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20년 전의 그 남자(2)
- 뚜벅뚜벅…
한 남자가 화려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각성자 협회, 한국 지부 여의도 지점.
그리고 멀리서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음흉한 시선이 있었다.
“어이, 저거 보여?”
“그래. 따끈따끈한 신입이로군.”
안쪽으로 들어오는 산하를 보며 두 남자가 키득거렸다.
신입 각성자만 골라 골탕 먹이기로 유명한 베테랑 헌터들. 그들 중 한 녀석이 건물 여기저기를 살피던 산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이~ 애송이. 여긴 처음인가 봐? 이 선배님께서 좀 도와줄까?”
“넌 몇 살인데 다짜고짜 반말이냐, 예의도 없이.”
“뭐, 뭐야?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다 대고 감히 건방지게! 너 대체 몇 살이야?”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하는 지갑에서 민증을 꺼내 눈앞에 흔들었다.
“올해로 내가 마흔여덟이 되는 모양이던데. 그쪽은 몇이신지.”
남자는 눈만 껌뻑거리며 민증과 강산하의 얼굴을 계속 번갈아 보았다.
앞에 있는 건 분명 이십 대로 보이는 젊은 얼굴.
헌데 무려 1971년생.
“아니, 이게 대체…….”
“그쪽은 몇이시냐고.”
“파… 팔십 일년생인데요.”
“나보다 열 살이나 적으시군. 안 그러니, 친구야?”
“네, 네 죄송합니… 아니, 이게 아니고!”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이, 씨발! 헌터 사이에 나이 가지고 예의 차리는 놈들이 어딨어? 어차피 더 센 놈이 장땡이라고!”
“헌터? 난 사냥꾼 같은 게 아닌데.”
“뭐, 뭐야. 그럼 너 설마 가, 가디언이냐?”
“가디언? 그건 또 뭔데?”
“야, 정신 차려!”
뒤에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헌터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 가디언일 리가 있겠냐!”
“맞네 시발! 너 오늘 뒈져봐라.”
- 쐐액!
지금 날아오는 건 그냥 주먹이 아니다.
인류를 뛰어넘은 각성자, 그중에서 헌터라 불리는 부류의 주먹.
들리는 소리는 헤비급 복서 필살의 스트레이트와 맞먹었다.
그러나-
“악! 끄아아악!”
“나이도 어린 게 성질까지 더럽네. 수틀리니 바로 주먹질이냐?”
날아온 주먹을 교묘히 낚아채 비틀자 남자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이, 이 자식이!”
꼴에 돕겠다고 달려오던 남자의 일행이 산하의 눈과 마주친 순간, 그는 자신의 몸에서 기운이 쪽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왜… 왜 이러지? 설마 저놈에게 내가 쫀 건가?’
인류의 상식을 초월한 장소에서 목숨 걸고 돈 될 것을 찾는 각성자, 소위 헌터라 불리는 부류들은 위험에 민감한 자들이다.
그리고 지금 온몸에 힘이 빠진 건 그런 위험을 헌터의 본능이 감지했기 때문 아닐까?
“안 덤빌 거냐? 그럼 그놈 데리고 여기서 꺼져. 각성자끼리 싸움에, 그것도 이대일이라면 이번엔 사정 봐주지 않는다.”
“네, 넵.”
겁먹고 물러나는 녀석에게 잡혀있던 놈을 던져 주자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아이구우! 내 팔!”
남자의 팔엔 시커먼 멍이 손바닥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그저 붙잡는 것만으로 헌터의 팔뚝을 이 꼴로 만들었다면 이놈은 분명 최상위급 각성자다.
그런 판단이 들자 두 남자는 꽁지가 빠져라 건물 밖으로 줄행랑쳤다.
“예나 지금이나 힘 좀 생겼다고 아무 데나 들이대는 바보는 꼭 있다니까.”
한바탕 소란이 있었으나 주변의 시선은 그저 무심히 사라져 버렸다.
이곳은 이능력을 얻게 된 수많은 각성자들이 구름처럼 드나드는 곳.
이따위 소소한 트러블 따윈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접수처로 간 산하는 번호표를 뽑은 사람들 사이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그냥 안내원의 창구를 똑똑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각성자 활동을 하려면 등록이 필요하다 해서 왔는데, 여기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성함은… 강산하 씨? 예약 명단에 없는 걸 보니 자가 진단으로 각성자 판정을 하셨나요? 그럼 정식 검사가 우선입니다.”
“그게 아니라, 난 원래부터 정부 공인 각성자였습니다.”
“정부 공인이라면 당연 각성자 라이센스가 있으시겠죠? 그런데 왜 등록을 다시 하려고 하시나요?”
“음… 난 그런 건 없어요. 내 때엔 등록이니 뭐니 이런 제도 자체가 아예 없었거든요.”
“내… 때 요?”
“네, 20년 전입니다.”
접수처 아가씨는 자기와 별 나이 차 안 나 보이는 산하의 얼굴을 황당하단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나이가 몇이신데?”
“올해로 마흔여덟이요.”
“휴우~ 경비! 여기 허언증 환자 또 왔어요!”
***
“그것참…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입니다…….”
자기를 지부장이라 소개한 남자가 난처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했죠. 그리고 이렇게 되었는데?”
“하하, 좀 더 자세히 설명을-”
“그걸 하고 있는데 별안간 경비를 부른 건 당신들입니다.”
“어허허허…….”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산하 앞에서 지부장이 납작 엎드렸다.
“하여간 몰라 봬서 정말 죄송합니다. 동인천 게이트 크래쉬 때 전 각성자에 대해선 들어보지도 못했었죠.”
“지금이 이상한 거지. 20년 전만 해도 각성자란 위험한 능력을 지닌 괴물이었지, 지금처럼 선망받는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인기직종 1위라면서?”
“그, 그렇지요. 최하급 헌터라 해도 워낙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짭짤하니까요.”
“그만큼 위험하다는 건 제대로 알리고 있는 겁니까?”
“……”
“그럴 줄 알았지. 정부와 협회가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하나 없군. 됐으니 나도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시죠.”
“그게…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지부장의 얼굴이 더 핼쑥해졌다.
“아주 죄송하게도… 20년 전의 자료 중 제대로 인수인계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강산하 씨의 구체적인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뭐요?”
“그… 이번에 정식으로 각성자 검사를 받으시고 협회에 재등록 및 교육과정을 이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괴물, 변종 인간 취급하며 게이트 막는 방패막이로 실컷 부려먹더니 이제 와선 전부 없던 거로 하고 초짜 취급을 하시겠다?”
“죄,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옛날 각성자 협회라는 건 제대로 된 기관이 아니라 급조된 사설 단체에 불과했던지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지. 뒷감당은 전부 우리의 피와 살로 해야 했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말로……”
- 빠드득
이가는 소리와 함께 지부장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지금 자기 앞에 앉아있는 건 C랭크 각성자인 협회 경비 네 명을 혼자서 날려 버린 괴물이다.
더 화나게 해선 목숨이 위험했다.
“그… 그 대신 좋은 점이 아주 많습니다. 정보가 등록되면 전국의, 아니 전 세계 각성자들에게 강산하 씨의 정보가 공개돼요. 그러면 사방에서 협력 의뢰가 들어올 겁니다. 활동할 기회가 훨씬 많아지는 거죠.”
“흥… 돈 만질 연결 고리를 주선해 주는 거다, 이거요?”
“그렇습니다. 사실 여기에도 비용이 따르는데 당연히! 강산하 씨는 제 재량으로 평생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
침묵의 시간, 지부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리고 산하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좋아, 대신… 동인천 작전에서 내 생명 수당이 발생했을 거라고 하던데 그걸 지금 받아가야겠어.”
“네? 그, 그런 건 제가 잘 모르-”
“당신네 직원한테 들은 사실이야!”
그의 손이 탁자를 내리쳤다.
“난 내 인생의 20년을 한순간에 날려 먹었어! 살던 집, 알던 얼굴들 전부 사라졌단 말이야. 그게 누구 때문인지 아직도 내가 내 입으로 더 떠들어야 알아먹겠나?”
“아, 아닙니다! 제… 제가 어떻게든 찾아내서 반드시, 무조건, 확실하게 받으실 수 있게 처, 처리해 놓겠습니다.”
“이제 좀 말귀가 통하는 것 같군. 지금의 협회는 20년 전과 다른 단체라 하니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더 믿어보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거, 거기에 더불어서 아이 모니터나 기초 장비품 같은 것 모두 저희 선에서 무상으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아이 모니터?”
“아, 모르셨겠군요. 각성자들의 능력을 수치로 표시해서 자기 관리 및 상호 협력에 용의하도록 돕는 증강 현실 프로그램입니다. 한쪽 눈에 렌즈로 장착해 시각에 홀로그램 UI를 표시해주죠”
“중간… 뭐? 유아이는 연예인 이름인가? 홀로그램은 몇 그램짜린데?”
“…….”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지부장은 다시 한 번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하, 하여간 저희가 다 알아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테스트기에서 나온 산하가 옷을 입으며 물었다.
“아까 듣기로 사람들이 묘한 단어를 쓰더군. 헌터? 가디언?”
“당연히 모르실 겁니다. 20년 전관 많은 게 달라졌거든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동인천 게이트 크래쉬 사건을 통해 괴물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음이 알려지자 세계는 뒤늦게 대책 마련에 고심했고, 결국 각성자의 육성만이 해법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20년 전에도 우리들이 수없이 떠들던 내용이었지.”
산하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물론 그때 정부와 협회에선 콧방귀만 뀌었었다.
“곧 세계 규모의 관리 단체가 설립되었고 그게 지금의 세계 각성자 협회, 공식 명칭 [범(汎)세계 초상능력자 협동조합 및 위기관리 위원회]입니다.”
“이름 길기도 하네. 하는 것도 없던 예전 협회는?”
“세계 각성자 협회에 흡수되면서 한국 지부가 되었습니다. 고위직 몇몇은 자문 역할로 본부에 스카웃 됐죠. 48명이나 되는 각성자를 관리했던 경험은 오직 한국밖에 없었으니까요.”
“다들 우릴 도깨비, 돌연변이로 불렸지. 외출 금지, 언론 통제 같은 걸 당하면서 말이야.”
“어흠… 그리고 곧이어 인류에게 희망이 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던전’과 ‘타워’의 등장이죠. 헌터와 가디언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자 하니 헌터도 가디언도 모두 각성자를 말하는 것 같은데.”
“네, 초상 능력자의 공식 명칭은 여전히 ‘각성자’입니다만, 던전 위주로 활동하는 자들을 헌터. 타워에서 상주하는 자들을 가디언이라 부르죠.”
“타워와 던전이라… 도대체 뭡니까, 그게?”
“터놓고 말하면 돈이냐 명예냐의 문제죠.”
지부장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동인천 사건 이후 뭔가 인간을 돕기라도 하듯 이 두 곳에 접속할 수 있게 됐습니다. 던전은 지구에 없는 신(新)소재와 기적 같은 보물이 즐비한 신의 황금 창고라 불리죠. 타워는 각성자를 단련시키는 일종의 훈련장입니다. 이 둘 덕분에 과거와 달리 각성자의 효율적인 전력 상승을 꾀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돈을 목적으로 던전에 가는 자들을 사냥꾼, 즉 헌터라 부르는 거군. 헌데 가디언은?”
“그들은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는 모토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타워는 특성상 돈 벌 기회는 적지만 각성자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상승시키니 게이트에 투입됐을 때 가장 두각을 나타내죠. 그야말로 인류 수호의 큰 축이 되는 사람들이라 경외를 담아 그렇게들 부른답니다.”
“그럼 보나 마나 헌터가 압도적으로 많겠군.”
“잘 아시는군요. 사실상 각성자 협회를 ‘헌터 협회’라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가디언들은 뛰어난 실력자만으로 이뤄진 단체라 그 수가 매우 적습니다.”
“잘 알겠어. 정말 기묘한 세상이 되었군. 20년 전엔 언제 어디서 어떤 괴물들과 싸워야 하나 공포에 떨다 자살한 녀석도 있었는데 이젠 다들 그런 각성자가 되기를 희망한다니…….”
“세상이 변한 거지요. 좋은 방향으로 말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산하에게 지부장은 이제야 간신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타워와 던전에서 나온 신기한 물건들 덕에 의학, 과학 등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혜택은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도 받고 있지요. 분명 더 좋은 세상이 된 증거가 아닐까요?”
“……그것참 잘되셨군.”
산하의 얼굴은 실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는 듯 아니면 우는 듯한 기묘한 표정.
“허, 헌데 벌써 가십니까? 아직 강산하 씨의 측정 랭크가 나오지 않았는데…….”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모른다고 변할 것도 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네요.”
“그러십니까? 그럼 말씀드린 무상 지급품은 각성자 기초 교육 때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기초 교육은 또 뭐야? 날 귀찮게 할 게 더 남아있단 겁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건 타워와 던전에 대해 사전 교육하는 유용한 시스템입니다. 강산하 씨도 이 둘에 대해 직접적으론 모르시잖습니까?”
“…그렇긴 하군. 좋습니다, 이번만 당신 말을 들어주죠. 대신 나도 조건이 하나 더 있어.”
“예?”
지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앞에서 산하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내가 20년 전에 쓰던 무기 하나가 있는데… 그걸 반드시 되찾았으면 합니다.”
***
“안녕히 가십시오!”
산하가 건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부장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부하 직원 하나가 슬쩍 운을 띄웠다.
“지부장님,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20년 전이면 1세대 각성자인데 그 시절 각성자 능력이 쓰레기란 건 공인된 사실이잖아요.”
“이 바보야,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동인천 게이트 크래쉬 사건은 우리 각성자 협회 한국 지부 최악의 오점이야. 규칙도, 지침도 없이 주먹구구로 해나가다 각성자 절반을 몰살시킨 개뻘짓이란 말이다.”
그는 여전히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만약 저 친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세간에 회자되기라도 하면 협회 안에 피바람이 불거다. 실적 안 좋은 놈부터 뎅겅뎅겅 목이 잘릴걸? 안 그래도 세계 최다 각성자 배출국 위상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말이지.”
“그, 그렇군요.”
“1세대 능력으론 보나 마나 최하급 평가나 받겠지. 어디 던전이나 타워에서 오버 떨다 훼까닥 죽어버리면 편할 텐데. 어휴~ 그냥 얼어있지 왜 다시 깨어나서 사람 간 떨리게 만든담.”
“지부장님, 강산하 씨 결과 나왔어요.”
산하의 헌터 데이터를 본 지부장은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E랭크. 시펄, 평범 그 자체구만. 그럴 줄 알았다, 빨리 어디서 뒈져나 버려라. 카아악~ 퉤!”
가래침을 올려 바닥에 퓃 내뱉은 그 순간 돌연 지부장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아니 그럼, 저놈은 어떻게 경비들을 물리친 거야? E랭크 따위가 무슨 수로 C랭크 각성자 넷을 날려버려?’
황급히 돌아본 그의 뒤에서 산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뚜벅뚜벅…
한 남자가 화려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각성자 협회, 한국 지부 여의도 지점.
그리고 멀리서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음흉한 시선이 있었다.
“어이, 저거 보여?”
“그래. 따끈따끈한 신입이로군.”
안쪽으로 들어오는 산하를 보며 두 남자가 키득거렸다.
신입 각성자만 골라 골탕 먹이기로 유명한 베테랑 헌터들. 그들 중 한 녀석이 건물 여기저기를 살피던 산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이~ 애송이. 여긴 처음인가 봐? 이 선배님께서 좀 도와줄까?”
“넌 몇 살인데 다짜고짜 반말이냐, 예의도 없이.”
“뭐, 뭐야?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다 대고 감히 건방지게! 너 대체 몇 살이야?”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하는 지갑에서 민증을 꺼내 눈앞에 흔들었다.
“올해로 내가 마흔여덟이 되는 모양이던데. 그쪽은 몇이신지.”
남자는 눈만 껌뻑거리며 민증과 강산하의 얼굴을 계속 번갈아 보았다.
앞에 있는 건 분명 이십 대로 보이는 젊은 얼굴.
헌데 무려 1971년생.
“아니, 이게 대체…….”
“그쪽은 몇이시냐고.”
“파… 팔십 일년생인데요.”
“나보다 열 살이나 적으시군. 안 그러니, 친구야?”
“네, 네 죄송합니… 아니, 이게 아니고!”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이, 씨발! 헌터 사이에 나이 가지고 예의 차리는 놈들이 어딨어? 어차피 더 센 놈이 장땡이라고!”
“헌터? 난 사냥꾼 같은 게 아닌데.”
“뭐, 뭐야. 그럼 너 설마 가, 가디언이냐?”
“가디언? 그건 또 뭔데?”
“야, 정신 차려!”
뒤에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헌터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 가디언일 리가 있겠냐!”
“맞네 시발! 너 오늘 뒈져봐라.”
- 쐐액!
지금 날아오는 건 그냥 주먹이 아니다.
인류를 뛰어넘은 각성자, 그중에서 헌터라 불리는 부류의 주먹.
들리는 소리는 헤비급 복서 필살의 스트레이트와 맞먹었다.
그러나-
“악! 끄아아악!”
“나이도 어린 게 성질까지 더럽네. 수틀리니 바로 주먹질이냐?”
날아온 주먹을 교묘히 낚아채 비틀자 남자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이, 이 자식이!”
꼴에 돕겠다고 달려오던 남자의 일행이 산하의 눈과 마주친 순간, 그는 자신의 몸에서 기운이 쪽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왜… 왜 이러지? 설마 저놈에게 내가 쫀 건가?’
인류의 상식을 초월한 장소에서 목숨 걸고 돈 될 것을 찾는 각성자, 소위 헌터라 불리는 부류들은 위험에 민감한 자들이다.
그리고 지금 온몸에 힘이 빠진 건 그런 위험을 헌터의 본능이 감지했기 때문 아닐까?
“안 덤빌 거냐? 그럼 그놈 데리고 여기서 꺼져. 각성자끼리 싸움에, 그것도 이대일이라면 이번엔 사정 봐주지 않는다.”
“네, 넵.”
겁먹고 물러나는 녀석에게 잡혀있던 놈을 던져 주자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아이구우! 내 팔!”
남자의 팔엔 시커먼 멍이 손바닥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그저 붙잡는 것만으로 헌터의 팔뚝을 이 꼴로 만들었다면 이놈은 분명 최상위급 각성자다.
그런 판단이 들자 두 남자는 꽁지가 빠져라 건물 밖으로 줄행랑쳤다.
“예나 지금이나 힘 좀 생겼다고 아무 데나 들이대는 바보는 꼭 있다니까.”
한바탕 소란이 있었으나 주변의 시선은 그저 무심히 사라져 버렸다.
이곳은 이능력을 얻게 된 수많은 각성자들이 구름처럼 드나드는 곳.
이따위 소소한 트러블 따윈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접수처로 간 산하는 번호표를 뽑은 사람들 사이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그냥 안내원의 창구를 똑똑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각성자 활동을 하려면 등록이 필요하다 해서 왔는데, 여기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성함은… 강산하 씨? 예약 명단에 없는 걸 보니 자가 진단으로 각성자 판정을 하셨나요? 그럼 정식 검사가 우선입니다.”
“그게 아니라, 난 원래부터 정부 공인 각성자였습니다.”
“정부 공인이라면 당연 각성자 라이센스가 있으시겠죠? 그런데 왜 등록을 다시 하려고 하시나요?”
“음… 난 그런 건 없어요. 내 때엔 등록이니 뭐니 이런 제도 자체가 아예 없었거든요.”
“내… 때 요?”
“네, 20년 전입니다.”
접수처 아가씨는 자기와 별 나이 차 안 나 보이는 산하의 얼굴을 황당하단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나이가 몇이신데?”
“올해로 마흔여덟이요.”
“휴우~ 경비! 여기 허언증 환자 또 왔어요!”
***
“그것참…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입니다…….”
자기를 지부장이라 소개한 남자가 난처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했죠. 그리고 이렇게 되었는데?”
“하하, 좀 더 자세히 설명을-”
“그걸 하고 있는데 별안간 경비를 부른 건 당신들입니다.”
“어허허허…….”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산하 앞에서 지부장이 납작 엎드렸다.
“하여간 몰라 봬서 정말 죄송합니다. 동인천 게이트 크래쉬 때 전 각성자에 대해선 들어보지도 못했었죠.”
“지금이 이상한 거지. 20년 전만 해도 각성자란 위험한 능력을 지닌 괴물이었지, 지금처럼 선망받는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인기직종 1위라면서?”
“그, 그렇지요. 최하급 헌터라 해도 워낙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짭짤하니까요.”
“그만큼 위험하다는 건 제대로 알리고 있는 겁니까?”
“……”
“그럴 줄 알았지. 정부와 협회가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하나 없군. 됐으니 나도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시죠.”
“그게…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지부장의 얼굴이 더 핼쑥해졌다.
“아주 죄송하게도… 20년 전의 자료 중 제대로 인수인계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강산하 씨의 구체적인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뭐요?”
“그… 이번에 정식으로 각성자 검사를 받으시고 협회에 재등록 및 교육과정을 이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괴물, 변종 인간 취급하며 게이트 막는 방패막이로 실컷 부려먹더니 이제 와선 전부 없던 거로 하고 초짜 취급을 하시겠다?”
“죄,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옛날 각성자 협회라는 건 제대로 된 기관이 아니라 급조된 사설 단체에 불과했던지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지. 뒷감당은 전부 우리의 피와 살로 해야 했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말로……”
- 빠드득
이가는 소리와 함께 지부장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지금 자기 앞에 앉아있는 건 C랭크 각성자인 협회 경비 네 명을 혼자서 날려 버린 괴물이다.
더 화나게 해선 목숨이 위험했다.
“그… 그 대신 좋은 점이 아주 많습니다. 정보가 등록되면 전국의, 아니 전 세계 각성자들에게 강산하 씨의 정보가 공개돼요. 그러면 사방에서 협력 의뢰가 들어올 겁니다. 활동할 기회가 훨씬 많아지는 거죠.”
“흥… 돈 만질 연결 고리를 주선해 주는 거다, 이거요?”
“그렇습니다. 사실 여기에도 비용이 따르는데 당연히! 강산하 씨는 제 재량으로 평생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
침묵의 시간, 지부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리고 산하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좋아, 대신… 동인천 작전에서 내 생명 수당이 발생했을 거라고 하던데 그걸 지금 받아가야겠어.”
“네? 그, 그런 건 제가 잘 모르-”
“당신네 직원한테 들은 사실이야!”
그의 손이 탁자를 내리쳤다.
“난 내 인생의 20년을 한순간에 날려 먹었어! 살던 집, 알던 얼굴들 전부 사라졌단 말이야. 그게 누구 때문인지 아직도 내가 내 입으로 더 떠들어야 알아먹겠나?”
“아, 아닙니다! 제… 제가 어떻게든 찾아내서 반드시, 무조건, 확실하게 받으실 수 있게 처, 처리해 놓겠습니다.”
“이제 좀 말귀가 통하는 것 같군. 지금의 협회는 20년 전과 다른 단체라 하니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더 믿어보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거, 거기에 더불어서 아이 모니터나 기초 장비품 같은 것 모두 저희 선에서 무상으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아이 모니터?”
“아, 모르셨겠군요. 각성자들의 능력을 수치로 표시해서 자기 관리 및 상호 협력에 용의하도록 돕는 증강 현실 프로그램입니다. 한쪽 눈에 렌즈로 장착해 시각에 홀로그램 UI를 표시해주죠”
“중간… 뭐? 유아이는 연예인 이름인가? 홀로그램은 몇 그램짜린데?”
“…….”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지부장은 다시 한 번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하, 하여간 저희가 다 알아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테스트기에서 나온 산하가 옷을 입으며 물었다.
“아까 듣기로 사람들이 묘한 단어를 쓰더군. 헌터? 가디언?”
“당연히 모르실 겁니다. 20년 전관 많은 게 달라졌거든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동인천 게이트 크래쉬 사건을 통해 괴물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음이 알려지자 세계는 뒤늦게 대책 마련에 고심했고, 결국 각성자의 육성만이 해법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20년 전에도 우리들이 수없이 떠들던 내용이었지.”
산하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물론 그때 정부와 협회에선 콧방귀만 뀌었었다.
“곧 세계 규모의 관리 단체가 설립되었고 그게 지금의 세계 각성자 협회, 공식 명칭 [범(汎)세계 초상능력자 협동조합 및 위기관리 위원회]입니다.”
“이름 길기도 하네. 하는 것도 없던 예전 협회는?”
“세계 각성자 협회에 흡수되면서 한국 지부가 되었습니다. 고위직 몇몇은 자문 역할로 본부에 스카웃 됐죠. 48명이나 되는 각성자를 관리했던 경험은 오직 한국밖에 없었으니까요.”
“다들 우릴 도깨비, 돌연변이로 불렸지. 외출 금지, 언론 통제 같은 걸 당하면서 말이야.”
“어흠… 그리고 곧이어 인류에게 희망이 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던전’과 ‘타워’의 등장이죠. 헌터와 가디언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자 하니 헌터도 가디언도 모두 각성자를 말하는 것 같은데.”
“네, 초상 능력자의 공식 명칭은 여전히 ‘각성자’입니다만, 던전 위주로 활동하는 자들을 헌터. 타워에서 상주하는 자들을 가디언이라 부르죠.”
“타워와 던전이라… 도대체 뭡니까, 그게?”
“터놓고 말하면 돈이냐 명예냐의 문제죠.”
지부장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동인천 사건 이후 뭔가 인간을 돕기라도 하듯 이 두 곳에 접속할 수 있게 됐습니다. 던전은 지구에 없는 신(新)소재와 기적 같은 보물이 즐비한 신의 황금 창고라 불리죠. 타워는 각성자를 단련시키는 일종의 훈련장입니다. 이 둘 덕분에 과거와 달리 각성자의 효율적인 전력 상승을 꾀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돈을 목적으로 던전에 가는 자들을 사냥꾼, 즉 헌터라 부르는 거군. 헌데 가디언은?”
“그들은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는 모토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타워는 특성상 돈 벌 기회는 적지만 각성자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상승시키니 게이트에 투입됐을 때 가장 두각을 나타내죠. 그야말로 인류 수호의 큰 축이 되는 사람들이라 경외를 담아 그렇게들 부른답니다.”
“그럼 보나 마나 헌터가 압도적으로 많겠군.”
“잘 아시는군요. 사실상 각성자 협회를 ‘헌터 협회’라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가디언들은 뛰어난 실력자만으로 이뤄진 단체라 그 수가 매우 적습니다.”
“잘 알겠어. 정말 기묘한 세상이 되었군. 20년 전엔 언제 어디서 어떤 괴물들과 싸워야 하나 공포에 떨다 자살한 녀석도 있었는데 이젠 다들 그런 각성자가 되기를 희망한다니…….”
“세상이 변한 거지요. 좋은 방향으로 말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산하에게 지부장은 이제야 간신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타워와 던전에서 나온 신기한 물건들 덕에 의학, 과학 등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혜택은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도 받고 있지요. 분명 더 좋은 세상이 된 증거가 아닐까요?”
“……그것참 잘되셨군.”
산하의 얼굴은 실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는 듯 아니면 우는 듯한 기묘한 표정.
“허, 헌데 벌써 가십니까? 아직 강산하 씨의 측정 랭크가 나오지 않았는데…….”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모른다고 변할 것도 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네요.”
“그러십니까? 그럼 말씀드린 무상 지급품은 각성자 기초 교육 때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기초 교육은 또 뭐야? 날 귀찮게 할 게 더 남아있단 겁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건 타워와 던전에 대해 사전 교육하는 유용한 시스템입니다. 강산하 씨도 이 둘에 대해 직접적으론 모르시잖습니까?”
“…그렇긴 하군. 좋습니다, 이번만 당신 말을 들어주죠. 대신 나도 조건이 하나 더 있어.”
“예?”
지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앞에서 산하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내가 20년 전에 쓰던 무기 하나가 있는데… 그걸 반드시 되찾았으면 합니다.”
***
“안녕히 가십시오!”
산하가 건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부장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부하 직원 하나가 슬쩍 운을 띄웠다.
“지부장님,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20년 전이면 1세대 각성자인데 그 시절 각성자 능력이 쓰레기란 건 공인된 사실이잖아요.”
“이 바보야,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동인천 게이트 크래쉬 사건은 우리 각성자 협회 한국 지부 최악의 오점이야. 규칙도, 지침도 없이 주먹구구로 해나가다 각성자 절반을 몰살시킨 개뻘짓이란 말이다.”
그는 여전히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만약 저 친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세간에 회자되기라도 하면 협회 안에 피바람이 불거다. 실적 안 좋은 놈부터 뎅겅뎅겅 목이 잘릴걸? 안 그래도 세계 최다 각성자 배출국 위상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말이지.”
“그, 그렇군요.”
“1세대 능력으론 보나 마나 최하급 평가나 받겠지. 어디 던전이나 타워에서 오버 떨다 훼까닥 죽어버리면 편할 텐데. 어휴~ 그냥 얼어있지 왜 다시 깨어나서 사람 간 떨리게 만든담.”
“지부장님, 강산하 씨 결과 나왔어요.”
산하의 헌터 데이터를 본 지부장은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E랭크. 시펄, 평범 그 자체구만. 그럴 줄 알았다, 빨리 어디서 뒈져나 버려라. 카아악~ 퉤!”
가래침을 올려 바닥에 퓃 내뱉은 그 순간 돌연 지부장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아니 그럼, 저놈은 어떻게 경비들을 물리친 거야? E랭크 따위가 무슨 수로 C랭크 각성자 넷을 날려버려?’
황급히 돌아본 그의 뒤에서 산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