하지. 이것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위치를 기억해두었다 위험할 때 이곳으로 피하면 되니까요. 심지어 세이프 존 안에 있으면 상처를 조금씩 치료해 주기도 합니다. 완치는 무리지만요.”
“부상을 입었을 때 유용하겠군요. 기억해 주겠어요.”
이번엔 그의 손가락이 일행이 서 있는 바닥을 가리켰다.
“참고로 던전은 한 층을 클리어하고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지하 구조다. 10층마다 구역을 지키는 ‘보스 몬스터’가 존재하고 놈을 물리쳐야 다음 10층을 공략할 수 있게 되지. 이건 헌터의 능력 증명이 되기도 한다.”
“우와~ 신기하네요. 그럼 던전은 몇 층까지 있어요?”
“확실치 않다만 소문에 의하면 70층 이상 내려가 본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 난 35층까지 내려가 봤지.”
“캬~ 대단하시네요.”
길영이 사심 없이 엄지를 척 들자 기분이 좋아진 신우가 씨익 웃었다.
“내 생각에 자넨 괜찮은 헌터가 될 것 같군. 나처럼 사교성이 좋아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하하.”
“그 옆의 어느 놈관 다르게 말이지.”
누굴 비꼬는지 아는 그 사람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파티 플레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로의 능력을 확인하고 포지션을 정하도록 한다. 아이 모니터를 키고 개인 정보 공개에 동의하도록.”
일행의 눈앞에 파랗게 빛나는 홀로그램 창이 펼쳐졌다.
그리고 팀 전원의 능력치가 한곳에 나타났다.

< 최길영 - 랭크 E >
힘 : 9
민첩 : 7
체력 : 16
정신 : 13
협회 추천 포지션 : 탱커

“최길영 씨는 체력과 정신 스탯이 높군. 공격에 버티는 쪽으로 특화된 능력치야. 협회 시스템의 추천대로 탱커 포지션을 맡는 게 좋겠어.”
“넵, 알겠습니다.”
“윤지나 씨는…….”

< 윤지나 - 랭크 E >
힘 : 5
민첩 : 18
체력 : 7
정신 : 15
협회 추천 포지션 : 후방 딜러

“민첩이 높지만 힘과 체력이 낮군. 전방에선 버틸 수 없어도 정신력이 보조해주니 사격 무기와 궁합이 좋을 거야. 이 경우 후방 원거리 딜러를 담당하곤 한다. 협회의 포지션 추천 시스템은 그간의 수많은 각성자 파티 플레이 표본들을 종합, 분석한 것이니 의심 없이 그대로 따르도록.”
“그렇군요. 하지만 전 원거리 무기는 지급받지 않았는데요?”
“지금은 그냥 하도록 해. 어차피 던전 1층은 위험할 것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다음은 백미희 아가씨 것을 보죠.”
“네, 지금 공유했어요.”

< 백미희 - 랭크 D >
힘 : 18
민첩 : 22
체력 : 14
정신 : 11
협회 추천 포지션 : 전방 딜러

최길영이 입을 벌리고 말했다.
“우와, D랭크야… 게다가 나랑 능력치 총합이 10 이상 차이 나네.”
“자, 다들 잘 봐둬라. 평범한 각성자는 보통 E랭크에서 시작하게 되지만, 백미희 아가씨 같은 엘리트 각성자는 그 출발선부터 다르다. 잘 기억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도록.”
“제 힘이 9인데 18이면… 미희 씨가 제 두 배만큼 힘이 세다는 소린가요?”
“능력 수치는 각성자의 전투효율을 기준으로 측정되지. 예를 들어 ‘힘’ 스탯이라면 근력만 말하는 게 아니라 긴박한 전투 중 얼마나 강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종합 분석치야.”
“호오~”
“백미희 아가씨가 전투에 임하면 최길영 씨 당신의 두 배 이상 효율로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이지. 설마 남자인 당신보다 근육량이 두 배 겠나? 그럼 여자 헐크가 됐겠지.”
“그, 그렇군요.”
“어쨌거나 협회의 데이터는 신뢰하는 것이 옳다. 참고로 나도 처음 각성자가 되었을 때 D랭크로 시작했지.”
“우와~ 대단하세요, 짝짝짝.”
콧대가 이마까지 솟아오른 둘과 얼굴을 구기고 있는 둘. 그 가운데서 분위기 파악 못하고 박수나 치고 있는 한 명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보며 신우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럼 이제 그 잘난 1세대 각성자님의 스탯을 보기로 할까?”
“…….”

< 강산하 - 랭크 E >
힘 : 10
민첩 : 10
체력 : 10
정신 : 10
협회 추천 포지션 : 특정 불능

“푸하핫! 뭐냐 이건. 전 스탯이 10이라니 멍청하기 짝이 없군. 아무런 특징이 없어서 협회 시스템도 네게 어울리는 포지션을 찾질 못 하잖냐.”
이신우가 잇몸을 드러내고 킬킬거렸다.
“1세대 각성자들의 능력은 지금에 비하면 쓰레기 같다더니 진짜로군. 이건 E랭크 중에서도 최저 스탯일 거다, 킥킥킥.”
“아, 난 별로 내 자신이 강해질 필요가 없어서 말이야.”
“뭐라고?”
산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세이프 존을 넘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끝났으면 이제 슬슬 가지? 언제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을 건가? 너무 심심하잖아, 잘나신 B랭크 헌터나리.”
“저, 저놈을 내 그냥…….”
뿌득, 이를 간 신우였으나 그 뒤를 길영과 지나, 심지어 미희까지 따라 나가자 황급히 맨 앞에 앞장섰다.
그리고 던전에 대한 정보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던전의 미로는 항상 변한다. 이곳은 1층이니 초등생도 출구를 찾을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만, 저 아래 심층(深層) 던전에선 길을 헤매다 굶어 죽는 헌터도 있었을 정도지.”
신우는 손에 든 라이트의 강도를 더 강하게 높였다.
“지금은 1층이니 상관없지만 이렇게 강한 빛을 계속 사용하는 건 주의해야 한다. 그 층의 몬스터들이 빛에 민감할 경우 놈들 모두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야.”
“그, 그러면 지금은 왜 그렇게 빛을 세게 켜세요?”
“슬슬 당신들도 전투 실습을 해봐야 하지 않겠나?”
“헉!”
빛에 이끌린 모양인지 길영의 앞에 녹색의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끽끽대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늌-크!”
“뭐, 뭐야 저게!”
“저게 바로 던전의 터줏대감 중 하나인 늌크다. 던전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괴물 종족이지.”
“이, 이제 어떻게 해요!”
“당황하지 마. 여긴 던전 1층이다. 너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어, 공격해.”
“네, 넵.”
길영은 삼단봉을 꽉 틀어쥐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늌크는 조금 긴 귀의 지저분하게 생긴 녹색 인간형 괴물이었다.
녀석은 길영을 보며 괴성을 질렀다.
“늌—크!”
“이거나 먹어랏!”
삼단봉이 머리통을 후려치자 ‘꾸엑’하는 실로 졸개스러운 비명과 함께 놈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몸뚱이는 회색 안개로 변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이긴 건가? 어, 저기 뭔가 있어요!”
“늌크의 이빨이군. 자네 것이니 가지게.”
“오오! 드디어 돈 되는 게 나왔다! 이건 얼마나 해요? 뭐에 쓰는 거죠?”
“그냥 기념품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돈도 안 되지.”
“에이…….”
길영의 실망을 뒤로하고 일행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늌크가 점점 수를 늘리며 나타났지만 길영의 맷집과 이제 본격적으로 가세한 지나의 활약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두 사람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에도 미희와 산하는 손 하나 꿈쩍 안 하고 그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리 잘나신 1세대 각성자께선 참전하실 생각이 없나? 혹시 겁이 나는 건가?”
“귀찮아서 그런다.”
신우의 빈정거림에 산하는 그저 등 뒤의 가방만 ‘퉁’ 쳤다.
“별것도 아닌데 이걸 꺼내야 되잖아. 난 번거로운 건 질색이라고.”
“사실은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게이트 경험은 한 번이라도 있으신가, B랭크 헌터 나리? 그거하고 오면 그다음에 얘기하지.”
“이익, 이 망할 자식아!”
신우의 얼굴이 시뻘게진 순간 비명과 함께 길영이 나가떨어졌다.
“으악! 아이구!”
“길영 씨!”
바닥에 널브러진 길영과 지나 앞에 세 개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놈들이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 질렀다.
“그—늌크!”
“흠… 어느새 1층의 마지막에 왔군. 이것들은 매 층의 통로를 막고 있는 엘리트 몬스터다. 일반 몬스터보다 훨씬 세니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그—늌크!”
과연 놈들은 기존 허약한 늌크와 달리 보디빌더 같은 울끈불끈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이구, 이놈들 꽤 세요.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이래도 안 나가실 텐가? 다리가 떨려 못 나가는 건 아니고? 킥킥.”
“쳇.”
혀를 찬 산하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그리고 세 마리의 우람한 뉴크들을 향해 오른손을 펼쳤다.
“???”
“길영아 그리고 지나 씨. 다시 상대해 봐요. 아까보다 훨씬 상대하기 쉬울 테니.”
“예에?”
“아, 시끄럽고 빨리 달려들어. 내가 보장한다. 이번엔 다를 거다.”
“네, 넵!”
길영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달려들던 순간, 그는 늌크들의 모습이 뭔가 이상해졌단 걸 눈치챘다.
“그, 그뉴… 윽크…….”
“에엥?”
놈들의 우람한 몸매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글쪼글하게 변해 있었다.
그중 한 놈을 골라 삼단봉으로 후려치자 허무하게도 곧바로 소멸해 버리는 것이었다.
“우와!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 이놈…….”
그제야 신우는 산하가 내민 오른손을 제대로 노려보았다.
그 손끝에서 불길한 색의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네놈, 설마… 디버퍼(De-buff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