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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던전 기초 교육?(1)

지루한 얼굴의 사람들 사이에서 산하가 뿌드득 이를 갈았다.
거지같은 연설이 벌써 두 시간 넘게 이어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각성자 여러분께선 부디 스스로의 힘을 남용, 낭비하지 마시고 오로지 국가와 인류의 안전을 위해 신중하고 합법적으로 사용하시기를 당부…….”
“아유~ 이렇게 지루한 거 진짜 실화냐. 고딩 때 교장 선생님보다 더 길게 하고 있네. 안 그래요 형님?”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던 최길영이 옆에서 깐죽거렸다.
지금 막 지루했던 각성자 기초 교육 과정이 끝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형님은 폰 한번 안 보고 잘도 참으시네요. 이거 듣는 거 재미있어요?”
“20년 전엔 저런 인간들 많았다. 뭐 같긴 한데… 이젠 내성이 생겨서 말이야.”
“히히, 형님 얘기 듣고 있으면 진짜 신기하다니까.”
이 녀석은 기초 교육을 받던 중 ‘형님, 형님’ 하면서 자기가 먼저 다가온 붙임성 좋은 녀석이었다.
촐싹대는 게 귀찮았지만, 사심 없어 보이는 태도가 맘에 들어 내력을 조금 얘기해 줬더니 이젠 껌처럼 달라붙어 있다.
좀 방정맞은 녀석이긴 해도 무려 20년간 동결되어 있던 산하에게 길영은 꽤 괜찮은 21세기 문명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이기도 아니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여하튼 그래서 그렇기 때문인 이유로~ 모두 훈련받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저씨 연설 듣느라고 수고했지, 히히히.”
정부의 높으신 분이 단상에서 내려가자 각성자 협회 직원이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교육받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현역 각성자와 동행하여 타워, 또는 던전 중 하나에 진입해보는 실기 테스트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이 과정 이후 여러분께 정식 각성자 라이센스가 발급될 것입니다.”
“드디어……!”
교육 과정 내내 산하가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부장인가 하는 작자에게 말해놨던 ‘무기’가 올 때이기도 했다.
“지급해드린 헌터폰을 이용해 자기 조를 확인해 주십시오. 지금 바로 실기 테스트에 들어가겠습니다.”
“와! 저 형님이랑 같은 조네요. 역시 우린 통하는 게 있다니까.”
“…….”
최길영은 뚫어져라 헌터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강산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러세요, 형님? 뭐가 문제 있어요?”
“이게 왜 버튼이 없지?”
“네?”
“전화기라고 줬는데 생긴 건 삐삐 늘려놓은 것 같은 게 번호 돌리는 것도 없고 누르는 버튼도 없네. 대체 어쩌라는 거야, 이게 뭔 놈의 전화기냐?”
“아…….”
길영은 이마를 탁 쳤다.
그렇다. 이 사람은 1990년대에 살다 온 사람인 것이다.
“여기 화면에 버튼 있잖아요. 요게 터치스크린이라고 해서 스마트폰 나온 뒤로 일상화된 거예요. 거기 화면을 누르시면… 아오, 형님! 그렇게 세게 누르면 폰 깨져요.”
“뭐 누르는 감도 없고… 되게 어렵구만.”
“하하, 금방 익숙해져요. 형님은 진짜 별세계에서 오신 것 같아 신기하다니깐. 20년이나 얼어있다 깨어나시니 기분이 어때요?”
“……어떨 것 같냐? 17살 동생이 애 엄마가 되어있고, 알던 사람들도 전부 다 소식 끊겼더라.”
“도, 동년배 친구는요.”
“내 때에 각성자는 친구 같은 거 못 만들었다. 우린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형님. 하하… 저희가 확실히 좋은 세상에 살고 있네요.”
“글쎄… 과연 그럴까?”
산하의 마지막 말은 입안에서만 웅얼거렸다.
그리고 길영은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다른 조원들을 찾아냈다.
“와~ 반가워요. 우리 같은 조네요. 전 최길영입니다. E랭크 초짜고요, 헌터 지망입니다.”
“안녕하세요, 전 윤지나구요. E랭크입니다. 저도 가능하면 헌터가 되려고요.”
“강산하입니다. E랭크고 뭘 할진 아직 안정했습니다.”
“나는…….”
마지막, 검은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고급 스카프를 목 뒤로 휘날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백미희예요. 랭크는 그쪽들이랑은 좀 다르고 목표하는 것도 다르네요. 난 비즈니스 길드 설립이 목적이랍니다.”
“네? 비, 비즈니스 길드요? 일반 길드보다 더 위인?”
“그래요.”
강산하가 그게 뭐냐는 눈치를 주자 길영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원래 실적 좋은 각성자들은 길드 만들어서 힘을 합치거든요. 근데 진짜 최상위급 헌터나 가디언 정도 되면 사설 길드 따위가 아니라 기업과 합작하는 비즈니스 길드로 모이게 되요. 그런데 그건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닌데…….”
“맞아요.”
백미희는 이런 설명은 이제 지루하다는 듯 방금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에 대고 후, 숨을 불었다.
“눈썰미가 좀 있으면 내가 누군지도 알 텐데. 거기 아가씨는 혹시 모르려나?”
“그 스카프 상표는… 설마 구룡 그룹인가요?”
“반응이 늦네. 우리 회사 실물은 처음 보나 봐? 하긴 서민은 상표 라벨 볼 기회도 거의 없으니까.”
세계적인 의류 제작 기업, 구룡.
여성용 옷을 주로 취급하는 이 기업이 세계 굴지의 의류 회사가 된 것은 헌터들에게 사들인 신소재를 바탕으로 놀라운 강도의 여성 의류를 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슬로건이 바로 ‘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였다.
“이 스카프, 우리 회사 제품인데 총알 따윈 가볍게 튕겨내죠. 그리고 반대로 무기로도 쓸 수 있어요.”
그녀가 스카프를 한번 휘두르자 콘크리트 바닥에 날카로운 자국이 패였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여성들을 열광시키는 구룡의 ‘호신 의류’였다.
“우린 여성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혁신적 방법을 제공하고 있어요. 주변의 무수한 잠재적 폭력 요건들에서 여성을 지키는 게 우리 구룡의 사명이에요.”
“아, 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지 못하는 건 육체적 능력이 약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걸 보완해 진정한 남녀평등의 세상을 만드는 걸 목표로 삼고 있어요. 그리고 그 시작을 바로 제가 하고 있지요.”
“혹시 그럼 구룡 그룹 관계자신가요?”
“구룡 그룹 회장, 백은겸이 바로 제 아버지세요.”
“우오!”
길영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멋져요, 저 회장 따님 같은 거 드라마에서만 봤어요. 저랑 친구 해요.”
“후후, 말하는 게 귀여운 친구네. 지금 몇 살?”
“넵, 스물 셋입니다.”
“그래, 계속 그렇게 귀엽게 굴렴. 그러면 내 어항에 가둬놓고 키워줄 수도 있어.”
“어항요? 헤헤, 전 물고기가 아닌데.”
여전히 해맑게 웃는 녀석을 보며 산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영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분을 만나 뵌 적이 없는 건 자네가 초짜라서 그런 거야. 나정도 되면 이런 건 일상이지.”
금테 안경을 쓴 샤프한 젊은 남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딱 봐도 각성자인게 눈에 보였다.
“오늘 여러분의 실기 테스트를 리드할 헌터 이신우라고 한다. 랭크는 B클래스로 알아두도록.”
“우와~ B랭크다! 보통 C랭크가 오는 걸로 아는데, 왜 여기 오셨어요? 혹시 나 때문인가? 히히.”
“흥, 이 몸이 온 건 오늘의 특별 게스트 때문이다.”
이신우는 천진난만하게 눈을 빛내는 길영은 무시하고 백미희 앞에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백미희 아가씨.”
“잘 부탁하죠. 센스가 있으시네요. 누구부터 먼저 챙겨야 할지 바로 파악하시니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없겠어요.”
“물론입니다. 자네들은 백미희 아가씨께 감사하도록. 나 같은 B랭크 헌터의 실전 교육을 받는 건 자네들 수준에선 꿈도 못 꿀 일이니.”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에 강산하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고, 이신우는 뻔뻔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이제 실기 테스트 장소를 결정해 보도록 하지. 각성자의 능력을 효율적으로 개발해주는 타워, 각종 희귀한 보물이 숨어있는 던전. 그중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백미희 아가씨?”
“당연히 던전이죠. 우리 구룡 그룹의 관심사는 오직 그곳뿐이니까요.”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럼 던전으로 가시죠.”
“…….”
의논은 개뿔, 자기들끼리 다 정해버리는 걸 보고 강산하의 표정은 또 한 번 차갑게 굳어졌다.
지나도 어차피 던전에 갈 생각이어서 별말은 없었으나, 역시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저 눈치 없는 길영이 녀석만이 싱글벙글대며 소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야! 던전 좋죠, 던전. 가면 대체 뭘 가지고 나오려나? 히히히, 빨리 갑시다!”

***

“이것이 전이석(轉移石)입니다. 던전으로 이동시켜주는 유일한 수단이죠.”
이신우가 자기 손에 든 돌을 가리켰다.
“던전은 다른 차원에 있을 거라 추측되는 괴(怪)공간으로 그 위치와 정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이 전이석 외엔 갈 방법이 없다는 것만 알려져 있죠. 현재 다른 팀들은 협회가 제공하는 공용 전이석을 사용하러 줄을 섰겠지만, B랭크 헌터인 제겐 전용 전이석이 있으니 지금 여기서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시간 절약하는 센스. 아주 좋아요, 이신우 씨.”
“고맙습니다, 아가씨.”
‘아주 지랄들을 하네, 지랄을.’
계속 배알이 꼴리던 강산하가 썩은 표정으로 혀를 찼을 때 신우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준비는 되었나? 기본 지급품은 받았겠지?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던전 1층이다. 비록 최하급 방호 슈트지만 그런 곳의 몬스터에게 상처 입을 일 따윈 없으니 겁먹지 말도록.”
“예이~ 그런데 백미희 씨는 방호 슈트를 안 입어요?”
“이런 바보 같으니!”
갑자기 신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까 아가씨가 하신 말씀을 이해 못했나? 구룡의 호신 의류는 당신들이 걸친 거지같은 최하급 방어복관 차원이 달라. 심지어 무기로까지 활용 가능한 희대의 역작인데 그런 쓰레기 같은 방호 슈트 따위, 필요나 있겠나?”
“으엑! 죄, 죄송합니닷!”
“나 원 답답하기는. 유능한 헌터가 되고 싶다면 항상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어떤 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세밀함이 반드시 필요… 이봐 거기! 자넨 또 뭘 챙기고 있는 건가?”
신우가 산하를 거만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을 때 그는 썩은 표정으로 한마디 찍 내뱉었다.
“식량과 식수.”
“뭐? 고작 던전 1층을 가는데 왜 그딴 게 필요하지?”
“당신 바본가? 그 던전인지 뭔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그런 무슨 일이 생길 줄도 모르는 곳엘 가는데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식료품 정도야 기본 중의 기본 아니야? 소위 베테랑 헌터라면서 생존의 기본도 몰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라이센스도 없는 초짜 주제에 감히 날 가르치겠단 거냐!”
둘 사이에 험악한 기운이 흐를 때 미희가 지루한 투로 입을 열었다.
“이신우 씨. 저런 초보랑 티격태격하는 모습 보여주려고 여기 온 거예요? 우리 할 일이 있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는 이를 갈며 일단 거기서 물러났다.
그리고 모두들 전이석 앞으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으, 이 방호 슈트 좀 끼네. 지나 씬 괜찮아요?”
“저도 좀 답답해요. 가, 가슴 쪽이 좀…….”
“헐…….”
길영의 눈이 어딘가를 향해 휘룩휘룩 돌아가고 있을 때. 문득 산하가 질질 끌고 있는 커다란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형님, 그게 뭐예요?”
“내 무기.”
“예?”
길영과 지나가 지급 받은 건 짧고 뭉툭한 삼단봉 한 개였다.
현역 헌터가 동행하는 지금 그 이상의 강력한 무기는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하가 받은 건 검고 기다란 금속제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무언가’였다.
“로, 로켓포라도 가져오신 거예요?”
“그런 걸 쓰면 터질 때 나까지 말려들잖냐. 이건 말이다, 대화 수단이야.”
“대, 대화 수단이요?”
뭔 소린지 모르겠단 길영의 앞에서 산하는 히죽, 웃음 지었다.
“꺼내서 보여준 순간, 그 어떤 양아치 새끼도 젠틀맨으로 만들어주는 기막힌 대화수단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