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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새로운 질서 (2)



다음날.
안영식 전 부총리가 성현을 찾아와 전날 권유했던 바를 흔쾌히 승낙했다.
이에 성현은 군정 아래 새로운 내정 위원회를 발족하고, 그에게 의장으로써 내정에 관한 권한을 위임했다.
이로써 성현은 의장대행이라는 명함을 떼어냈다.
대피소 전체의 포괄적 권한과 군사 관련 모든 지휘권을 가진 사령관으로 공식 직함을 옮겼다.
사령관 아래 군사위원회와 내정 위원회를 두고, 최종 결정권자는 성현임을 공표했다.
안영식 의장에게 내정에 관한 인수인계를 끝낸 성현은 각 본부의 부장들을 호출해 의장과 대면하게 했다.
이후부터는 새로운 의장체제 하에서 내정을 진행할 수 있도록 전했고, 성현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휘본부를 나섰다.
“다음 보실 곳은 집하장 B지역입니다.”
성현의 일행과 최동원 중령은 시설관리부 관계자 1명을 대동해 대피소 전반에 걸쳐 둘러보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장소이고 지켜야 할 곳이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번은 직접 확인하고, 알아두어야 했다.
거주 구역은 성현이 특별히 둘러볼 만한 곳이 없었고, 지나치듯 설명만 들었다.
그러던 중 해미는 성현과 살고 있는 관사에 할 일이 있다 해서 내려주었고, 두식과 용칠만이 성현을 보좌하며 따라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집하장 공동에 연결된 B 터널로 진입해 있었다.
터널은 직선으로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구역은 비교적 넓은 공간을 확보해 개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저기, 저 사람들은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성현은 사람들이 차량에 붙어 작업 중인 걸 보고, 시설관리 담당자에게 물었다.
“아-, 이 구역은 고속도로에 방치된 폐 차제를 가지고 와 주요 부속들을 해체해 구분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휘발유나 경유는 고속도로 정비팀에서 일괄 추출해서 따로 저장하고 있습니다.”
성현은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있는 자원이 고갈되면 얻을 길이 막연할 터였다.
원유 수입은 될 턱이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 연료를 얻을 방법이 없으니, 미리 재고를 확보해 두어야 했다.
성현은 세삼 모든 게 부족한 세상이 되었음을 한 번 더 느꼈다.
“이 부품들은 재활용이 안 됩니까?”
작업현장에 가까이 다가간 성현은 큰 철제 박스에 별도의 구분 없이 무작위로 담겨있는 물건을 손에 들고 의아한 듯 물었다.
“네, 어차피 외부에 있던 차량에서 쓸 수 있는 전자부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두 폐기 처분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로 구분 없이 전자기기들만 모두 모아 외부로 다시 방출됩니다.”
“전자부품들을 왜 못써?”
시설관리부 소속 담당자의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은 성현이, 최 중령을 바라보고 보충 설명을 해보라는 눈짓을 했다.
“대령님, 사태 당시 지하 일정 깊이 이상 있지 않았던 모든 전자기기는 사용이 불가합니다. 혹시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래?”
성현은 당연히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차도가 꽉 막혀있던 탓에 차량을 이용할 생각도 못했고, 이후 대피소의 군용 차량들이 사용되고 있어 별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흐음, 어쩌면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희도 사태 이후 지상 정찰 활동을 개시하면서 알게 된 내용입니다. 지상과 가까운 곳에 있던 전자기기들은 모두 정상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극초신성 폭발의 여파가 어떤 문제를 일으킨 듯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지만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성현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GPS가 정상적으로 안 잡히는 이유가 있었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 폰의 GPS가 안 잡히는 이유와 모든 통신이 두절된 원인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마 인공위성들도 모두 작동 불능 상태일 것이고, 통신연결을 하던 중계기도 모두 같은 지경일 것이다.
“지하 30m 깊이에 있던 것들은 영향이 크지 않았든지 영향이 없었나 보네?”
“네, 맞습니다. 저희도 얼추 30m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터널 입구의 문도 처음에는 수동 개폐해서 수리했었고, 내부기기도 얕은 깊이에 있던 장비들만이 고장이 났습니다.”
성현이 극초신성 사태때 머물던 지하철 역의 깊이가 30~50m 사이임을 짐작해 한말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 폰이나 군용장비 중에서도 전자 부품이 내장된 것들이 정상작동이 되는 점을 들어 추측했고, 최 중령이 성현의 말에 동의하며, 덧붙였다.
“이만하면 대피소는 모두 돌아본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하자. 동원아, 내일부터는 전투 부대원들하고 같이 전투훈련을 겸한 외각 정찰할 테니 준비해라.”
“네, 알겠습니다.”
5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피소 구석구석을 돌아본 성현은 일행들과 내일을 기약하고 관사로 돌아왔다.
“녀석, 그새 병원에 간 모양이네.”
현관 입구에 해미가 써놓은 쪽지가 붙어있었다.
[아저씨. 저 할아버지한테 좀 다녀와요. 저녁 전엔 돌아올게요.]
해미는 병원의 환자들을 스킬로 치료해주면 안 되냐고 성현의 허락을 구했었다.
이미 때를 놓쳐 죽은 이가 있는걸 알고 있는 성현은 해미가 원하면 그리해도 된다고 말했고, 오늘 병원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저녁 준비를 해볼까.”
성현은 기특한 일을 스스로 찾아 하는 해미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I-5 대피소에 성현 일행이 도착한 지 6일째.
그사이 이렇다 할 일은 없었고, 이전보다 상황이 호전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생존자라······.”
새로운 생존자들이 임시 대피소를 찾아왔다.
마침 성현은 직속 전투대대 5개 중대 60명 모두와 훈련과 위력 정찰을 겸해 나와 있던 상황이었다.
대원들의 훈련을 가장한 인근 지역에 있는 좀비 사냥을 하던 중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성현이 청계산 대피소에 오고나서 이미 수차례 생존자들을 추가로 받았고, 모두가 특별한 경우였지만, 그 이상의 특수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래서 이들을 직접 보러 왔다.
생존자들은 운이 좋았는지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다.
젊은 남자 세 명.
이들은 성남시에 위치한 국가기록원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생존자가 눈물까지 흘리며 사정을 이야기한다.
“아직 그곳에 사람들과 아이들이 있습니다. 구해주십시오.”
성현은 즉시 상급 지휘관들을 호출했다.
“우선 직선거리로는 4㎞가 조금 넘습니다. 최적의 이동 루트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해서 고신 터널에서 산을 넘어야 합니다.”
“현재 도로정비 상태는?”
“지금 있는 이곳 임시 대피소에서 1.4㎞까지 도로 정비가 완료되어 차량 이동이 가능합니다. 이후는 도보로 이동해서 가야 합니다.”
시간이 문제였다. 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이고 오후 3시가 넘었다.
“오늘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일단 그게 문제가 아니야.”
성현은 고민했다.
우선 이들이 말한 내용이 전부 사실 인가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국가기록원에 있던 이들이 사태 발생 당시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 수상했다.
“생존자 중 한 명을 데려와.”
성현의 지시가 떨어지고 곧 생존자 한 명을 데려왔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거짓을 말한다면 당신들이 말한 생존자 구출은 고사하고, 당신들도 대피소에 들어갈 수 없다.”
순간이지만 생존자의 눈동자가 불안에 떨리는 것을 성현은 놓치지 않았다.
“당신, 국가기록원에서 온 게 맞나? 내가 알기론 그곳엔 실험실이나 기타 연구시설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 여기 책임자를 불러주시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걸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여기 최고 책임자가 나다, 다시 묻지. 참고로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야. 국가기록원에서 온 게 맞나?”
성현의 차가운 시선에 남자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고 주춤댔다.
“그,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비밀을 엄수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습니다. 제 이름은 조진석이고, 공학박사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장이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연결해 주십시오.”
성현이 고개를 모로 꼰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당신, 아직 상황파악 안 되지? 세상이 이 꼴인데 청와대? 국방··· 뭐? 지금 사실대로 다 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 말해.”
단호한 성현의 말에 자칭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원 씨는 안절부절못한다.
성현은 시선을 낮추고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봤다.
“십 초 주겠다.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마, 말하겠습니다. 그 숫자 좀!”
성현은 의자에서 일으키던 몸을 다시 앉혔다.
“모두 털어놔. 괜한 소설 쓰다 잔칫상 받을 수 있는데 제사상 받지 말고.”
“사, 사실 저와 동료들은 프로젝트 제타와 오메가 두 가지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입니다. 대통령 직속 연구소이고······.”
이들은 비밀 연구소의 연구원들이었다. 성현은 국내에도 주변국이나 동맹국인 미국의 눈을 피해 여러 연구를 진행 중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국가기록원 지하 심처에 그러한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부는 저희 연구가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고, 연구소가 일반 대피소보다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연구소에 대피해있었습니다.”
정부는 사태 발생 전에 연구원들의 직계비속까지는 연구소 내에 대피를 허용했고, 연구원들은 가족을 데려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 연구소의 깊이는 무려 지하 300m. 정부는 건설된 대피소보다 안전함을 강조해 이들은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태가 안정되면 최우선으로 구조와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사태가 터지고 외부와 모든 통신이 단절되었습니다. 일주일이 넘은 오늘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구소는 별도의 발전설비가 있었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모두 멈췄습니다.”
지하에 모든 전기 시설물들이 가동을 멈추고 공기정화시설까지 정지했다. 최소한의 생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살려주십시오. 보안요원과 저의 동료들이 같이 나왔지만, 입구에서 괴물에게 절반 이상이 죽고 밖으로 나오다 거의 모두 당했습니다. 겨우 저와 여기 있는 두 명만이 운 좋게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신 운도 따랐겠지만 태양이 살린 거다.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넘어가지. 일단 시간이 많지 않다. 연구소로 통하는 위치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게 있으면 지금 빨리 말해.”
이들은 태양 빛이 살렸다.
다른 이들은 빛 한 점 없는 곳에서 쓸쓸히 좀비들의 한 끼 식사로 생을 마감했을 거다.
연구원은 성현이 구출에 나선다는 소리에 생각나는 전부를 알려줬다.
“동원아, 세 개 팀만 추려라. 많이 가봐야 좁은 데서 총질하다 서로 다친다. 오 분 안에 준비시켜.”
“네, 대령님. 알겠습니다.”
최동원 중령이 성현의 지시에 따라 대기 중이던 전투 부대 5개 팀을 소집했다.
모두 서로 가겠다고 아우성인지라 최 중령은 자신의 팀인 1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장들 나오라고 해서 1:1 가위바위보를 시켰다.
진 팀장들은 팀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싸! 아저씨, 우리 사람들 구하러 가는 거예요?”
성현의 반쪽 같은 해미가 신이 나서 방방 뛴다.
“그래. 그리고 해미야, 나보단 우리 대원들 다치지 않게 신경 좀 써줘.”
“네엡-! 걱정 마세요. 저 이제 타겟팅 50m 안에서도 안 빗나가고 잘 맞춰요.”
성현은 해미의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며 대원들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자, 출발하자.”
성현의 출발신호와 동시에 6대의 차량들이 아스팔트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4대의 험비와 장륜 장갑차량인 바라쿠다 2대가 이번 구출 작전에 동원되었다.
바라쿠다는 독일제 TM170 장갑차를 원형으로 국내에서 독자 개발한 것으로, 7.62mm 탄을 방어할 수 있으며, 시속 100㎞로 고속 주행이 가능했다.
또, 상부 포탑에는 XK13 신형 자동유탄발사기가 장착되어 있어, 공중폭발탄(HEAB)을 사용해 홀로 지역 방어가 가능할 정도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한다.
“아저씨, 왜 자꾸 웃어요?”
“저 장갑차만 보면 기분이 좋네. 저게 뭐냐 하면은······.”
“아-, 안 들을래요.”
해미는 또다시 시작된 밀리터리 이야기에 귀를 막고 흔든다.
성현은 그러든 말든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저 장갑차가 얼마나 멋진 놈인지 설명하기 바빴다.
“대령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제는 성현의 보좌관이자 담당 운전수가 된 강용칠 중위와 수석보좌관이자 당번병인 천두식 대위가 성현을 대단하다며 치켜세운다.
주변에 간신들도 끼고 있어야 항상 의심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게 된다는 게 성현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두식과 용칠이 나쁜 뜻으로 저러는 건 아니니 봐주고 있다.
기분만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다.